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토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귀족.
고구려 말기의 권신 연개소문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그 행적이 있다.
2. 행적
666년,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삼 형제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자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항복하였다.
연정토가 신라에 바친 12성 중 8성은 성과 주민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기에 신라 조정은 군대를 보내 이를 지키게 하는 한편 연정토와 그의 막료 34명에게 재물과 주택을 내려 신라 수도와 지방에서 편히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667년, 신라 조정은 연정토와 원기(元器)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고구려 침공에 대해 당나라 조정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원기는 일을 마친 후에 다시 귀국하였으나 연정토는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당에 남는 것을 선택, 신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본인이 신라 조정에 무언가 불만이 있어서 당나라에 남기로 한건지 아니면 당나라 조정이 억류한건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이후로 연정토가 당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비슷한 테크를 탄 조카 연남생이나 연남산의 당나라 항복 후 행적을 봐선 특별히 모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천수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이끌다가 674년에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안승이 연정토의 아들이며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승이 보장왕의 서자라는 다른 기록도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2]
3. 연씨(淵氏)
18세기의 국학자인 안정복은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통고(通攷)에 이르기를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며 연정토를 연개소문의 동생이라고 보았다. 통고보다 이전에 지어진 신당서에도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당시에만 해도 연개소문의 성은 천(泉)씨로 알려져 있었는데 안정복은 '연정토가 개소문의 아우이므로 개소문의 성 역씨 연(淵)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본래 성씨는 연씨였으나 그 이름자가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같았기에 중국인들이 이를 피휘하여 그 성씨를 천씨라 기록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라의 기록에는 연정토의 이름을 당나라식으로 피휘하지 않고 그대로 연씨로 표기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연개소문의 진짜 성씨가 연씨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4. 창작물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기고 죽은 것으로 유명한 남당 박창화의 한문소설 <개소문전>에는 연정토가 연개소문의 조카였다고 하였는데 박창화의 기록이 다 그렇듯 믿을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4.1. 연정토를 연기한 배우
- 삼국기 : 김영기[3] 씨.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선도해[4] 의 권유로 신라에 남쪽 12개 성을 들어 투항하는 것으로 등장하며, 그 외에는 잠깐씩만 얼굴을 비추는 정도로 등장한다. 위에서 서술한 기회주의자 역보다는 그냥 수더분하고 착실한 동생 정도의 포지션으로만 등장한다.
[1] 삼국사기 신라 본기 원문 기록. '높은 신하'라는 뜻이라 실제 관직명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2] 기록상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했는데, 안승이 보장왕의 뒤를 이을만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고구려인들이 사실상 인정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가 왕족 고씨가 아닌 연정토 아들 연씨 부계면 고구려인들이 그렇게 했겠느냐는 의문이 뒤따른다. 아무튼 현대에는 안승을 대략 고구려 왕족으로 파악하고 그냥 넘어가는 편이다.[3]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분이다.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 권율 장군 역을 잘 알려져 있다.[4] 김춘추에게 귀토설화를 알려주고 신라로 도망가도록 도와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