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漂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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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겪은 체험과 여정들을 기록한 기행록.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표해록이라 일컬어지는 책은 총 네 종류가 있다.
조선 성종 19년(1488년)에 최부(崔溥)가 지은 기행문.[1] 표해록 중에선 가장 유명하다. 총 3권 2책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부가 제주도 추쇄경차관[2] 으로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가던 도중 갑작스레 태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명나라 저장성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상륙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최부는 표류 중 중국인 해적 떼와 두 번이나 마주쳐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털렸고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였으나 상륙 후에는 왜구로 오인되어 명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매를 맞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가까스로 조선 관리임이 확인된 후 임해 도저소에 있는 조선 관인에게 인도되어 영파, 소흥을 지나 대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 등 번화한 강남지방을 지나고, 양주, 산동,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홍치제를 알현한 후 홍치제의 배려로 명의 보호를 받으면서 귀국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조선에 도착한 후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으나 그 전에 성종(조선)이 명을 내려 그 동안 견문한 것들을 글로 지어 표해록을 만들어 바쳐 올리게 하였다.
지은이가 본 모든 것들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는 중국에서도 명나라 초기에 다시 개통되기 시작한 대운하의 전 노정을 주파한 첫번째 사람이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등을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조선과 중국, 양국의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 강남과 강북의 미세한 문화적 차이마저도 찾아내 소개하고 있으며, 일기체로 엮어 내려간 기사 하나하나마다 그 당시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관련 인물들의 실명까지 일일이 기재되어 있다.
최부의 학문적 성취 또한 매우 높아 기행문 곳곳에 논어나 맹자와 같은 오경사서들의 내용이나, 더 나아가 중국에서도 마이너한 지리학 고전인 《우공(禹貢)》 같은 책까지도 모두 통달하고 이를 십분 활용해 글 속에서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어서 중국 학자들까지도 번역본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이 당시 중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 명나라 시기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주요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중국 강남 지역의 아름다움과 번화함을 잘 묘사하고 극찬하고 있지만[3] 동시에 중국의 내부 사정을 알아보고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 환관의 정치 참여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산동성 노교역을 지날 당시 중국 환관 일행의 행차를 만났는데 온갖 화려하게 차려입고 소란을 피우며 미치광이처럼 총포를 난사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호송인으로부터 환관들이 황제를 대리하여 관(官)과 군(軍)을 감시하고 취조할 수 있도록 막강한 권한을 제도적으로 부여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우리나라의 내관은 단지 궁중의 청소나 심부름에만 종사할 뿐 공적인 업무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다. 벌써 환관들이 저리 난리를 치니 나라꼴 잘 돌아가겠다"며 명나라 환관 특무 정치의 변태적 정치 행태를 꼬집는다. 그러다가 하북으로 올라갈 때쯤에는 환관들이 대거 낙향[4]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 황제는 좀 나을 지도?'하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 외에도 베이징에 도착한 후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가난한 이들은 우리와 달리 의복이 짧고 좁아 남녀 모두 제도가 같으며, 음식도 누린내 나는 것까지 먹는다. 모두 농업을 미루고 상업만을 직업으로 삼으니 높은 벼슬이나 문벌이 있는 사람도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조그만 이익까지도 챙긴다"고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구휼의식 또한 없는 당시 명나라 조정과 사대부의 비속함을 지적하기도 한다.[5]
최부는 강렬한 고구려 빠였는지 표해록에는 중국의 관인(官人)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키보드 배틀(...)을 벌이기도 한다. 중국 관료가 "고구려가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자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했다. 그런 까닭으로 오히려 백만 군사를 두 번[6] 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라며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피력하고 고구려의 강성을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소소한 장난도 있는데, 장보라는 명나라 귀족은 과거 시험에 1차 합격하여서 그 기념으로 세운 2층 높이의 화려한 정문을 자랑하였다. 그러자 최부는 '나도 과거 시험에서 2번 합격하여 본국에 3층짜리 문을 지었다. 멀리 있으니 문을 보여 줄 순 없지만 그 증거가 여기 있다.'라며 자신의 합격 증명서인 문과중시소록(文科重試小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장보는 훌륭하신 분을 몰라봤다며 꼬리를 내린다. 사실 최부가 과거 시험에 2번[7] 합격한 것은 사실이기에 가능한 거짓말.
이 부분을 거짓말로 볼 지, 아니면 농담으로 볼 지는 자랑의 포인트를 무엇으로 볼 지에 달린 문제이기는 하다. 2층짜리 문을 자랑하는 상대에게 '응. 나는 3층짜리 문 지음'이라고 받아친 것이라고 보면 허풍을 친 게 맞지만, 과거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자 그 인물이 엘리트라는 증명이던 시대적 배경상 고작 1차 합격을 자랑하는 상대에게 '나는 두 번이나 붙어봤어, 임마'라고 자랑한 것이라면 허풍이나 거짓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순수한 자기자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부가 둘 다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1769년에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儋叟)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다. 제목의 '당토'란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을 당나라(唐)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미국에서도 1965년 번역본이 나왔다. 여담으로 일본 번역자인 세이타 겐소는 최부가 중국 관헌으로부터 "너희 나라 국왕이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하루 네 차례씩 유신(儒臣)들을 접견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즐겨 독서하신다"고 대답한 대목에 대해 "국왕이 어떻게 하루에 네 번씩이나 정사를 돌보고 신하들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최부가 당토(唐土)에서 콧대를 세우려 과장한 거짓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비웃었지만 조선에서는 실제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국왕으로서 안 놀고 하루 네 차례나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일은 중국의 어느 군주에게서도 그런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었고, 일본과 같이 무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소설가 이병주는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꼽았다.
조선 영조 47년, 1771년에 제주도 선비였던 장한철(張漢喆)이 과거를 보러 가다가 태풍을 만나 류큐 왕국(오키나와)으로 표류해 겪었던 일을 기록한 책. 표류 당시의 상황과 류큐에 대한 자세한 묘사 뿐만 아니라, 표류한 경로를 따른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 해양지리서로의 가치 또한 높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참조.
1801년, 조선 순조 때 문순득이라는 인물이 흑산도 남쪽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갔다가 귀환 도중 폭풍을 만나 유구국(류큐)에 표착,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조선으로 귀환 중 또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 여송(呂宋: 지금의 필리핀)까지 떠내려 갔다가 중국 광동, 오문, 북경(北京)을 지나 조선 의주, 한양을 거쳐 귀가한 이야기를 당시 소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이 구술하는 내용을 대필해 적어준 기행문. 이 쪽은 공식 제목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류큐 왕국,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 중국의 언어, 풍속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부록으로 있는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현재 귀중한 언어학 연구 자료로 평가된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참조.
일본표해록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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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겪은 체험과 여정들을 기록한 기행록.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표해록이라 일컬어지는 책은 총 네 종류가 있다.
2. 최부의 표해록
조선 성종 19년(1488년)에 최부(崔溥)가 지은 기행문.[1] 표해록 중에선 가장 유명하다. 총 3권 2책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1. 내용
최부가 제주도 추쇄경차관[2] 으로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가던 도중 갑작스레 태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명나라 저장성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상륙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최부는 표류 중 중국인 해적 떼와 두 번이나 마주쳐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털렸고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였으나 상륙 후에는 왜구로 오인되어 명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매를 맞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가까스로 조선 관리임이 확인된 후 임해 도저소에 있는 조선 관인에게 인도되어 영파, 소흥을 지나 대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 등 번화한 강남지방을 지나고, 양주, 산동,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홍치제를 알현한 후 홍치제의 배려로 명의 보호를 받으면서 귀국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조선에 도착한 후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으나 그 전에 성종(조선)이 명을 내려 그 동안 견문한 것들을 글로 지어 표해록을 만들어 바쳐 올리게 하였다.
2.2. 의의
지은이가 본 모든 것들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는 중국에서도 명나라 초기에 다시 개통되기 시작한 대운하의 전 노정을 주파한 첫번째 사람이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등을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조선과 중국, 양국의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 강남과 강북의 미세한 문화적 차이마저도 찾아내 소개하고 있으며, 일기체로 엮어 내려간 기사 하나하나마다 그 당시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관련 인물들의 실명까지 일일이 기재되어 있다.
최부의 학문적 성취 또한 매우 높아 기행문 곳곳에 논어나 맹자와 같은 오경사서들의 내용이나, 더 나아가 중국에서도 마이너한 지리학 고전인 《우공(禹貢)》 같은 책까지도 모두 통달하고 이를 십분 활용해 글 속에서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어서 중국 학자들까지도 번역본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이 당시 중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 명나라 시기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주요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중국 강남 지역의 아름다움과 번화함을 잘 묘사하고 극찬하고 있지만[3] 동시에 중국의 내부 사정을 알아보고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 환관의 정치 참여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산동성 노교역을 지날 당시 중국 환관 일행의 행차를 만났는데 온갖 화려하게 차려입고 소란을 피우며 미치광이처럼 총포를 난사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호송인으로부터 환관들이 황제를 대리하여 관(官)과 군(軍)을 감시하고 취조할 수 있도록 막강한 권한을 제도적으로 부여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우리나라의 내관은 단지 궁중의 청소나 심부름에만 종사할 뿐 공적인 업무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다. 벌써 환관들이 저리 난리를 치니 나라꼴 잘 돌아가겠다"며 명나라 환관 특무 정치의 변태적 정치 행태를 꼬집는다. 그러다가 하북으로 올라갈 때쯤에는 환관들이 대거 낙향[4]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 황제는 좀 나을 지도?'하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 외에도 베이징에 도착한 후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가난한 이들은 우리와 달리 의복이 짧고 좁아 남녀 모두 제도가 같으며, 음식도 누린내 나는 것까지 먹는다. 모두 농업을 미루고 상업만을 직업으로 삼으니 높은 벼슬이나 문벌이 있는 사람도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조그만 이익까지도 챙긴다"고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구휼의식 또한 없는 당시 명나라 조정과 사대부의 비속함을 지적하기도 한다.[5]
최부는 강렬한 고구려 빠였는지 표해록에는 중국의 관인(官人)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키보드 배틀(...)을 벌이기도 한다. 중국 관료가 "고구려가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자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했다. 그런 까닭으로 오히려 백만 군사를 두 번[6] 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라며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피력하고 고구려의 강성을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소소한 장난도 있는데, 장보라는 명나라 귀족은 과거 시험에 1차 합격하여서 그 기념으로 세운 2층 높이의 화려한 정문을 자랑하였다. 그러자 최부는 '나도 과거 시험에서 2번 합격하여 본국에 3층짜리 문을 지었다. 멀리 있으니 문을 보여 줄 순 없지만 그 증거가 여기 있다.'라며 자신의 합격 증명서인 문과중시소록(文科重試小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장보는 훌륭하신 분을 몰라봤다며 꼬리를 내린다. 사실 최부가 과거 시험에 2번[7] 합격한 것은 사실이기에 가능한 거짓말.
이 부분을 거짓말로 볼 지, 아니면 농담으로 볼 지는 자랑의 포인트를 무엇으로 볼 지에 달린 문제이기는 하다. 2층짜리 문을 자랑하는 상대에게 '응. 나는 3층짜리 문 지음'이라고 받아친 것이라고 보면 허풍을 친 게 맞지만, 과거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자 그 인물이 엘리트라는 증명이던 시대적 배경상 고작 1차 합격을 자랑하는 상대에게 '나는 두 번이나 붙어봤어, 임마'라고 자랑한 것이라면 허풍이나 거짓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순수한 자기자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부가 둘 다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1769년에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儋叟)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다. 제목의 '당토'란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을 당나라(唐)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미국에서도 1965년 번역본이 나왔다. 여담으로 일본 번역자인 세이타 겐소는 최부가 중국 관헌으로부터 "너희 나라 국왕이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하루 네 차례씩 유신(儒臣)들을 접견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즐겨 독서하신다"고 대답한 대목에 대해 "국왕이 어떻게 하루에 네 번씩이나 정사를 돌보고 신하들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최부가 당토(唐土)에서 콧대를 세우려 과장한 거짓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비웃었지만 조선에서는 실제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국왕으로서 안 놀고 하루 네 차례나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일은 중국의 어느 군주에게서도 그런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었고, 일본과 같이 무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소설가 이병주는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꼽았다.
2.3. 관련 영상
3. 장한철의 표해록
조선 영조 47년, 1771년에 제주도 선비였던 장한철(張漢喆)이 과거를 보러 가다가 태풍을 만나 류큐 왕국(오키나와)으로 표류해 겪었던 일을 기록한 책. 표류 당시의 상황과 류큐에 대한 자세한 묘사 뿐만 아니라, 표류한 경로를 따른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 해양지리서로의 가치 또한 높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참조.
4. 문순득의 표해록
1801년, 조선 순조 때 문순득이라는 인물이 흑산도 남쪽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갔다가 귀환 도중 폭풍을 만나 유구국(류큐)에 표착,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조선으로 귀환 중 또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 여송(呂宋: 지금의 필리핀)까지 떠내려 갔다가 중국 광동, 오문, 북경(北京)을 지나 조선 의주, 한양을 거쳐 귀가한 이야기를 당시 소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이 구술하는 내용을 대필해 적어준 기행문. 이 쪽은 공식 제목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류큐 왕국,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 중국의 언어, 풍속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부록으로 있는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현재 귀중한 언어학 연구 자료로 평가된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참조.
5. 헌정의 표해록
일본표해록 문서 참조.
6. 기타
- 2018년 4월 7일에 시행되었던 9급 국가직 시험 한국사에서 선지 중 하나로 출제되었다. 문제 유형은 서적의 시대 순서를 묻는 문제였다.
[1] 최부는 상중이었던 데다가 부친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계속 상복을 고집하고 다녔다. 최부는 훗날 연산군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갑자사화 때 처형된다.[2] 推刷敬差官. 부역 및 병역을 피하기 위해 타향으로 이주하거나 도망친 노비 등을 송환하는 역할이다. 흔히 말하는 '추노'가 이 것이다.[3] 최부보다 몇십년 앞서 명나라를 방문한 티무르 제국의 사절단은 강남에 비해 낙후되었던 화북지방을 여행하고서 명나라의 부유함을 극찬했는데 하물며 강남지방의 번영은 최부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4] 이 때가 홍치제 즉위 초인데 홍치제는 그 전대에 전횡을 일삼던 환관들 중 심한 자는 처형하고 심하지 않으면 낙향시켰다.[5] 당시 명나라 사회는 자본주의가 창궐하였다고 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고 덩달아 극도의 소비, 사치 풍조가 만연하였는데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최부의 눈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6] 살수 대첩, 안시성 전투로 추정한다.[7] 유생 시절 본 알성시 을과 1등, 홍문관 수찬 시절 본 중시에서 을과 1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