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

 

安鼎福
1712년~17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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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성리학자.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에게는 동사강목이라는 역사서로 유명하고 여용국전이라는 소설도 썼다.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2. 생애


1712년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했다. 안정복의 가문이었던 광주 안씨는 당시 남인 계열의 집안[1]으로 그의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예조참의도 역임했지만 이후 숙종 시절의 경신환국갑술환국으로 완전히 중앙 정계에서는 배척당하고 만다. 안정복이 청소년을 보낼 시절이었던 1728년 이인좌의 난까지 터져주는 덕에 벼슬길은 영원히 막혔다. 집안이 가담한 것은 아니니 과거를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설사 붙는다해도 평생 한직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컸고 안정복 본인이 벼슬을 단념하고 살면서 1번도 과거를 응시조차 하지 않는다.
이후 성호 이익 밑에서 수학하며 이익의 실학성리학에 영향을 받게 된다.[2] 실학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안정복의 유학관은 보수적이어서 스승 이익과는 달리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가 주자대전을 편찬할 때 불러들인다거나 세손의 스승 가운데 1명으로 발탁하는 등 정통 성리학자의 면모만 두드러진다.
안정복이 이익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역사학이었는데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이라는 사관은 이익을 통해서 탄생하고 안정복에 의해 초석을 다졌다는게 일반적인 평가. 안정복과 이익의 자주적 역사관의 정수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스승과 함께 만든[3] 저서 동사강목.[4] 30대 후반에는 음서로 관직에 나가서 사헌부에서 근무하기도 하지만 부친상을 당하기도 했고 젊어서 고생[5]을 너무 해서 본인의 건강도 좋지는 않았던터라 곧 사직했다가 복직하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주자대전 간행이나 세자시강원을 역임한 것이 이 시기. 노년 이후에는 남인 계열을 중용했고 자기가 가르치기도 했던 정조가 즉위하자 인생이 펴서 노년에 지방 사또 자리를 맡기도 하다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인 1791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스승 이익이 천주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스탠스를 취했던 것과 달리 안정복은 서학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배척했다. 저서 순암집(順菴集)[6]의 권17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유교적 세계관과 이기론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비판했다. 안정복은 천학(천주교)은 현실을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내세의 천당 지옥설을 믿어 사람을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며 아침, 저녁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하고자 자기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함이 무당이나 불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옛 신성한 자가 만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수단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서양인들의 신은 여와후예나 다를 바 없는 괴력난신이므로 서양인들에게는 천학이 성학(聖學)일지라도 그것이 공자(孔子) 같은 성인의 가르침과 동일한 성학은 아님을 말했다. 조선 실학자가 본 기독교의 모순과 문제점
안정복의 딸은 같은 성호학파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혼인했는데 형제가 대표적인 남인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래서 안정복은 이들에게 천주교와 거리를 두라는 편지를 계속보냈다. 이후 신해박해 때 권씨 형제가 발각되었는데 천학문답으로 사후에 노론 벽파에게 추증되기까지 했던 안정복은 연루되지 않았다.

3. 여담


평생에 걸쳐 저술한 책 중에 잡동산이(雜同散異)라는 책이 있었는데 현대에 자주 쓰이는 잡동사니의 어원이 된다. 실제 책 내용도 잡동사니 같은 떠도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권근의 역사관을 좋아하지 않았는지 권근 안티 같은 행동을 했다. 권근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백제에 대한 복수가 과하다고 하자 선대왕이 죽은지 오래되지 않아 원한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뭐가 심하냐고 깠고 권근이 계백이 일가족을 죽이는 것은 심하지 않냐고 하자 안정복이 권근은 병법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1] 남인에서 날리던 집안은 아니고 그냥 남인 소속. 남인의 거두였으면 안정복의 증조부나 고조부가 사또랑 종8품 정도에서 벼슬길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 사실 막힌건 연산군 탓.[2] 흔히 사람들이 실학자는 성리학자랑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잦은데 시대 특성상 실학자들도 성리학자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기는 했다. 단지 성리학을 절대 신봉하지 않았으며 실생활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는게 차이일 뿐이다.[3] 이익이 쓴 항목은 없지만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줬다. 이거 만들 때 돈이 없어서 굶으면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도 동사강목에 대해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1급 사료는 얻어보지도 못하고 그나마 얻은 자료도 제책 수준이 형편없어서 해석을 잘못한 부분도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4] 거의 20년에 걸친 평생의 역작이었다. 단재 신채호독립운동하러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유일하게 갖고 갔던 것.[5] 아버지가 전답을 다 팔아서 노비랑 같이 숯을 구워서 그걸 팔아서 먹고 살았을 정도.[6] 순암집은 27권 연보 합 15책의 목활자본으로 제자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 편집하고 뒤에 안경위(安景褘)가 잡저의 편목을 수정했으며 5세손 안종엽(安鍾曄)이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