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

 

1. 개요
2. 전개
2.1. 스코틀랜드의 반란
2.3. 커먼웰스 수립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평정

British Civil War / Wars of the Three Kingdoms

1. 개요


1639년부터 1651년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섬아일랜드 섬에서 일어난 내전.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을 아우른 전쟁이었기 때문에 삼왕국 전쟁(Wars of the Three Kingdoms)이라고도 한다.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 내전은 이 영국 내전의 일부이다.

2. 전개



2.1. 스코틀랜드의 반란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의 왕인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 의회와 큰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이듬해 1629년에 강제로 해산당했다.
그러던 중에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스코틀랜드영국 국교회를 신봉하게끔 강요했다. 찰스는 윌리엄 로드 추기경을 필두로 한 성공회식 전례와 주교제를 스코틀랜드에 강제하려고 들면서 결국 열받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유력 목사들, 에딘버러와 다른 로우랜드의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동맹했던 개신교계 클랜들은 1638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1] 교회에 모여 국민 언약[2]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동맹을 선포하고 봉기를 일으켜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면서 찰스의 왕권에 정면 도전했다.

2.2.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는 이에 대항해 군대를 보내고 군자금에 쓸 세금을 걷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며 왕권을 더 약화시킬 걸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왕이 요구한 반란 진압 예산 책정은 무시하고 각각 찰스의 종교적, 정치적 면에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하여 사형에 처한다.
대노한 찰스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개기는 의원 다섯 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가나 이들은 도망치고, 찰스를 본격적으로 못 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 없이 혼자서 민병대 소집법(The Militia Ordinance)을 통과시켜버렸다. 당시 런던은 왕당파보다 의회파 세력이 컸기 때문에 찰스 1세는 일부 자신을 지지하는 의회 의원[3]들과 함께 런던을 떠났고, 의회파의 공격에 맞불을 놓기 위해 의회의 비준 없이 혼자서 군열 위임령(Commissions of Arrays)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잉글랜드 내전 참조.
한편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10만~20만의 잉글랜드인들을 살해하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다. 또한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인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귀금속을 담보삼아 사채를 빌리고 이 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하여 1만 병력을, 또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꼬드기며 1만 병력을 요청하려 했다.

2.3. 커먼웰스 수립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평정


잉글랜드 내전은 결국 의회파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의 목을 치는 것으로 끝났다.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에 반기를 들었던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질시했으며,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 뒷통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던바,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에게 대파당하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 정복당했다. 크롬웰 본인은 당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에서 일반적인 태도였던 의심으로 스코틀랜드를 대했으나, 일단 사상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신교 급진파이고, 전쟁 막판 전까지는 동맹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이후 딱히 정치 보복을 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크롬웰은 자신들에게 뒤통수를 치려 했던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토착 세력은 영국 내전 당시 사실상 잉글랜드에서 독립하고 자체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의 목을 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자, 크롬웰은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통제불능이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고자 아일랜드에 출병했다.
크롬웰은 군대를 스스로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하는데 처음엔 농민과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정없이 아일랜드 전역을 초토화하고 살인과 방화, 약탈을 동반하여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던 20~30만가량이었다.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이 바로 드로이다(Drogheda[4]) 공성전으로, 1649년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 함락이 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 남녀노소 2000명을, 그것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크롬웰이 자행한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뿌리 깊은 상처를 안겼다.

[1] Greyfriars, 즉 회색 수도자란 뜻으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교회라 붙여진 이름이다. 첨언으로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의 본명인 톰 리들은 이 교회 공동묘지터에 있는 Thomas Riddell 이란 사람의 비석에서 롤링 여사가 따온 것이라 한다.[2] National Covenant. 헤일로에 나오는 그 코버넌트 맞는다. 원래 구약 성서의 유대 민족과 야훼 사이의 계약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이렇게 자기 나라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자칭하며 구약적 민족주의, 반카톨릭 반보편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경향은 후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3]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도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4] 원체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이 엉망이라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찾아본 결과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라고 읽는다고 한다. 굳이 한국어로 전사한다면 드라허다 혹은 드러더 정도. 한국에서는 '드로이다'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위키피디아도 드로이다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