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스미스
1. 개요
Steven Paul 'Elliott' Smith
'''1969.08.06 ~ 2003.10.21'''
미국의 가수,싱어송라이터.
속삭이는 듯한 특유의 보컬과 서정적인 음악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2. 삶
2.1. 유년 시절
1969년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스티븐 폴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부모가 이혼했고,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텍사스 주 댈러스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재혼을 했는데 이때 양부에게 학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양부는 스미스를 4살때부터 틈만 나면 때렸고 스미스는 심지어 성적인 학대까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부는 성적 학대에 대한 주장은 부인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이를 믿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스미스는 더 큰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스미스는 14살이 되자마자 텍사스의 어머니와 양부가 사는 집에서 벗어나 친부가 사는 포틀랜드로 이주한다.
이 때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자랐던 미국 남부 지역에 대한 증오[1] 는 ‘Southern Belle’과 같은 곡에 드러나있고 ‘Some Song’, ‘No Confidence Man’, ‘No Name #4’, '2:45 a.m.', 'Roman Candle', ‘Flowers for Charlie’와 같은 곡에는 양부에 대한 증오와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이 드러나 있다.
엘리엇 스미스는 생전에 자신과 같이 학대받은 아이들을 위해 자선단체를 세울 계획이 있었고, 다음 앨범인 From A Basement On The Hill의 수입을 이 재단에 전액 기부할 예정이었다. 그가 갑작스레 죽고 난뒤에 스미스의 유족들은 이 계획을 스미스가 처음 구상한 명칭인 ‘학대아동들을 위한 엘리엇 스미스 재단’에서 ‘엘리엇 스미스 기념 재단’으로 명칭을 바꿔 실행했다.
2.2. 인디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엘리엇이라 개명하고 햄프셔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공부한다. 대학교 졸업에 대해서 엘리엇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끈기가 결여된 사람'으로만 생각하기에 자신도 마음 먹은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졸업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말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 닐 거스트와 함께 히트마이저라는 펑크 록 밴드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히트마이저 활동 중이었던 1994년, 당시 여자친구인 조애나 봄(Joanna Bolme)[2] 의 권유로 엘리엇은 자신이 최근에 작곡한 여덟 곡의 데모 테이프를 레코드사에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레코드사의 주목을 받아 데모 전체가 그 해 여름 Roman Candle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된다. 당시 엘리엇은 데모 중에서 한 두 곡이 7인치 싱글 정도로 나오겠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데모 전체가 앨범으로 나오자 굉장히 놀랐다.
자신의 음악이 메이저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엘리엇은 1995년 셀프 타이틀 앨범인 Elliott Smith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앨범은 전작보다 우울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에 대한 주제가 많이 드러나는데 훗날 엘리엇의 인터뷰에 의하면 두 앨범에 실려있는 곡들이 너무 우울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중들이 자신을 '어둡고 우울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까 염려되어 다음부터 곡을 쓸 때는 가능하면 보다 밝은 풍의 멜로디와 다른 분위기의 가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또한, 가사에 나오는 헤로인 중독에 대한 부분은 주변의 헤로인 중독자들과 소설과 영화 등에 묘사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사한 것이라고 밝혔다.[3] 1996년, 엘리엇이 조애나의 집에서 솔로 3집 Either/Or의 녹음을 시작하자 그간 엘리엇의 솔로 활동을 반대한 다른 멤버들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고 그는 히트마이저를 나오게 된다.[4]
이후 1년여 동안 여러 장소에서 3집의 녹음을 진행한 엘리엇은 쇠렌 키르케고르가 쓴 동명의 책 제목에서 유래한 3집 앨범 Either/Or을 1997년 발매하게 된다. 그는 앨범 발매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Either/Or 앨범에 대해 다시는 이렇게 힘들게 작업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작업하였으며 앨범 작업 시 작곡한 30곡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혔다. 엘리엇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앨범 레코딩 중에 조애나 봄과 결별한 그는 항상 자살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며 실제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나뭇가지에 걸려 자살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Either/Or 발매 직후 동향 친구였던 영화감독 거스 밴 샌트가 엘리엇에게 자신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굿 윌 헌팅. 영화를 위해 그는 자신의 1집 앨범에서 한 곡, 3집 앨범 "Either/Or"에서 몇 곡을 골랐고 엔딩을 위해 그간 발표하지 않았던 곡 한 곡의 가사를 영화의 장면에 맞게 개사하여 내놓았다. 그곡이 바로 엘리엇 스미스를 가장 널리 알린 곡 "Miss Misery"였다.
2.3. 메이저 시절
영화가 흥행하면서 "Miss Misery"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주제가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엘리엇 스미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되어 이 곡을 공연했다. 비록 주제가상은 셀린 디옹의 타이타닉 삽입곡 "My Heart Will Go On"에게 돌아갔지만 인디 뮤지션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받은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사실 "Miss Misery"가 너무 우울한 노래라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
Miss Misery의 성공 후, 엘리엇은 대형 레코드사인 드림웍스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4집 앨범 XO의 녹음을 시작한다. 4집을 녹음할 때 엘리엇은 자신이 대중들에게 Miss Misery로 원히트 넘버를 기록한 뮤지션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 완성도 있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인디 시절 동료들이 성공을 위해 메이저 시장과 타협한 변절자라며 자신을 비난하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부담감을 해결하기 위해 술을 가까이 하다가 알코올 의존증에 걸리게 된다. 1998년 발매된 XO는 전작들보다 2배가 넘게 판매되는 성공을 거뒀고[5] 싱글로 발매된 Waltz No.2는 Miss Misery, Between The Bars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앨리엇 스미스의 곡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엘리엇은 곧바로 다음 앨범 Figure 8의 녹음을 시작한다.
2000년 앨리엇 스미스의 5집이자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 Figure 8이 발매된다. 비록 다수의 곡들을 원맨 밴드 형식으로 엘리엇 혼자 녹음하긴 했지만 앨범은 전작들과 달리 좀 더 밴드 지향적으로 완성되었고 엘리엇은 솔로로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밴드의 형태로 투어를 돌기도 하였다. 앨범의 평가는 "엘리엇 스미스와 대형 스튜디오의 협업의 결과물로 발매된 Figure 8은 서로의 장점을 합친 멋진 작업물이다."는 호의적인 평가와 "그간 엘리엇의 앨범에 실린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많이 희석되어있는, 그동안 엘리엇 스미스에 열광케 한 사람들을 배신한 앨범."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양분되었다.
2.4. 갑작스러운 죽음
투어가 끝난 후, 엘리엇 스미스는 투어 중에 접한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고 지인들에게는 "드림웍스 레코드사가 Figure 8 앨범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았으면서 적반하장격으로 나를 상품 가치가 없다며 쫓아냈다." "누군가가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작업물들을 훔쳐갔다" “흰색 밴을 탄 사람들이 자신을 미행한다”등의 발언을 하면서 드림웍스 레코드사의 직원들을 비난하는 언행을 보인다. 결국, 드림웍스 레코드는 엘리엇과의 계약을 파기했고 Either /Or 앨범부터 엘리엇의 음반을 같이 프로듀싱한 롭 슈내프(Rob Schnapf)와 솔로 1집부터 엘리엇의 매니저였던 Margaret Mittleman 또한 엘리엇과 결별하였다. 결국 엘리엇의 지인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2002년 즈음부터 제니퍼 치바와 동거를 시작한 엘리엇 스미스는 육식과 술, 헤로인을 끊고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 재활 치료 센터에 입원하나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나오고 만다. 재활 치료 센터에서 나온 엘리엇은 라이브 공연을 재개하고 웨스 앤더슨의 새 영화 <The Royal Tenenbaums> 사운드트랙을 위하여 비틀즈의 곡 <Hey Jude>를 리메이크하는 등 재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엘리엇의 건강 상태 악화로 라이브 공연은 혹평을 받았고 <Hey Jude>의 리메이크 작업 또한 엘리엇의 건강 상태로 녹음이 취소되면서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는 엘리엇의 솔로 2집 수록곡 <Needle In The Hay>가 음악 감독을 맡은 스티븐 한프트의 편곡을 거쳐 수록되었다. 당시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엘리엇을 만났던 스티븐 한프트는 이 시기 엘리엇 스미스의 모습을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해결되어 보이는, 그의 노래 가사처럼 터널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밝은 빛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2002년 11월 25일에는 벡과 The Flaming Lips의 합동 공연에서 발생한 패싸움에 엘리엇 스미스와 제니퍼 치바가 연루되어 이틀간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고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3년 10월 21일, 갑작스럽게 엘리엇 스미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엘리엇 스미스는 제니퍼가 리더로 있는 인디 밴드의 첫 앨범 녹음에 참여하고 있었고 제니퍼와의 사이가 안 좋아져서 늘상 다투고 있는 상태였는데 여느 때처럼 엘리엇과 제니퍼가 다툼을 하던 중 제니퍼가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울기 시작하자 엘리엇이 스테이크용 나이프로 자신의 가슴을 연속으로 찔렀다고 한다. "정말로 미안해요, 사랑하는 엘리엇이. 저를 부디 용서해주세요."라고 적은 것이 사실상 유서로 보인다. 다만,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자살 방식 때문에 타살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 유족인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그간 엘리엇의 음반을 엘리엇과 같이 프로듀스해왔던 롭 슈내프와 엘리엇의 전 여자친구이자 현재는 록 밴드 크립스의 멤버 게리 지만의 부인인 조애나 봄에 의해 엘리엇 스미스의 유작 앨범 From A Basement On The Hill이 발매되었다.
3. 기타
- 성공하기 전에 어쩌다 여유가 좀 생기면 동네 노숙자들에게 닥치는 대로 20달러씩 나눠주는 버릇이 있었다.
- 유머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도가 지나친 농담도 곧잘 했다고 한다. 또한 한 번 성공한 농담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무대공포증으로 인해 통증을 호소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 입에 풀칠하기 위해 도장공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때문인지 회벽 바르는 솜씨가 프로 미장공급이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의 학대경험 등으로 인해 그에게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이 때문에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술에 의존했던 엘리엇은 평생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고 성공한 후에는 헤로인에 중독된 삶을 살았다. 묘하게 70년대를 풍미했던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 닉 드레이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드레이크도 항우울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걸 보면... 엘리엇 스미스는 이러한 불행한 인생 속에서 아픈 곡을 쓰는 섬세한 사람이었고 포크와 클래식에 영향을 받은, 순수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멜로디와 특유의 지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를 지닌 가사가 맞물리는 음악을 창작해 냄으로써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끔 만들었다.
- 2006년 스케이트보드 비디오 'A Time To Shine' Dylan Rieder 파트에 'Coast To Coast'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2007년도 11월자 롤링 스톤 지에서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 25인 중 23위로 그의 이름을 올렸다. 실제로 그의 몇몇 곡들이 가진 코드는 상당히 잡기 어려운 프레이즈로 이루어져 있어 연주하기 힘들다. 엘리엇 스미스는 기타 뿐만 아니라 피아노, 베이스, 드럼, 클라리넷 등을 연주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으며, 앨범을 녹음할 때는 몇 몇 세션들을 제외하면 원맨 밴드식으로 혼자 모든 악기를 연주했다. 특히 피아노의 경우 고난이도인 라흐마니노프의 악보 또한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타는 어쿠스틱의 경우, 야마하의 FG-180과 깁슨의 J-45, 그리고 일렉트릭으로는 1969년산 깁슨 ES - 330을 사용했다.
- 벤 폴즈는 Late라는 곡을 통해 친구인 엘리엇 스미스를 추모하기도 했다. 이 곡의 가사에는 엘리엇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엘리엇 스미스다.
Elliott, man, you played a fine guitar
엘리엇, 넌 정말 기타를 잘 연주했지
And some dirty basketball
그리고 조금은 거친 농구 실력도
The songs you wrote Got me through a lot
네가 쓴 노래는 내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Just wanna tell you that
그걸 너에게 말하고 싶어
But it's too late
그러나, 너무 늦었어
It's too late
너무 늦었어
No, don't you know
넌 모르니
it's been too late for a long time
너무 늦었다는 걸
- 다큐멘터리 'Heaven Adores You'는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인생을 다룬다.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출품됐다.
- 가수 이소라는 엘리엇 스미스의 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앨범 7집 수록곡 Track8은 엘리엇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한다.
[1] 엘리엇은 텍사스 주의 지도를 타투로 새겼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이곳을 좋아해서 타투로 새긴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렇게 타투로 새기면 그곳에 대해 절대 잊지 않을테니까”라는 말을 했다[2] 믹싱 엔지니어이자 베이시스트인 조애나 봄은 엘리엇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둘은 3집 <Either/Or> 녹음 중 결별했는데 엘리엇의 대표곡 'Say Yes', 'Miss Misery'와 같은 곡들이 그녀와 헤어진 직후 쓰여졌다. 특히 Say Yes의 메인 곡조는 그녀와 헤어진 다음날 아침에 썼다고 한다. 그 외에 조애나는 다양한 밴드와 프로젝트에 참여한 저명한 뮤지션이기도 한데, 현재에는 페이브먼트의 스티븐 말크머스 앤 더 직스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3] 엘리엇 스미스가 본격적으로 헤로인을 시작한 것은 <Figure 8> 투어 중이었다.[4] 엘리엇이 탈퇴하자 히트마이저는 그대로 해체.[5] <XO> 발매 당시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