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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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淸海鎭
9세기 경 통일신라의 무주 침명현(浸溟縣)에 설치되었던 해상 기지. 신라의 해군 기지이자 무역 거점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장보고 유적지)에 위치해 있으며 그 범위는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와 완도 동쪽의 작은 섬 장도 일대로 보고 있다.
1990년대부터 2001년까지 대규모 발굴이 이뤄졌고 청해진 유적이 다수 확인됐는데, 청해진 본영은 장도 섬이고 인근의 완도 본섬 부분은 병사들이 머문 군영과 기타 시설이 산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장도와 완도 본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984년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2.1. 설치
신라 흥덕왕 시대에 해적들의 칩입과 횡포가 빈번해지자, 당나라 군대에서 활동해 이사도를 토벌한 경험이 있는 장보고에게 명해 군사 1만으로 상업의 요충지인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전략적인 시설을 마련해 해적들로부터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무역의 패권을 잡았으며[1] 서남 항로를 개척하여 강력한 해상왕국으로도 불렸다. 심지어 서아시아의 대식국(페르시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교역하러 찾아왔을 정도다.
2.2. 직위
자세한 구조는 사서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장보고와 동시기에 살았던 엔닌이 남긴 일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추측할만한 기록들이 나와있다. 엔닌은 일본을 거쳐 당나라로 순례를 가게 되는데 이때 장보고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이 기록들을 일기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여기서 장보고는 대사(大使)이며 그 바로 아래에서 활동한 인물로 최훈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병마사(兵馬使)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장보고가 엔닌을 돕기 위해 보낸 부장중 한 사람이 판관(判官) 직책을 가진 남(南)씨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큰 구조로는 대사-병마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유추해볼수 있다.
2.3. 해체
하지만 후에 장보고가 신라 중앙 정치의 왕위 다툼에 휘말렸고 갈등을 겪다 끝내 자객 염장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이 때 리더를 잃게 된 청해진은 상당히 혼란한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보이며[2] 한때 추종 세력이 정부군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위력을 두려워한 신라 고관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청해진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지금의 김제시인 벽골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3. 기타
4. 창작물에서
4.1. 바다의 전설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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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보고 일행의 본 기지이며 시 드래곤의 모항이다.2050년의 미래 배경이라 자동화가 되어있어서 건물이 잠수도 가능하다. 조병창이나 승무원들의 편의시설이나 숙소도 마련되어 있는 모양.
이 기지 때문에 장보고 '''재벌 2세'''설이 대두되었다. 모티브를 1에서 따왔고 장보고의 기지인 이상 반드시 나와야 했겠지만 먼치킨급이라서 어쩔수 없는 과장 요소.
5. 사적 제308호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장도는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고,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청해진은 신라 후기 장보고가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의 산동지방과 일본을 연결한 해상 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청해진유적 → 완도 청해진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당시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의 기록에 따르면 왜구를 피해 안전하게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해 규슈의 항구에서 청해진 소속의 선단만을 기다리는 상인을 포함한 인파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데도 장보고의 통제가 필요했다는 것. 이 외에도 장보고를 해상의 지배자라 칭하는 등의 기록과 당나라에서도 엔닌이 장보고의 후원을 받아 원활히 활동하는 점에서 당시 청해진과 장보고가 중국 동해안의 신라방을 통제하고 원격 조종할 수 있었다는 점,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2]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에는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