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연방

 



'''잉글랜드 연방'''
'''Commonwealth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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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존속 기간
1649년 ~ 1660년
위치
영국
수도
런던
정치 체제
의회제 공화정
국가 원수
호국경
주요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
언어
영어
종교
개신교(청교도)
종족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성립 이전
잉글랜드 왕국
멸망 이후
잉글랜드 왕국
1. 개요
2. 통치
2.1. 무역
2.2. 강경 진압
2.3. 군사 독재
3. 멸망
4. 역대 호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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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mmonwealth(커먼웰스) of England''' (1649~1653) /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53~1660)
잉글랜드 연방 또는 잉글랜드 공화국(Republic of England)이라고 한다.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이후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수립한 공화국이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의회는 잉글랜드 연방법을 제정하고 1653년에 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병합했다. 이후 1659년까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을 정식 국호로 사용했다. 이 기간 동안 올리버 크롬웰은 호국경으로서 잉글랜드, 나아가 전 영국과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2. 통치



2.1. 무역


1651년에는 항해조례(=항해법)를 반포하면서 네덜란드 중개 무역 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 법은 잉글랜드 혹은 물건을 생산한 국가의 선박을 써서만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든 법으로 중계 무역으로 많은 수익을 얻던 네덜란드를 노린 법이었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젠트리 계층의 큰 지지를 이끌어냈고 잉글랜드의 해운업과 조선업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이후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제1차 영란전쟁)을 치러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면서 네덜란드 유일의 패권 체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재해권 장악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했던 배경이 되었다.

2.2. 강경 진압


1649년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크롬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영국 본토가 내전으로 정신없던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분리해 있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는 것이었다. 찰스 1세 시절 내전으로 잉글랜드로 병력이 이동한 사이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발생해 수십만명의 잉글랜드인들을 살해하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다. 게다가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인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금과 은을 담보삼아 얻은 자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해 1만명의 병력을,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하면서 1만명의 병력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고 봤다.
이미 아일랜드 정복은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전이 끝나고 나서 아일랜드 토벌군을 모집해 파견하려 하자 그동안 전쟁에 지친 병력들이 파병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의회의 대다수는 시골 지주, 교수, 상공인 같은 무리들이었고 내전 기간 전장에서 많은 목숨을 잃은 군대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과거 군대를 이끌고 정권을 얻었던 크롬웰이 나서서 항명을 일으킨 병력들 중 주모자 몇 명을 처형했고 도망간 탈영 부대들을 추격해 이들이 숨은 마을에 포격을 해 진압했고 잡힌 반란군 400명을 총살시켜 버렸다. 이렇게 폭동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크롬웰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반란 병력을 막고 나서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했는데 처음엔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여전히 저항하자 사정없이 초토화시키고 살인, 방화, 약탈을 동반해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이 수십만명 가량이었다.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이 바로 드로이다(Drogheda)[1] 공성전으로 1649년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드로이다 성을 계속 포위하고 있다가 함락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 남녀 민간인 200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재정복한 후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힘을 기반부터 절멸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과 재분배 정책을 벌였다. 크롬웰의 병사들은 아일랜드 전역을 정렴하고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주요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아일랜드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크롬웰의 초토화 정책에서 본격화되었다.

2.3. 군사 독재


크롬웰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상원 의사당을 없애고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우고 나서는 남아있는 의원들을 1653년에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내 버렸다. 의회의 대다수가 청교도들이긴 했지만 다수파는 장로회였고 크롬웰의 군대는 소수파에 속하는 독립파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다. 크롬웰은 찰스 1세가 마지막 저항 시도를 했을 때 스코틀랜드와 의회 장로회가 연관되었다는 근거없는 구실로 장로회를 숙청해 공화정 정부 수립 직후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는 존 램버르트와 함께 영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지만 나중에 본인이 무마하고 군사 철권 통치를 시작했다. 평등한 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와 가톨릭과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청교도 법령을 반포하는 등 권력을 휘두른다.
연방은 '청교도 도덕성'의 엄격한 도덕주의를 지키도록 할 법을 도입했는데 극장 운영과 운동 경기와 무도회 등의 청교도적으로 죄악시될 수 있는 행동들을 금지했다. 심지어 대중 음악마저도 금지해서 영국인들은 노래라고는 오로지 찬송가만 부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금지되어 의회가 매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3. 멸망


올리버 크롬웰 사후 셋째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의 지위를 계승하다가 9개월만에 축출되었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잉글랜드 연방은 사라졌다.


4. 역대 호국경



[1]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은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 라고 읽고 한국어로 전사하면 드라허다 혹은 드러더 정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