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닌
圓仁 / 円仁
(794년 ~ 8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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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808년에 일본의 덴쿄우 대사 사이쵸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사이쵸가 입적하자 838년에 천태종을 배우기 위해 견당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는데, 당에 도착하기 전에 배가 얕은 곳에 좌초되어 침몰하면서 여러 물건을 잃어버렸다.
엔닌은 당나라에 있었던 장보고에게 오노 미네노리의 소개장을 가지고 갔지만 배의 침몰로 잃게 되자 장보고에게 사죄하는 것과 당나라에 머무를 수 있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춘 내용의 편지를 올렸으며, 일본 승려는 기간이 지나면 당나라에서 출국해야 했지만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라방의 적산법화원에서 숨어 체류할 수 있었다.
엔닌은 등주의 적산에 있는 법화원에 머무르면서 중국의 오대산(우타이 산) 순례와 함께 장안에서 불법을 구하고 적산을 돌아왔다가 신라의 청해진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엔닌은 오대산 순례를 마치고 장안으로 향해 천태종의 비법을 들은 후에 각종 불교 물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당무종의 회창폐불을 당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했고 이때 억지로 환속하여 일본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귀국하는 와중에 여러 차례 조난을 당했지만 머리에 빨간 옷을 입고 백의를 입은 적산대명신[1] 이 수호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는 과정은 엔닌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자세히 남아 있는데,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2] 위기에 빠졌던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죠사(園城寺)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에 모셨다. 이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 목조 신라명신좌상[3] 은 엔닌에게 큰 도움을 줬던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장보고의 당대 초상이 남아있는 셈이다.
일본에 돌아와 천태종 밀교의 기초를 쌓았지만 이전에 적산법화원에서 신세를 진 것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어 일본에 적산선원을 건립하기로 했지만 짓지 못했는데, 병으로 인해 적산선원을 지을 수 없어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적산선원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다. 적산선원은 그가 죽고 20여 년이 지난 888년에 건립되었다. 지금도 교토 엔랴쿠지에 장보고 기념비, 적산선원에는 활을 든 장보고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4] 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일본에서도 관심을 받지만, 그의 당나라 여행에 도움을 줬던 신라방과 장보고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많아[5] 한국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주목받는 사료이다.
(794년 ~ 8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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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2. 생애
808년에 일본의 덴쿄우 대사 사이쵸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사이쵸가 입적하자 838년에 천태종을 배우기 위해 견당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는데, 당에 도착하기 전에 배가 얕은 곳에 좌초되어 침몰하면서 여러 물건을 잃어버렸다.
엔닌은 당나라에 있었던 장보고에게 오노 미네노리의 소개장을 가지고 갔지만 배의 침몰로 잃게 되자 장보고에게 사죄하는 것과 당나라에 머무를 수 있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춘 내용의 편지를 올렸으며, 일본 승려는 기간이 지나면 당나라에서 출국해야 했지만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라방의 적산법화원에서 숨어 체류할 수 있었다.
엔닌은 등주의 적산에 있는 법화원에 머무르면서 중국의 오대산(우타이 산) 순례와 함께 장안에서 불법을 구하고 적산을 돌아왔다가 신라의 청해진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엔닌은 오대산 순례를 마치고 장안으로 향해 천태종의 비법을 들은 후에 각종 불교 물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당무종의 회창폐불을 당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했고 이때 억지로 환속하여 일본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귀국하는 와중에 여러 차례 조난을 당했지만 머리에 빨간 옷을 입고 백의를 입은 적산대명신[1] 이 수호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는 과정은 엔닌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자세히 남아 있는데,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2] 위기에 빠졌던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죠사(園城寺)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에 모셨다. 이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 목조 신라명신좌상[3] 은 엔닌에게 큰 도움을 줬던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장보고의 당대 초상이 남아있는 셈이다.
일본에 돌아와 천태종 밀교의 기초를 쌓았지만 이전에 적산법화원에서 신세를 진 것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어 일본에 적산선원을 건립하기로 했지만 짓지 못했는데, 병으로 인해 적산선원을 지을 수 없어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적산선원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다. 적산선원은 그가 죽고 20여 년이 지난 888년에 건립되었다. 지금도 교토 엔랴쿠지에 장보고 기념비, 적산선원에는 활을 든 장보고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4] 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일본에서도 관심을 받지만, 그의 당나라 여행에 도움을 줬던 신라방과 장보고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많아[5] 한국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주목받는 사료이다.
3. 같이보기
[1] 신불습합 이후 일본에서는 신토의 신이 불법에 귀의해 불교를 수호하는 신으로써 절에서 모셔지게 된 경우를 '묘진(명신)', 여지껏 신토의 신으로 모셔져 왔지만 원래는 부처로써 신의 모습을 빌려 인간 앞에 나타났다고 해석될 경우는 '곤겐(권현)'이라고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적산명신과 신라명신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는 보지 않고, 적산명신의 경우는 도교에서 모시는 수명의 신인 태산부군이 불법을 구하는 엔닌의 귀국길을 수호함으로써 불교의 수호신 즉 명신으로써 모셔지게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엔닌이 머물렀던 절의 이름이 적산법화원이고 엔닌 자신이 그 적산법화원의 단월이었던 장보고(및 그 휘하로 중국 각지에서 장사하던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미 적산명신이라는 이름 속에 장보고의 존재감은 충분히 남아 있는 셈. 여담으로 신라명신의 이름이 정확히 확인되는 것은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죠사(園城寺)이다.[2] 범선시대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3] 가끔 공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공개 유물인 비불이다.[4]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단, '''세계 3대''' 운운하는 부분에서 눈치 챈 분 많겠지만 3대 기행문 운운하는 얘기는 어떤 공신력있는 곳에서 정한 게 아니고 일본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5] 실제로 장보고는 엔닌이 당나라에 지내는 동안 신라방에 지내게 된 엔닌을 물심양면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