에버레디 플랜

 


1. 배경
2. 전개
2.1. 1차 : 1952년 발췌개헌
2.2. 2차 : 1953년 휴전협상 반대 및 반공포로 석방
3. 실행되지 않은 이유

명백히 외세인 미국과 UN군사령부에 의해 기획된, 이승만 대통령 축출을 목표로 했던 쿠데타 계획.

1. 배경


한국전쟁 발발 이래 한국과 미국의 사이는 그렇게 원만한 것이 아니었다. 개전 직후야 당장 한국이라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이승만도, 한국 정부도 미국과 미군의 행동에 군말없이 따랐고 사실 이대로였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 이후 미국은 북진통일이라는 승리 조건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슬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고, 이승만은 전선이 안정되자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전쟁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양자의 생각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2. 전개


에버레디 플랜의 원안은 1952년에 먼저 등장하였으며 이후로 1953년에 구체화되었고, 이후로도 언급되었다.

2.1. 1차 : 1952년 발췌개헌


1952년 5월 26일,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다수의 야당 정치인들이 체포되자 경악한 미국 정부는 대책을 마련했고 6월 25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마크 클라크 UN군 사령관에게 극비전문을 보내 비상시 한국 정부를 장악할 상세한 정치, 군사적 계획의 수립을 요구했다. 7월 2일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5일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 체포를 포함한 일련의 군사 계획안 수립이 끝났음을 보고한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적 압력에 굴복한 이승만이 체포한 국회의원과 야당 정치인들을 석방했고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자, 한국 국민 전부를 적으로 돌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다만, 당대 인물들의 전후 증언을 보면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된 1월 이후로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무언가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장면의 2대 총리 재임시기(1950.11.23~1952.4.23) 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선우종원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이 총리를 사직한 직후인 1952년 5월 10일 새벽,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이 자신의 자택을 방문하여 갑작스레 쿠데타 동참을 요청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선우종원이 이용문의 평양고보 2년 후배라는 점을 이용해, 장면을 포섭하여 추대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때 이용문이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의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는 것. 이용문의 주장이 동조자 확보를 위한 뻥카인지, 아니면 실제 동의를 받은 것인지는 불분명하다.[1]

2.2. 2차 : 1953년 휴전협상 반대 및 반공포로 석방


195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대선공약, 그리고 실제 취임 후 정책추진은 일관적으로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과 미군의 조속한 귀환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내외적으로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반대하던 말던, 1953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었고 소련에서는 그 후계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장 권력투쟁을 벌이던 이들에게 베리야건, 흐루시초프건, 말렌코프건 한국의 전쟁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로서 냉전의 양대 축인 미국과 소련의 수뇌부 모두 한국전쟁을 끝내자는 쪽에 서 있었다. 이승만에게 이는 매우 불만족스런 일이었다. 이승만이 전쟁 이전부터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단순하게 자신의 꿈인 북진통일이 실패하는 것에 대한 불만일 것이고, 북진통일이 단순 정치적 구호였다면 자신의 정권 유지에 있어 전쟁이 적당히 지속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 정부의 휴전 반대 의사가 명백해지자 미국은 원치 않게 전쟁이 지속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만약 한국 정부가 휴전을 거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물론 현실적으로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군이야 그렇다치고 중국군까지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이 전쟁을 지속한다면 공산진영에서는 '''너님들 휴전한다 해놓고 왜 전쟁 계속함?''' 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게 뻔한 일이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을 버려두고 UN군이 철군한다는 것도 모양새가 안좋았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여차하면 군사력으로 한국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발췌개헌 시기인 바로 작년에 수립했던 계획이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이때 계획을 1년 뒤에 약간 수정보완하여 꺼내들기만 하면 되었다.
1953년 5월 4일,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휘하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추상적 수준으로 최소 UN군정 실시, 최대 이승만 축출 및 친미적인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비상계획을 수립한다. 이때가 되어서 비로소 구체적인 작전명인 에버레디(Everready)가 등장한다. 6월 8일,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에버레디 플랜을 승인했다. 다만, 이 승인은 바로 작전을 실행하라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인 6월 18일, 이승만은 UN군과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일제 석방한다. 후일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임기 8년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고 언급했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침 면도 중에 보고를 받고 화들짝 놀라 얼굴을 베었다. 처칠은 매우 분노하여 이승만이건 뭐건 다 박살내고 한국에 신정부를 세우자고 아이젠하워에 요청했을 정도였다. 에버레디 플랜의 발동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 대통령이 처칠 같은 인물이었다면 바로 실행되었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신사로 유명했던 아이젠하워였고, 아이젠하워는 일단 꾹 참은 뒤 국무부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한국에 급파한다.

이승만도 자기가 계속 미국과 각을 지면 어떻게 될지 아주 잘 알았고, 이미 저지른 반공 포로 석방은 뒤로 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기로 로버트슨과 합의했다. 그렇게 휴전이 되었음에도 이승만은 공공연히 휴전을 인정하지 않자 테일러는 자체적으로 10월 28일 에버레디 플랜의 수정안을 준비하고 신임 UN군 사령관 존 헐의 승인을 받았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해가 바뀐 1954년 11월 8일, 도쿄에서 헐, 테일러 등 군부 인사와 주한미국대사 엘릭스 브릭스 등이 모여 이승만이 계속 휴전을 거부할 경우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는데 동의하고 본국에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말로만 휴전 불인정을 외치고 실제로는 한국군에 휴전을 무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 등,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백악관, 그리고 워싱턴의 관료들은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3. 실행되지 않은 이유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 본인이었다. 이승만은 노회한 정객답게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미국과 싸웠고 휴전협정을 거부, 부인했지 '''정작 실질적으로 휴전 협정에 도전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이 휴전을 거부하고 한국군이 계속 교전행위를 할 경우 바로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려 했으나 이승만은 멍청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미국이 자신을 축출시킬 명분이 될 휴전협정 부인을 말로만 하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딱 한 번, 반공포로 석방으로 실력행사를 했는데 이건 이승만도 승부수를 던진 경우.
미국이 직접개입으로 한국의 민주정부를 엎어버리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긴 것도 중요했다. 어찌 되었든 이승만은 존경받은 독립운동가이자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원수였다. 1952년에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긴 했으나 국민들은 그런 이승만에게 압도적인 표심으로 지지를 보내주었고 이는 에버래디 플랜을 준비하던 미국에게 상당한 고심거리였다.
미국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라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아이젠하워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런 정치공작과 개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내할 사람이긴 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과 검토를 거친 후 참모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들어보며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이자 화끈한 개입주의자인 처칠이 반공포로 석방때 격분하여 개입을 주장했으나 아이젠하워는 용케 참고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어 이승만과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현실적인 문제로, 한국군을 장악할 수단이 없었다. 군사적으로 한국 정부에 개입하자면 전쟁으로 그 수가 급격히 불어난 한국군을 통제해야 하는데, 발췌 개헌 과정에서 군부의 대표로 명망높던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해임, 사실상 숙청당했다. 미국은 이종찬을 보호하기 위해 1년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도피성 유학을 보냈다. 1952년에 쿠데타를 준비했던 이용문은 휴전을 1달 앞두고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종찬 이후 한국 군부의 대표자로 거론되던 사람 중 백선엽이 있었고, 실제 미국도 백선엽을 활용할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백선엽은 휴전을 두달 여 앞둔 1953년 5월,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갑작스런 초청으로 한달여간 전선을 비우고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를 에버레디 플랜을 앞두고 한국 군부를 통제하고 협조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백선엽 역시 견제하고 있었고, 백선엽 또한 무리하게 정면에 나서서 이승만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1] 참고로 이용문의 쿠데타 계획에 있어 No.2가 작전교육국 차장 '''박정희''' 대령이다. 우리가 아는 그 박정희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