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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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20일 1대 대선
| →
| 1952년 8월 5일 '''2대 대선 3대 부선'''
| →
| 1956년 5월 15일 3대 대선 4대 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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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6일 2대 부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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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 '''대통령 선거:'''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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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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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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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 |
'''득표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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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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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수'''
| 797,504
| '''5,238,769'''
|
'''부통령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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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 |
'''득표율'''
|
|
'''41.3%'''
|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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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수'''
| '''4,012,654'''
| 3,80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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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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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무소속''' '''함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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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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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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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 음성1952년 8월 5일 '''
6.25 전쟁 도중'''의 선거로 총 4명의 후보가 나왔으며 '''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선거이다.'''
제3대 부통령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다.
2. 배경
당시의 헌법 상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대거 탈락한 영향으로 국회가 여소야대로 돌아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회 간선제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방식을 기존의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수정하고자 하였고, 이는
1차 개헌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이 탄 버스를 연행하여 국회의사당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한 뒤, 상정된 헌법개정안을 기습 표결한
부산정치파동이 벌어졌다.
발췌 개헌이라고도 불리는 이 헌법 개정을 통해서 대통령 선출 방식이 종래의 국회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어서 본 선거부터 적용되었다.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 조봉암,
자유당 이승만,
민주국민당 이시영[1] 입후보는 무소속으로 했지만 민주국민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이후 공식적으로 민국당과 연대를 선언했다.
,
무소속 신흥우 총 4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부통령 선거도 직선제로 치뤄졌으며
무소속 함태영,
자유당 이범석 등 9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3. 과정
전시임에도 당시 한국 인구 2천 만 명 중 유권자가 8백 20만 명인데, 7백 20만 명이 참여(88.1%)한 선거로써, 역대 세번째로 높은 선거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다.
[2] 역대 최고의 참여율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의 94%, 두번째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의 89%이다.
기호 2번 '''
자유당'''의 '''
이승만''' 후보가 다른 후보들을 큰 표차로 앞서고 당선되었다. 부산정치파동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갈수있겠지만 사실 전시의 경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집권
여당을 잘 바꾸지 않는 성향이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우드로 윌슨(
제1차 세계대전)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제2차 세계대전)이 있는데,
이승만의 경우도 일단 이것에 해당된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이범석이
자유당 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당선이 유력시되었는데, 이후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져 이승만쪽에서
무소속 함태영 후보를 적극 지원하여 함태영이 이범석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권때 치러진 선거는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하여 선거에 깊이 개입하는게 일상이었는데 이범석에 대한 낙선 시도도 여기에 해당한다.
4. 결과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여부'''
|
1
| 조봉암
|
| 797,504
| 11.4%
| 2
|
|
'''2'''
| '''이승만'''
|
| '''5,238,769'''
| '''74.6%'''
| '''1'''
| '''당선'''
|
3
| 이시영
|
| 764,715
| 10.9%
| 3
|
|
4
| 신흥우
|
| 219,696
| 2.1%
| 4
|
|
선거인수
| 8,259,428
| 투표수
| 7,275,883
|
무효표수
| 255,199
| 투표율
| 88.1%
|
이로써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하며 2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여부'''
|
1
| 이윤영
|
| 458,583
| 6.4%
| 5
| 낙선
|
'''2'''
| '''함태영'''
|
| '''2,943,813'''
| '''41.3%'''
| '''1'''
| '''당선'''
|
3
| 이갑성
|
| 500,972
| 7.0%
| 4
|
|
4
| 조병옥
|
| 575,260
| 8.1%
| 3
|
|
5
| 임영신
|
| 190,211
| 2.7%
| 7
|
|
6
| 백성욱
|
| 181,388
| 2.5%
| 8
|
|
7
| 정기원
|
| 164,907
| 2.3%
| 9
|
|
8
| 전진한
|
| 302,471
| 4.2%
| 6
|
|
9
| 이범석
|
| 1,815,692
| 25.5%
| 2
|
|
선거인수
| 8,259,428
| 투표수
| 7,133,297
|
무효표수
|
| 투표율
| 86.4%
|
참고로 자유당 합동파는 당시 원내 자유당 의원들 중 원외 자유당과 통합할 것을 주장하는 의원들이 만든 교섭단체였다.
무소속 함태영 후보가 3대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4.1. 지역별 결과 (대통령)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지역
| <colbgcolor=#254170> '''자유당 이승만'''
| '''무소속 조봉암'''
| '''민주국민당 이시영'''
|
전국
| '''5,238,769 (74.6%)'''
| 797,504 (11.4%)
| 764,715 (10.9%)
|
서울
| '''205,300 (82.2%)'''
| 25,631 (10.3%)
| 14,883 (6.0%)
|
경기
| '''657,174 (87.7%)'''
| 44,967 (6.0%)
| 34,704 (4.6%)
|
강원
| '''366,583 (92.4%)'''
| 10,516 (2.7%)
| 13,378 (3.4%)
|
충남
| '''636,061 (82.4%)'''
| 56,590 (7.3%)
| 58,754 (7.6%)
|
충북
| '''386,665 (86.7%)'''
| 25,875 (5.8%)
| 23,006 (5.2%)
|
전남
| '''823,587 (73.6%)'''
| 99,885 (8.9%)
| 165,245 (14.8%)
|
전북
| '''468,220 (65.9%)'''
| 109,490 (15.4%)
| 96,271 (13.6%)
|
경남
| '''693,523 (55.4%)'''
| 288,654 (23.0%)
| 211,544 (16.9%)
|
경북
| '''921,988 (75.0%)'''
| 129,791 (10.6%)
| 140,271 (11.4%)
|
제주
| '''79,668 (83.8%)'''
| 6,105 (6.4%)
| 6,659 (7.0%)
|
4.2. 지역별 결과 (부통령)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지역
| '''자유당 이범석'''
| '''무소속 함태영'''
|
전국
| 1,815,692 (25.5%)
| '''2,943,813 (41.3%)'''
|
서울
| '''117,326 (46.2%)'''
| 70,206 (27.6%)
|
경기
| 252,090 (33.1%)
| '''347,799 (45.6%)'''
|
강원
| 129,704 (32.3%)
| '''223,534 (55.6%)'''
|
충남
| '''452,209 (57.6%)'''
| 118,291 (15.1%)
|
충북
| 130,843 (28.9%)
| '''216,233 (47.8%)'''
|
전남
| 59,318 (5.2%)
| '''729,541 (64.2%)'''
|
전북
| '''235,637 (32.5%)'''
| 190,246 (26.3%)
|
경남
| '''306,982 (24.1%)'''
| 296,766 (23.3%)
|
경북
| 97,256 (7.8%)
| <colbgcolor=#808080> '''716,794 (57.4%)'''
|
제주
| 34,327 (35.9%)
| '''34,413 (36.0%)'''
|
5. 뒷이야기
북한과 전쟁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첫 직접민주주의 직선제 투표였다. 선거를 제대로 치루기 위한 납북된 정치인, 공무원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민심을 반영하기 어려웠던 것.
이 선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제주특별자치도와
충청남도 금산군 이 두 지역은 65년 동안 역대 대선 적중률 100%를 찍게되었다.
야당에서는 과정을 문제삼지만, 야당의 의견이었던 국무원불신임제도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부산정치파동과 1차 개헌 기습 통과로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중심으로 남부 지역의 대도시에서 이승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부산, 마산, 광주, 대구, 여수 등지에서 조봉암과 이시영의 득표 합계가 이승만의 득표를 넘었고, 부산 일부 지역에서는 조봉암이, 광주에서는 이시영이 이승만을 이겼다.(!) 경남 지역 전반적으로 이승만의 득표는 전국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55% 정도였다.
선거의 결과를 보면 정치파동이 일어난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이승만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경남 지역에서는 이승만의 득표율이 간신히 50%를 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거나(
전북,
전남) 경남과 인접한(
경북) 지역에서는 65~75% 정도였다.
부산에서 먼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제주에서는 압승(82~92%)을 거뒀다. 당시엔
부산이 임시수도였으니 '''여촌야도가
부산에서 일어난 것이다.'''
불과 2년 전 전쟁 발발 시 서울 지역의 이승만 득표율이 의외로 높은 점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던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성향 차이가 주 요인이다. 이 선거에서 2위였던 조봉암은 진보 성향이 강했는데, 당시 서울은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이 강했고 따라서 이승만을 찍는 결과가 나왔다는 의견도 있다.
[3] 실제로 다음 선거에서도 조봉암으로 가는 표보다 신익희 추모표의 비율이 훨씬 높았던 곳이 서울특별시였다.
3위였던 이시영 후보 역시 딱히 영향력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