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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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 육군의 군인이자 외교관. 가장 유명한 경력은 1960년대 초,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미군 합동참모의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친숙한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공수부대의 선구자
1922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기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제82공수사단에서 참모장을 지내며 공중강하를 자주 했는데, 여러 유럽인들과 어울리던 이때 외국어 능력을 잘 써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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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조직된, 제101공수사단이 미군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린 육군소장 빌 리 장군이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하자 공석이 된 101사단장 자리에 보임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휘하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낙하산을 탔다. 당시 부사단장인 육군준장 돈 프랫 장군은 글라이더 활공 도중 사고로 전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버로드 작전 전체에서 최고계급 전사 기록이었다고(당시 상황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되었다. 파손된 글라이더 안에서 지프에 탑승한 채 죽어있는 미군 장성을 분대원들이 지나가며 보는 장면).
101사단을 2차 대전 내내 지휘했지만 정작 이미지는 좋지 않았는데, 하필 본국에서 회의 같은 거 한다고 소환해서 끌려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르덴 대공세를 비롯한 수많은 혈투에서 그는 부재 중이었고 부사단장이던 육군준장 앤서니 매콜리프 장군이 사단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1] 때문에 많은 사단 장병들이 맥스 테일러에겐 딱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았고, 테일러 장군도 그것을 알았기에 바스토뉴에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며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2.2.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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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임명되어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의 Honor Code를 제시하기도 했다.
육사 교장을 거친 이후 유럽으로 다시 배치되었다가, 6.25 전쟁 후반기에 미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에 배치되었고 주한미군의 전신 극동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며,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였다.[2] 아칸소주 리틀록에 101사단이 흑인 학생들의 경호 병력으로 배치될 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 일처리를 주도하기도 했고, 이후 1959년 퇴역했다. 임기 후반기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전력 의존정책을 비판하기도 했고 합참이라는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는 등 높으신 분들과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있었다고.
2.3. 1960년대: 합참의장
'''하지만 그는 다시 군과 공직으로, 더 높은 직위로 복귀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이후 피그만 침공이 망했어요로 끝나자 새 합동참모의장 인선에 나서서 마땅한 현역이 없길래 그냥 퇴역한 테일러 장군을 다시 불러서 현역 복귀시킨 뒤 합참의장에 임명해버렸다.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전 시절부터 아이크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와 뜻을 같이 하였던 인물이라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특히 로버트 F. 케네디와 친해져서 RFK가 아들의 이름을 매튜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라고 짓기도 했다.
합참의장 재임 시절,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기 위한 방위 전략으로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을 제시했다. 소련의 재래식 전쟁 도발에 시작부터 핵무기로 대응하는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이 지나치게 핵무기에 의존적이라는 비판을 전제로, 초기 대응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역할을 좀 더 강조하면서, 여의치 않을 경우 핵무기를 동원하는 단계별 대응에 나선다는 개념이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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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왼쪽) 국방장관, 케네디(오른쪽) 대통령과 함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는 미 군부의 대표적 강경론자인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과 함께, 쿠바 공습을 주장했다. 또한 남베트남의 쿠데타와 응오딘지엠의 하야와 처형 등의 여러 현안으로 전운이 돌던 1960년 초중반에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합참의장으로서 적절한 조언을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응오딘지엠의 하야를 부른 군부 쿠데타에다 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당시 일련의 행동들은 1997년 H.R. 맥마스터 육군 소령[4] 이 발간한 서적 <직무유기(Dereliction of Duty)>에서 통렬한 비판을 받는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석기시대 매니아 장군의 행보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2.4. 합참의장 이후
1964년 퇴역한 후 남베트남 대사로 임명되었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군복을 벗은 후에도 롤링썬더 작전, 일명 '''북폭'''을 주장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란 결말이 나온 것도 안습. 주월대사를 역임한 이후엔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말기와 리처드 닉슨 행정부 초반에 대통령 직속 정보자문위원장을 지냈다.
말년에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일명 루 게릭 병을 앓다가 1987년 4월 19일 사망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3. 여담
- 6.25 전쟁때 이승만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데 이승만으로부터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한국을 떠난지 30년이 지난 뒤에도 이승만 얘기가 나오자 "푹진, 푹진!"이라는 한국어가 기억에 남는다면서 미소를 지었다.[5]
[1]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6화에서 사단장 순시가 있을 때도 매콜리프 장군이 나온다.[2] 전임은 다름아닌 82사단 시절 사단장으로서 자신의 멘토 역할을 했던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리지웨이와 테일러의 2차대전/한국전쟁기 커리어는 꽤 유사한 흐름을 탔으며, 실제로도 리지웨이는 테일러의 멘토이자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3] 하지만 유연반응전략도 전쟁 억지에서 재래식 군사력보다 핵무기의 비중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증거로 미군이 유연반응전략을 추구했던 1960년대 당시, 서유럽에 배치된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2천 개에서 7천 개까지 증가했다. 결국 이러한 핵무기의 과도한 의존은 1980년대 공지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4] 2017년 상반기 현재 계급은 중장으로, 현재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이다. 21세기에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과 관련하여 미 육군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로 꼽혀서 백악관에 중용되고 이후 여러 중요 대장 보직에의 내정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국방정책에 직언하다가 트럼프에게 감히 도전한다고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지만, 결국 즉흥적으로(?) 2018년 3월 해임됐다.[5] 다만 테일러 본인은 북진통일 자체에 대해선 반대하는 쪽에 가까웠고 진격을 하더라도 평양-원산선을 잇는 39도선까지만 진격한 후 정치인들이 이룰 수 있는 어떤 결정을 하기 전까진 그 전선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