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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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며 제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2]
6.25 참전용사이자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여 '참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제 시절 일본군 장교의 일원으로 참전한 친일 행적이 있었지만, 그런 이들 가운데서도 보기 드물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 및 반성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독재 정권에 순응하지 않은[3] 고위급 군인이기도 하다. 2009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16년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현 창원시 진해구)에서 조선귀족회 부회장을 지낸 자작 이규원(李圭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을사3흉 중 하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하영[4][5] 으로 대한제국 외무대신까지 올랐으며 서해 어로권과 내륙 항행권을 일본에 넘기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만년에는 반도 최대의 고무신 회사인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업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는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채병덕과 함께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 3월 졸업했다. 일본 육군 보병 제3사단 아이치현(愛知縣) 도요하시(豊橋)의 공병대대에서 6개월간 대부(隊部)실습을 거친 후 같은 해 9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7년 6월 제49기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6] 임관하던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제2차 상하이 사변에 파견되어 일선 공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자작 이규원의 아들로서 치열한 전장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매일신보』1938년 9월 13일자에는 본인의 사진과 함께 그의 '진중시(陣中詩)'가 여러 편 실렸다. 그 가운데 한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전 중이던 1938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약 3년간을 전선에 있다가 1940년 겨울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했으며 훈 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어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등의 금치훈장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과 김석원, 두 명뿐이었다.적병들이 왕가진을 사수하니(敵兵死守王家陣)
육탄으로 돌격한 15용사여(肉彈直入十五勇士)
화염과 폭음이 천지를 뒤흔드니(火焰爆音動天地)
그 이름 천추에 전해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네(名傳千秋答皇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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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진의 15용사를 읊다(詠王宅十五勇士)
1942년 초 도쿄(東京)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敎)에서 수학했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뉴기니에 파견되었다. 1942년 12월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 육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소속 부대가 동부 뉴기니에 파견되었는데 오웬 스텐리 산맥을 통과하여 남단의 포트 모르즈비(Port Moresby) 공격 등에 투입되었다.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퇴각한 이래 종전할 때까지 남태평양 일대를 전전했으며, 12월에 공병 소좌로 진급했다. 1944년부터는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고 종전을 맞는다.
그는 육사 생활에서도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귀족 출신들이 가지 않았던 공병을 지원하여 동기들은 졸업식 때에 가서야 그가 귀족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곧은 인물로, 뉴기니에서는 예쁜 원주민 처녀를 데려와서 차 심부름(사실상 성적 노리개 역할)을 시키려 한 사령관[7] 의 명령에 이렇게 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말로 거부했다가 최전방 요새 섬으로 전출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치 독일군이나 여타 막장 군대에도 개인적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는 군인들은 있는 법이다. 근데 그게 정상이다. 그만큼 일본군이 엉망으로 돌아갔다는 증거.상관의 명령은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알고 따르라고 배웠지만, 천황 폐하라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리라 봅니다.[8]
이종찬의 아버지인 이규원이 사망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있던 1945년 4월이었는데, 아버지의 부고와 작위를 세습하라는 통지서를 받은 이종찬은 가족들에게 습작하지 말라고 연락해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대놓고 총독부에 '습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뭔가 뒤끝이 안 좋을 것 같고, 그렇다고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습작을 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그냥 총독부에는 아무 회답도 하지 않은 채 넉 달을 뭉개며 버텼다고 한다. 전쟁이 점차 막바지로 접어들자 총독부에서도 습작 문제 따위로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별다른 독촉 요구는 없었고, 결국 습작하지 않은 채로 광복을 맞이했다는 것. 만약 이때 습작했다면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의 요직에는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습작을 한 정도의 거물 친일파는 친일파라도 상관 없이 중용했던 이승만 측에서도 100% 실드를 쳐주기엔 무리 있는 경력이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작 작위도 습작하지 않는 등 어느 정도의 의식은 있었다. 다만 이종찬의 아버지가 사망한 시점이 1945년 4월(패망 4개월전)이라 전선에서 복무중이던 이종찬으로서는 일본의 패망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습작을 거부했다는 비판도 있다. 철저히 실리적으로 파악했다는 것. 습작 거부 이전에는 일본 귀족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했다든지와 같은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나, 이것은 딱히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없다.[9]
2.2.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현지에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6월 귀국하였는데, 다른 일본 육군 출신 동료들이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에 속속 들어가 간부가 되었을 때에도 자신은 민족의 죄인이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여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1949년 6월 입대하여 공병대령으로 임관한다. 이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지만, 그 개인이 악질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던 것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습작을 하지 않았던 점 등이 인정되어 특별히 처벌은 받지 않았다.
2.3. 6.25 전쟁
6.25 전쟁 발발 후 이종찬은 제3보병사단장으로 영천 사수 작전에 참여했으며, 서울 수복 직후인 10월 1일에는 그가 지휘하는 3사단이 국군 부대들 가운데 38선을 최초로 돌파, 북진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지정된 것도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그는 최대한 전쟁에서도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백일 군단장이 영덕군을 공격하고 있던 그의 부대가 읍내 시가지에 틀어박힌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 고전하고 있자 ''''읍내에 직접 포격도 하고, 불도 지르고 해서 빨리 진입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런 마적단 토벌 방식[10] 을 같은 동포가 사는 곳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항명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9월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북한 영내로 북진하고 나서도 북한 내 공산당원이나 인민군에 앞장서 협력했던 자들에 대해 휘하 지휘관이 즉결처분을 하려고 하자 ''' '아무리 그래도 비전투원을 그렇게 재판도 없이 처형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저들이 인민재판으로 우리 양민들을 마구 죽인 것을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즉시 경찰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받게 하라' ''' 고 명하여 학살을 막기도 했다. 그 밖에도 북한군 포로를 끌고 다니기 힘든 휘하 지휘관들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자 역시 이를 막아 포로에 관한 국제법 규정대로 수용소로 후송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로 원칙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었다.
이후 이종찬은 병기행정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최전선을 떠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복무하게 되며,[11] 그 후 육군종합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51년 6월에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물러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제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되었고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흠좀무한 건 이 당시 그보다 계급이 높은 장군들도 존재했었다는 것. 그 정도로 그의 인망과 능력에 대한 신임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결혼을 하게 되는데, 상대 여자의 집안이 형편없다는 것을 문제삼는 모친께 효자였던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습작을 거부한 친일파였던 이 집안이 과연 그렇게 잘났던가라는 식으로 항변하자, 모친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 링크
2.4. 군의 정치 중립성 강조
한편으로 그는 줄곧 군의 중립성을 강조해온 인물이었다. 그 시작은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그의 행적에서 나타났다.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대통령으로 재선되기 위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때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때 이종찬은 이른바 '''''''육군본부 훈령 제217호'를 내린다.[12] 그 내용을 간단하게 줄이면 ''''군은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것. 즉 이승만의 계엄령을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방장관이 육군본부측에 내렸던 파병 명령도 거부했다. 당연히 이승만은 대노했고, 심지어 당시 유재흥 육군참모차장에게 '이종찬을 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려다가 유재흥의 설득으로 그 명령을 철회했다고 한다. 이후 이종찬은 이 때문에 이승만의 미움을 샀고 결국 참모총장직에서 13개월만에 해임되었다.[13]
이종찬은 해임되기 얼마 전에 주한 미 대사관의 앨런 라이트너 공사를 만나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대통령, 내무부 장관, 계엄사령관을 가택연금시킬 수 있다"고 사실상 쿠데타를 제안했다는 증언이 있다. 라이트너 공사가 국무부에 "이제 한국군 참모총장이 (이승만을 제거함으로써)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채택 가능한 방안인가에 대해서 숙고해볼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전보를 보낸 것 역시 확인된다.
이후 그는 미육군지휘참모대학으로 1년간 유학을 다녀온 뒤 1953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김재규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인간적으로도 각별한 사이가 된다. 김재규와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이 때 김재규가 상관 송요찬과의 대립으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을 때 이종찬이 감싸주어 육군대학 휘하에 편제 외 보직까지 만들어가며 그를 데리고 온 것. 또 김재규의 준장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14] 나중에 10.26 사태가 터지자 이종찬은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김재규의 10.26 강행이 군의 정치중립을 강조했던 이종찬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는 조봉암의 감형을 이기붕에게 탄원하는 등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박정희 등 소장 장교 세력에게 일종의 얼굴마담격으로 쿠데타의 지도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많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에 장병들의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표를 찍도록 독려하라는 지시가 고급 장교들에게 내려오자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종찬은 개인적으로는 이기붕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국민방위군 사건당시 국방부 장관이 되는 이기붕, 국회쪽 관계자로 조봉암과 신임 육군 참모 총장 신분이 되었던 위치에서 만난 인연도 있다. 위에서 소개된 이종찬의 결혼도 이기붕이 이종찬의 모친을 찾아가 일국의 육군참모총장이 총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체면상 걸맞지 않다고 설득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명령에 정면으로 항명하고도 비록 한직으로나마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개인적 능력 외에도 이기붕과의 친분 관계가 그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종찬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당시 육군대학 교관의 회상에 의하면 이강석이 1960년 3.15 선거 며칠 전 이종찬을 찾아왔을 때 "부정선거를 하게 되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지금 부정선거 지령이 내려와 있는데, 물론 나는 이박사와 네 아버지를 찍겠지만, 육군대학 장병들은 절대 자유 의사에 따라 투표를 하도록 하겠다. 이 따위 부정선거 지령을 누가 내렸느냐?"고 일갈했다.
1960년 최종 계급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같은 해의 4.19 혁명 발생 후에는 국방부장관이 되어 친이승만 정치군인들을 군에서 몰아내는 일에 주력했다. 이때 그는 3군 참모총장과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 1960년의 제헌절날 헌법 준수 선서식을 거행하게 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강조한다. 그러나 곧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1961년부터 6년간 주 이탈리아 대사를 맡게 된다. 국내 정치에서 떨어뜨려 놓겠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종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당시 스페인 유학생 아가씨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유부남이었으므로 이는 분명한 불륜이다.[15]
그는 쿠데타 자체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5.16 자체는 불가피한 현실[16] 로 받아들이고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에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으나,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하고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 집권으로 향하자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76년 유신정우회[17] 의원으로 제9, 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김재규(당시 건설부 장관)의 간청도 있었고 유신 정부의 강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신 정권은 참군인으로 이름높던 그를 유정회에 끌여들여 정당성을 높이려 했다.[18]
하지만 군은 정치를 해선 안된다는 신념과 양심 때문에 유정회 의원직을 늘 가시방석처럼 여겼고, 실제로 국회에서는 딱 한번 발언하고는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뱃지도 주요 공식 석상에만 달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의 태도가 유정회로선 더 고마운 일이었다. 단지 얼굴 마담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게다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때 제명 찬성표를 던졌는데, 유정회 소속으로서 조직의 결정에 반기를 들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유정회 의장에게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가 불행해질 것이다''''라고 얘기는 했다고.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10.26으로 김재규가 처형되자 이종찬도 김재규와의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으로 인해 곤란한 입장에 놓일 뻔도 했지만, 군 원로로서 별다른 제재를 받지는 않았다. 이후엔 공직 일선을 떠나 4년 뒤 1983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3. 평가
이종찬은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흠결이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사적이었고 의로운 행보를 여러 차례 꾸준히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 밑에서 장교 경력을 쌓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집안이 저지른 친일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하였고 작위 세습 또한 (결과적인 감이 있으나) 거부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에서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고위직에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들의 독재적 행보나 군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면적인 행보는 이종찬 장군을 단순히 '부역자'나 '참군인'과 같은 일차원적인 수식어로 정의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한다. 이로 인하여 이종찬 장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극명하게 나뉜다. 비판적 입장에서는 결국 불의한 정권 밑에서 군인으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것은 곧 부도덕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높은 평가를 내리는 관점에서는 전형적 친일파들과 다르게 반성적 의지를 드러냈으며 독재 정권에 아첨하지 않은 강직한 군인이기에 단순한 부역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로서는 옹호적인 시각이 훨씬 힘을 얻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에 그토록 많은 오점을 남긴 정치군인들이 존재했던 와중에도 드물게 권력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고수했다는 점이 주목받는다.
당대인들의 인식에서도 이종찬은 오히려 긍정적인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민특위의 조사 결과에서도 그를 적극적 친일파로 여기진 않았다. 승진 속도도 매우 빨랐다.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권력자가 모두 이종찬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으며, 이종찬의 쓴소리를 듣고도 그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였다. 야당 인사들마저도 갖은 수를 써서 탄압하고 방해하던 독재 정권에서 유독 이종찬을 대놓고 함부로 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군 내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의 일본군 시절 행적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나 완전한 민족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홍사익과 비슷한 경우로, 이종찬이 기본적으로 일본 육군 시절 적극적 친일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보고서에서 모두 동일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소위 이상의 군인'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한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친일시와 금치훈장 수상 문제에서는 일단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이 부분은 이종찬 장군 스스로도 변명을 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귀족인 이하영의 손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작 친일파 집안에서 태어난 이종찬이 사욕이나 권력을 탐하는 정황을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장교가 된 것으로 친일행적이 끝났다는 것은 되려 정상참작의 요인이 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던 점 역시 그에 대한 옹호를 가능케 한다.
오늘날 이종찬이 참군인으로 존경받는 중요한 지점은 해방 이후의 정국에서 군과 정치를 분리하려 노력한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발췌 개헌을 위해 임시수도인 부산을 포함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군대 동원을 거부한 것은 상당히 의로운 결단이었다. 이 때 이종찬이 이승만에게 동조했다면 끔찍한 희생이 초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조봉암 감형 요구, 부정 선거에 대한 소극적 저항, 김영삼 옹호와 같이 체제 자체를 변혁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독재 정권 하에서 매우 하기 어려운 일들을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저 세 사례 모두 당시 대통령들의 독재적 행동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으로, 내부자로서도 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실제로 쿠데타를 암시하는 발언까지 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도덕적이었다는 점도 고도로 부패한 정치군인들과는 차별점이 되는 부분이다. 부패하고 권력에 굴종한 대다수의 고위 군인들과 다른 이러한 양심적인 면모는, 비록 독재 정권의 내부인이지만 그 중에서 보기 드물게 양심이 있었던 군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독재 정권에서 군 요직을 담당했다고는 해도 그다지 실세 권력의 대열에 있지는 못하였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고작 13개월만에 육군참모총장 옷을 벗은 것도 그렇고, 5.16 이후에 주이탈리아 대사로 전임된 것 역시 그렇다.[19]
그는 삶을 통틀어서 상당히 일관적인 자세를 가졌으며, 그만큼 진정성을 보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내부자였다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재산과 신체를 비롯해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운동가들에 대하여 이종찬이 떳떳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보수성향을 가진 예비역 인사들이 유독 이종찬을 고평가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의도가 있음을 파악하면서 이종찬이라는 인물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3.1. 광복군 기용
친일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일본군에서 활동했던 과거가 부채 의식으로 작용했는지, 그는 광복군과 독립군 출신 인물들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임 당시 광복군 출신을 가능한 한 기용하려고 애썼는데,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면서 초대 교장으로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20] 당시 준장[21] 을 기용하면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군들도 능력상 뛰어난 인물은 많지만, 적어도 육사만큼은 광복군 출신 장군이 초대 교장을 맡아야 육사의 정통성이 수립될 수 있다'고 했다.
3.2.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등재
이러한 추앙 여론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예가 바로 이종찬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다는 점이다. 한 인물의 행위와 내면에는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친일을 했다고 해서 단순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을 선정하는 기준 중 중요한 것이 친일과 항일의 순서 문제이기 때문에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선친일 후항일'은 친일파로 보지 않고, '선항일 후친일'의 경우에는 친일파로 전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인물이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기준이고, 반대로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에는 최남선처럼 독립운동을 했다가 뒤에 변절한 경우에도 친일파로 등재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을 했다가 후에 반일을 한 사람은 등재되지 않는다. 다만 해방까지 계속 친일을 했다면 후에 좋은 활동을 하더라도 일단 실리기는 실릴 뿐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이종찬의 경우 해방 이후에는 반성적인 모습을 꾸준히 보였지만 해방 이전까지는 일단 군복무를 계속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등재되어야 맞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무슨 정치적 살생부도 아니고 사실 판단을 위한 것인데 해방 이후의 긍정적인 면모를 가지고 이종찬이 친일을 아예 안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종찬을 이용해 친일인명사전 자체를 공격하려는 반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종찬 외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들 가운데서 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한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적지 않다. 장면 총리, 송창근 목사,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 현석호 전 국방부장관 등이 그 예다. 이 책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종국의 아버지 임문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종찬의 경우에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친일파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별다른 특이점은 찾을 수가 없어 특별한 처분을 받지는 않았다. #
3.3. 5공화국때의 평가
《참 군인 이종찬 장군》이라는 그의 평전이 1986년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 책에 그의 행적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직 전두환 군사정권이었던 시절에도 이종찬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두환이 육사의 정규 4년제를 받은 첫 세대라는 자부심을 자주 내세웠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평전 출판을 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전두환이 체포되어, 서울로 올라가던 도중, 독립기념관을 자기가 세웠다며, 형사들에게 이야기했던 것도 마찬가지.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전두환 정권 자체가 아닌 전임 군사정권인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허용되는 분위기가 있었다.(드라마도 나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속내야 둘째치고 어쨌거나 전두환 본인이 7년 임기만 채우면 확실히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려면 그 이전 정권의 일부분을 비판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 독재자가 전 독재자를 비판하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이다.
4. 이종찬을 연기한 배우
[1] 원적(原籍)은 서울로 되어있다.[2] 창군 초기엔 계급 체계나 군 체계 자체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소장, 중장이 참모총장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창군 초기엔 '''대령''' 사단장도 있었다. 백선엽 장군이 6.25 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을 정도.[3] 다만 반타의적이긴 뭐건간에 유신정우회에 참여한 흑역사가 있다.[4] 대한제국 시기 외부 관료로 1910년 경술국적 가운데 하나인 매국노.[5] 호러스 뉴턴 알렌과 만난 인연으로 통역 관련 때문에 벼슬자리 간 점이 윤치호에게는 우습게 보였는지, 그가 사망했을 떄 로또 당첨된 듯한 투로 서술하는 것이 윤치호 일기에도 나온다.[6] 귀족들은 공병에는 잘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공병에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인 동기들은 졸업식 때 이종찬이 귀족들 자리에 가는 걸 보고서야 그가 조선인 귀족 집안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일본이 2차대전 웨이크 섬 전투를 통해서야 불도저를 알게 된다는 점과 더불어 제대로 된 건설분야에 대한 이해인식이 미국에 비해서도 확연히 부족한 점을 지적될 수 있다.[7] 참고문헌의 원문에는 深堀 소장으로 되어 있고, 1943년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므로 정황상 육군 소장 후카보리 유우키(深堀游亀)로 추정된다.[8] 『참군인 이종찬 장군』, 동아일보사, 1986, 강성재, P.116[9] 사실 이건 창씨개명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는 아무런 평가도 할 수 없다. 친일파 중에서도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은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어도 가문을 버릴 수 없다는 논리가 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무언가를 인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반대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무조건 친일파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10] 위 명령을 내린 김백일은 만주군, 그것도 '''마적단 토벌에 특화'''된 간도 특설대 출신이었다.[11] 박훈산 시인의 회고에는 이때 피난 와있던 문인들이 모여서 건군기념예술제전의 명목으로 김영수 원작의 '고향 사람들'을 상연하고, 이종찬이 공연에 배우로 참가했던 문인들에게 뒤풀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참석한 문인 대부분이 육군종군작가에 공군종군문인단 소속으로, 술자리에서 "우리 군의 혁혁한 무공으로 말미암아 전국은 안정되어간다"는 뜻의 발언이 나왔는데, 듣고 있던 조지훈 시인이 "'''오로지 그 공은 이름도 없는 산야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이슬로 사라져 간 무등병(無等兵)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자 장내가 그만 찬물 끼얹은 듯이 잠잠해져버렸다. 이에 이종찬은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기 어깨에 붙은 별 세 개 계급장을 떼어버리고는 "'''자, 이제 됐지요? 나도 이걸로 무등병입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출처: 박훈산, <대구 피난시절의 문우들, 그 기이한 생활들>[12] 그런데 이 훈령 내용을 기초했던 게 다른 사람도 아닌 박정희다. 훗날 그가 군 본연의 임무 대신 권력에 집착하여 독재자가 되고 만 것은 아이러니한 일.[13] 일군육사 파벌 최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던 이종찬이 총살된다면 그 날로 일본육사 파벌은 군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 유재흥 역시 일본육사 출신이었다.[14] 김재규는 5.16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15] 당시까지만 해도 고관들은 공공연하게 첩을 두는 것이 흔했다. 여성의 권익에 대한 고려가 극히 부족한 시대상에서 이종찬도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던 셈.[16] 5.16 직전의 사회상은 혼란스러워서(물론 이것조차도 지금은 갑론을박이 많은 주관적인 평이긴 하다), 초기만 해도 쿠데타 차제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물론 군인들이 내세운 공약인 '즉시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란 말을 믿고 말이다. 이런 의견을 보인 사람 중에는 장준하, 조지훈과 같이 훗날 박정희 정권에 강하게 저항한 저명한 운동가들도 포함되며, 쿠데타 군인들을 경계하여 군인들이 본 직분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 함석헌 같은 인물은 아주 이례적인 통찰력을 발휘한 경우다.[17] 정식명칭 유신정우회. 대통령이 지목하는 방식이다 보니, 이종찬이 유정회 의원이 된 것은 타의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18] 이종찬은 이때 한 번 정도는 박정희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해서 감수하려고 했는데, 10대 유정회 의원 명단에 또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걸 알자 친분이 있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하여 '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또 넣었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뜻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19] 말은 전임이지만, 당시 군사 정변의 주역들 입장에서 군 경력이 압도적인데다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원로 인사인 이종찬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20]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이나 안타깝게도 똥군기를 내세우는 인물이었다. 병영부조리참고.[21] 육군사관학교의 역대 학교장 명단에는 그가 제9대 교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부터 육군사관학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 때문. 정규 4년제 사관학교로 개교된 것은 1951년 10월의 일로, 이때의 첫 교장이 안춘생이다.[22] 제1공화국(MBC)에서는 송진우 역을, 제3공화국(MBC)에서는 박종규 역을, 제4공화국(MBC)에서는 김재규 역을 맡았다.[23] 이승만 전문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