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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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 헌정 사상 두 번째[4] 이자 마지막 의원내각제 총리.
외교관으로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며 서방 국가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조속히 승인하도록 기여하였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공을 세웠다. 장면은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지향하였고 친미적인 인물이었던 덕분에 작금의 우파 특히 중도 우파 진영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세련된 신사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치적인 결단력이 부족한 편이였다는 소리는 듣는다. 김대중의 정치적 은사이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5] 이후 한국 헌정 사상 최초로 실시된 의원내각제 하의 두 번째 행정수반 국무총리로 제2공화국 내각의 실권을 가진 집권자였다. 그 이전에도 초대 주미대사, 제2대 및 제7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4대 부통령을 지내는 등 요직을 지냈다.
의원내각제 총리 재임 시절 성실성을 바탕으로 여러 사회,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였지만 집권층 내부의 분열을 막지 못했고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고조와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로 인해 집권한지 1년도 안되어 5.16 쿠데타로 실각하고 만다. 일제강점기 당시 가톨릭 교육자로 활동한 행적이 있으며 2009년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오점이 있다.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외교관으로서 초대 주미대사를 역임하며 구미 각국이 대한민국 정부를 발빠르게 승인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명분. 다만 친일 논란에 대한민국장이 건국훈장 중에서도 제일인 1등급이라서 이를 두고 그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은 김대중(세례명 토마스 모어[6] ) 당시 대통령의 의중이 포함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7]
2. 생애
2.1. 대한제국 시대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한성부 서서 적선방 사온동계 사온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의 외가에서 구한말 탁지부주사를 지낸 아버지 장기빈(張箕彬)과 어머니 장수 황씨 황루시아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의 11대손으로, 그의 선대는 본래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 지역에서 세거해왔으나 7대조 장익붕(張翼鵬)이 처가가 있던 평안도 성천도호부(현 평안남도 성천군)로 이주했으며, 고조부 장인각(張仁珏)이 평안도 성천도호부에서 인근의 중화도호부(현 황해북도 중화군)으로 재차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한편, 그의 집안은 영남남인계 양반 출신이었으나,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급제한 10대조 장이유(張以兪)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는 이인좌의 난을 거쳐 사실상 정계에서 소외되었기에 이렇다할 과거급제자 및 관직에 진출한 선조가 없어 사실상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장기빈이 당시 관직에 진출해있던 조모 진주 강씨의 남동생 강화석(姜華錫)의 권유로 10대 후반부터 한성영어학교·한성일어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여 곧 능통할 수 있었고, 외국어능력 덕에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 관리로 진출하면서 가족들 또한 한성부로 올라오게 되었다.#[8] 1899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의 외할아버지 황성집의 집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당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 루시아 내외는 인천에 집이 있었고 유년기를 인천에서 보냈기에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장면은 태중교인으로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태도가 밴 생활을 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2대 국무총리가 되고도 어머니에게 무릎꿇고 빌 정도로 순종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9]
2.2. 일제강점기
인천성당[10] 부설 박문학교를 거쳐 인천공립심상소학교(현 축현초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1914년 조선총독부 농림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농림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장기빈이 이웃 천주교 신자와 사돈을 맺기로 하고 혼사를 추진해 17세에 2년 연하의 경주 김씨 김옥윤(金玉允)과 결혼했다. 이후 장면은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아내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11] 그러나 모자를 쓰고 칼을 차며 호령하는 일본인 관료가 되는 꿈도 없었고 그의 조용한 성격상 소질도 맞지 않았기에 그는 YMCA에서 운영하는 영어 학원에 진학했다. YMCA 청년회 영어 학원을 2년간 공부하고 YMCA 학원 재학 중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이중 생활을 했는데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제자들 중 1명이 바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였다.[12]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맨해튼 칼리지 대학에 진학했다.
1925년 미국 맨해튼 칼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한국인 대표 자격으로 교황청을 방문한 뒤 귀국하여 메리놀 선교회를 도와 천주교 평양교구 개척을 도왔다. 이후 장면은 평양교구 개척을 위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하고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평양성당에서 평신도 대표로 선교 활동과 성당 사무를 보는데 투신했다. 그 밖에 메리놀 선교회의 한국어 강사를 겸임하며 메리놀 선교회 및 외국인 천주교 신부들의 통역을 맡으며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훗날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가톨릭 입문서의 한국어 편역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성실성을 인정받아 천주교 재단의 추천으로 일제강점기에 동성상업고등학교(현 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 서무주임,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 혜화동 성당 부설 유치원 원장, 계성국민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시학관을 쫓아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교육청에서 지도를 나왔을 당시 동성상업고등학교 학생이었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 때 장면은 김수환을 교장실로 호출했고 뺨을 후려쳤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때렸냐면 만약 저 상황에서 장면이 저런 제스쳐를 안 했다면 김수환은 나중에 곤욕을 치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13] 이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이렇게 보면 장면이 사람을 아끼는 안목이 있었다는 평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참고.
2.3.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를 개최했고 민주의원 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이때 미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 역할을 한 것도 장면의 입신양명에 도움이 되었다. 장면은 주미 한국 전권공사를 역임한 바 있었으며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현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장을 받고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 이승만 본인은 감리교 신자였지만 유럽과 남미 등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신속한 정부 승인을 얻으려면 미국 사정에도 정통하고 가톨릭계에서 신망이 높은 장면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주효하였다. 장면의 노력으로 교황청 및 유럽과 남미 국가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신속하게 승인하기 시작하여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내에서도 북한을 제치고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헤게모니를 선점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터지자 장면은 당일 발빠르게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하며 북한이 한국을 불법으로 침공한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미국 국무부와 유엔을 오가며 한국에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공헌을 하였다.
미국, 1950년 6월 25일, 주미대사 장면과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이 긴급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로비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 공로로 이승만은 그를 국무총리로 내정했고 귀국 후 제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야당 국회의원들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야당 정치인 시절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으며 이승만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부통령을 지냈다. 이를 두고 이기붕에 대해서는 "병약한 데다 권력에 욕심이 많았고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문제가 많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었고 장면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며 성실하다"는 점을 인정받았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 중 타계해 이승만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부통령으로 장면에게 투표한 이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14] 그런데 당시 이승만은 장면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용공(공산주의 용인과 동조)이나 친일 성향이 있다면서 일명 장면 지지 '''친일용공설'''을 주장했다. 장면을 지지한 국민들 보고 아예 '친일파+용공'이라고 주장했던 것. 그 후 이기붕을 이긴 것이 자유당 세력의 눈 밖에 나서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때 괴한의 총격을 맞아 왼손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던 것. 천주교 계열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은 당시 사건을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저격범들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내부 소행인 것처럼 조작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장면은 대인배같이 선처를 호소하여 감형을 주선했다. 이에 감화된 피고인 중에는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목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60년에 다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이 조작한 3.15 부정선거로 낙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뜻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대한민국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15] 1960년 5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웠고 국무총리가 된 후에는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당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 했던 민주당 구파 윤보선 대통령과 껄끄러운 사이를 유지했다.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큰 권력을 갖지 못하는 대통령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바람에 장면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내각의 리더인 장면이 민주당 신파의 리더이기도 해서 내각 장관들이 신파 일색일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갈등은 클 수밖에 없었다. 국무총리 시절 장면은 이름처럼(勉 근면할 면) 매우 근면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했고 밤 늦게야 일을 끝마쳤다고 하는데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내각에 의해 세워졌다.[16]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전문가 여럿이 모여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초기 단계의 몇몇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년을 못 채우고 쫓겨난 정권치고는 나름 의욕적으로 일한 셈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 갈등이 너무 심하다보니 1960년 말에 민주당 구파가 대거 탈당을 하여 신민당(1960년)이라는 별개의 야당을 차리는 바람에 거대 여당 프리미엄은 누리지도 못했고 4.19 혁명 이후로 고삐가 풀린 언론에서도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주체를 못하며 장면을 까대는 사설을 내놓는 등 '장면 총리 흔들기'에 동참하다보니 장면 총리의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정책 추진력에 있어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경제 정책의 성과가 나오기도 전에 국무총리직에서 강제로 내려오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한편으로 대통령에 나를 선출하고 부통령엔 반대당인 민주당 장면을 선출한 사실만 보아도 그렇고 친일용공의 표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의 소재를 측정하기가 곤란하다.』
- 이승만, 경향신문. 1956. 5. 27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을 진압하고 있다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보고를 받고서는 정부 주요 인사들과 함께 국무총리 관저(반도호텔)에서 2시간 가량 머물며 장도영의 사후 대처 보고를 기다렸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은 바로 앞에 있다고 연락해 놓고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고 국무총리 관저 인근에서 총격이 벌어지자 우선 피신하시라는 함께 있던 국방부 장관 등의 부탁에 국무총리 관저에 직통 연락망을 구축한 뒤[17] 마지못해 차를 타고 새벽 4시 30분 국무총리 관저를 떠났다.[18] 이후 미국 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고[19] 이에 아내와 자녀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5월 17일 새벽 6시경에 홀로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피신해 외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주시하며 외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6일에는 마셜 그린이 성명을 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서는 감사 전화를 보냈으며 자신은 안전하니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7일에는 아침에 프랑스 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장면의 편지를 직접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건네주었고 오후에는 장면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가 전화를 주고 받았다. 18일 오전에는 장면이 직접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취했으며 결국 정오 무렵에는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해 5.16 진압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둔 상태였고 이에 미국은 장면과 연락을 주고 받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태를 방관하게 된다. 초기 소위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쿠데타 세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20] 서울 중심으로 포섭하여 새벽에 국무총리 집무실, 청와대, 서울특별시장실, 방송국, 육군본부 등 주요 기관에 잠입하고 관련 주요 인물을 체포 또는 연금한 뒤 1군 등 자신들의 토벌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 부대를 중간 장교들이 높으신 분들을 습격해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장악한 정도였기 때문에 선전했다 한들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아 기반이 불안정했다. 때문에 대통령인 윤보선을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면을 놓친 것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위험이었다. 이때 주한미군 사령관인 C.B 매그루더는 자신의 허락없이[21]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은 물론이요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까지 일으킨 박정희와 일당들에 대해 격노했으며 요청만 들어오면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제도상으로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동원권이 존재하였으나 미국은 권한의 직접적인 행사를 통한 정치적 개입을 꺼렸고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는 형식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재가 과정에서 차질을 빚자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권한 행사)'를 해달라는 장면의 요구는 수용되기 어렵게 된다.[22] 그러나 매그루더의 설득에도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을 거절하였고[23] 그렇게 미국 정부까지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자 5월 17일 미국 국무부는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공식적인 개입 거절을 발표하였다.[24] 그리고 이를 전달받은 장면은 5월 18일 오후 가르멜 봉쇄수녀원을 나왔다. 그 사이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의 입지는 탄탄해져 갔고 결국 2일 뒤인 5월 18일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 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 서류에 서명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쿠데타의 성공을 인정하고 말았다. 군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란군 세력에 동조하기를 거부했고 진압을 준비하다가 윤보선에 의해 부하들에게 지도부의 진압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체포당한 1군 사령관 이한림[25] 등 쿠데타를 막으려던 움직임은 이미 완전히 실패한 뒤였다.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쿠데타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는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고 3번이나 징역 선고를 받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병이 악화되어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하자 박정희 정권은 장면을 타계 1달 전에야 정치 정화법 대상에서 해제시켰다. 1966년 6월 4일 장면은 향년 66세에 간염으로 선종하였다. 사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용상골의 혜화동 성당 부설 가톨릭 공원묘지에 묻혔다. 경기도 의정부시 축석고개에서 포천시 소흘읍 내 흔히 송우리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가구 단지들이 있고 길 옆에 표지판이 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톨릭 교육자로 일한 이력이 근거였는데[26] 그가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그러나 본인이 주도적으로 나선 친일 행적은 없기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 일화도 그렇고 '적극적 친일'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부일'이었다는 동정론도 있기는 하다.[2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기타
후일 장면은 자신이 38시간 동안 수녀원에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1966년 부활절 아침 명동성모병원[28] 에서 같이 입원해있는 대학생 정대철에게 "박정희 뒤에 최경록 장군이 있고 자네[29] 부친 정일형 박사가 있었던 걸 알았네. 그래서 무척 당황했고 나가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고."라고 설명했다.[30]
일설에는 장면의 수행원 중 하나가 필사적으로 장면을 찾다가 쿠데타 당일 밤에 장면을 차에 태우고 도망쳤던 운전수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수행원의 애타는 질문에도 끝까지 장면이 있는 곳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바람에 끝내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근데 이는 어찌보면 이해는 되는게 수행원들이 박정희 편에 매수되었거나 협박당해서 장면을 잡으려고 찾으러 다니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운전수 및 기타 노동 등을 하는 사람은 보안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을 살았다. 아호는 운석(雲石)이고[31] , 자는 지태(志兌), 세례명은 요한(John)이다. 가족으로 동생인 서양화가 장발(張勃,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2001년 선종)과 장극(張剋, 항공공학자, 전 인천대학교 석좌교수, 2008년 선종), 아들인 장진(張眞, 전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11년 선종), 장건(張建), 장익 주교(십자가의 요한), 전 천주교 춘천교구장, 2020년 선종), 장순(張舜), 장흥(張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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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관 시절의 존 M. 창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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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0월 11일, 존 M. 창박사(1899 ~ 1966)와 미 국무부의 아시아 문제 담당자 Arthur B. Emmons 3세(1910 ~ 1962) 간의 회동에서 오간 대화 내용을 요약해 놓은 미국 정부 내부 문건.[32] 두 사람은 한국 전쟁이 가져온 불안정한 아시아 정세와 이에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 방향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으며, 그 내용은 27년 남짓한 기간 동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국립 해리 트루먼 기념도서관 소장.
영문 통용명으로 이름이 존 M. 창(John. M. Chang)이다. 천주교 세례명이 요한이어서 이름에 요한을 영어로 읽은 John이 붙었고 M은 면(Myon)의 약자다.[33]
일설에 의하면, 국민학생 시절 자신의 어린 시절 별명이 "짜장면"이었다는 아재개그를 선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짜장면은 서방 원조로 밀가루가 흔해지기 전 나름 고급음식이라서 사람들이 잘 몰랐다는 얘기도 있다.[34]
최규하와 친척인 최서면과 알고 지냈다. 당시에는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그가 살았던 가옥은 서울특별시 혜화동에 복원되어 있다. 대학로 로터리를 지나는 버스에서 이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면, '장면 총리 가옥'이라는 안내도 함께 내보낸다.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오해를 반박하는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을 번역했다. 본인의 말로는 수원농림학교에 다닐 때 개신교인의 근거 없는 조소에 한마디도 반박 못한 것 때문에 한이 맺혀서 미국 유학 때 번역했다고 한다.
4. 매체에서
문화방송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김무생이 연기했다. 우유부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이지만 제2공화국 첫 회의 쿠데타군에게 쫓기는 장면은 진짜 명장면. 무풍지대에서는 신구, 야인시대에서는 신국씨가 장면을 맡았다. 의외로 싱크로는 정동환 배우와 높은데, 제2공화국을 다루는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한 실현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5. 선거이력
[1] 일제강점기 당시 사용한 창씨명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2] 참고로 정치적 고향은 경기도 인천부(현 인천광역시)였다.[3] 도로명주소 미발급[4] 최초는 허정 총리. 그러나 본인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임하는 과도 내각이어서 실질 권한은 크지 않았다.[5] 본래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2.28 민주운동이 장면으로 인해 촉발된 측면이 있다.[6] 유토피아를 쓴 사람으로 학자 및 천주교의 순교자이자 성인이었다.[7] 이렇게 훈장의 적절성 논란이 불거진 유사 사례로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있다.[8] 장기빈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탁지부 주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관직 대신 무역업에 종사했고 해방 이후 초대 부산세관(현 부산지방국세청) 세관장을 맡았다. 세무 관료와 사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은 유복했다.[9] 그가 50대의 나이에 무릎꿇은 이유는 국무총리 당시 "옷이 너무 화려하다"는 어머니의 질타 때문이었다.[10] 현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11] 소년 시절 친구들이 기방(妓房)으로 끌고 갔을 때 그는 긴장해서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는 협력을 요청하는 한 조선총독부 관리의 만찬장에 갔다가 기생들이 들이닥치자 역시 줄행랑을 쳤다.[12] 노기남 대주교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나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이전에 활동한 한국 천주교의 거목이었다.[13]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에도 나왔다.[14] 당시의 정/부통령 선거는 미국식 러닝메이트 방식과는 달리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다른 정당 소속으로 투표하는 것이 가능했다.[15] 이 과정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당선되는 것이 못마땅했던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 경력 및 창씨개명 사실을 전단으로 뿌리고 다니며 장면 깎아내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16] 일부에서는 장면의 5개년 계획은 농업 위주의 정책이었고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은 공업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면은 박정희와 같은 성과를 못 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애초에 5개년 계획은 이후에도 정책이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초기 정책만 보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당장 박정희 정권만 해도 집권 초기 화폐 개혁 실패 등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정책 수정 개입을 자초한 전력이 있다. 장면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국토 개발 사업을 추진해 국토건설본부를 구성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했을만큼 농업 정책에만 몰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17] 안타깝게도 장면이 떠난지 10여 분 후 박정희가 보낸 박종규 등 특수부대가 쳐들어와 이를 해체시켜버렸다.[18] 다급한 나머지 안경도 잃어버렸다. 후일 가르멜 봉쇄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안경도 없이 연설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19] 장면 홈페이지에 있는 당시 의전비서 이홍렬의 1999년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대사관에 상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증언자인 이홍렬 본인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자신이 운전수와 총리만 태워서 보냈다) 확실하지는 않아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 대사관 직원이 부재 중이라 혹은 신원 확인이 되지 못해서라는 설도 있다.[20]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병력은 6군단 포병대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 일부에 불과했고 특히 서울을 공격한 부대는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250명과 병력 3,500명 뿐이었다.[21] 이 시기 모든 작전 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평시 작전 통제권이 한국에 넘어온 것은 1990년대로 전시 작전 통제권은 추후 넘어올 예정이다.[22] 심지어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다.[23] 매그루더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가서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으나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해괴한 발언을 하며 사인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를 두고 그는 쿠데타를 잘 이용하면 장면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추론도 있다. 그러나 윤보선 본인은 소식으로만 들은 '온다는 것이 왔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고 반론하였다. 다만 실제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라서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음에도 그 권한을 대통령 윤보선이 휘두르려고 해서 둘이 사이가 안좋기는 했다.[24] 이후 케네디 정권은 쿠데타 정권을 오히려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25] 이로 인해 예편되었으나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직을 지낸다.[26]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총괄해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를 지냈다.[27] 하지만 1961년 국무총리 시절에 일본 쇼와 덴노에게 생일 축전을 보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는 한일 외교 수립 전이라 굳이 축전을 보낼 필요가 없었는데도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 당시 정계에서 장면에 대한 친일파 혐의를 다시금 부각시킨 대표적 사건이기도 했다.[28] 현 여의도성모병원. 본래 명동성당 앞에 있다가 1986년 이사했다. 병원 건물은 현재 가톨릭회관으로 쓰이고 있다.[29] 정대철을 보고 한 말.[30] <대한민국의 대통령> 강준식 100p를 참조.[31] 호가 태암(太巖)이었던 아버지 장기빈은 아들들에게 운석, 우석(雨石), 하석(霞石)이라고 호를 지어줬다 한다. 큰 바위의 아이들이니 돌 석 자를 붙인 것이다.[32] 문서에 Chang으로 표기돼 있는 인물이 바로 장면 박사다.[33] 미국 국무부 당국자 아서 B. 에먼스 3세 씨가 암에 걸려 별세했다는 내용의 졸기(卒記)와 트루먼 기념도서관이 소장한 문서 원문을 통해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해보자. 주미한국대사 존 M. 창 씨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34] 다만 수제비 항목에도 있지만, 밀가루가 귀했을 뿐 이전엔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 등 다른 대체제를 이용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조선 사람들 밥그릇이 너무 커서 놀랐다는 당시 외국인들 수기만 봐도..[35] 종로 을.[36] 1949.2 사퇴 (주미대사 임명)[37] 부정선거[38] 용산 갑.[39] 제7대 국무총리(의원내각제 수반)
1961.5.16 자격정지(5.16 군사정변)
1961.5.16 자격정지(5.16 군사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