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군

 

'''백제의 투항자'''
'''국적'''
<colbgcolor=white,#191919>백제 → 당
'''이름'''
예군(禰軍)
''''''
온(溫)
'''아버지'''
예사선(禰思善)
'''형제'''
예식진
'''묘지'''
당국 옹주(雍州) 건봉현(乾封縣) 고양리(高陽里)
'''생몰연도'''
613년 ~ 678년 2월 19일
1. 개요
2. 예군의 묘지명 발견
3. 일본 국호 논란
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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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인물. 자는 온(溫). 동생 예식진은 유명한 백제의 매국노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 일행과 함께 에 투항해 웅진도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일본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중국 천자의 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국 거부를 당했다. 삼국사기에 예군의 행적이 기록이 되었는데, 670년 7월 웅진도독부의 사마로 신라한테 붙잡혀 갇혔다. 삼국지의 관해처럼 등장의 빈도가 매우 적다. 사실 예군의 묘지명의 발견이 없었으면 대다수 한국 고대사의 인물들처럼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는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2. 예군의 묘지명 발견


2011년, 중국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image]
묘지명 전문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
【원문과 해석】
(묘지 주인에 대한 소개)
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祢公墓誌銘 并序
대당 고 우위위장군 상주국 예공 묘지명 병서
公諱軍 字溫 熊津嵎夷人也
공의 이름은 군 자는 온 웅진 우이 사람이다.
(가문 내력)
其先與華同祖 永嘉末避亂 適東因遂家焉
그 선조는 중화와 조상이 같으며, 영가 말 난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가문을 이루었다.
若夫
무릇
巍巍鯨山 跨青丘以東峙
높고 높은 경산은 청구를 넘어 동쪽 언덕이 되고
淼淼熊水 臨丹渚以南流
넓고 아득한 웅수는 단저에 임해 남으로 흐른다.
浸煙雲以檎英 降之於盪沃
연운에 스며들어 재주를 펼치니 탕옥처럼 내려오고
照日月而榳惁 秀之於蔽虧
일월이 비추어 빼어나게 밝으니, 어그러진 것 중에서 빼어났다.
靈文逸文 高前芳於七子
신령하고 뛰어난 문자는 높이기 전에도 칠자보다 아름답고
汗馬雄武 擅後昇於三韓
한마와 같은 웅무는 뜻대로 한 후에도 삼한에서 높으니
華搆増輝
아름답게 엮여내려가 빛남이 더하여지며
英材繼響
영재는 이어 울려퍼지고
綿圖不絕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奕代有聲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가까운 선대에 대한 설명)
曾祖福 祖譽 父善 皆是本藩一品 官号佐平
증조부는 부, 조부는 예, 부는 선이고 모두 본번(백제)의 1품으로 관호는 좌평이었다.

모두
絹地義以光身
지의를 모아 몸을 빛냈고
佩天爵而懃國
천작을 지녀 나라에 봉사했다.
忠侔鐵石
충(성)은 철석(철과 돌)에 비기고
操埒松筠
(지)조는 송균(소나무와 대나무)과 같았다.
範物者 道德有成
만물의 모범으로 도덕을 이루었고
則士者 文武不墜
선비의 모범으로 문무가 떨어지지 않았다.
(묘지 주인에 대한 설명)

공은
狼輝襲祉
천랑성이 빛나듯 복을 이엇고
䴏頷生姿
제비의 턱과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涯濬澄陂
물가의 깊음은 물가를 맑게 했고
裕光愛日
빛의 넉넉함은 은덕이 있었다.
干牛斗之逸氣 芒照星中
우숙과 두숙을 뚫는 뛰어난 기운은 별 사이에 황홀하게 비추고
搏羊角之奠風 影征雲外
양각을 쥔 빼어난 바람은 구름 밖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去 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지난 현경 오년 관군(당군)이 본번(백제)을 평정하던 날
見機識變
기식이 변함을 보고
杖劍知歸
장검하고 귀순을 알았으니
似由余之出戎
유여가 융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고
如金磾之入漢
김제(김일제)가 한으로 온 것과 같았다.
聖上嘉嘆 擢以榮班 授右武衛滻川府析衝都尉
성상께서 기탄(기특히여기고 감탄하다)하여 영반으로 발탁하고 우무위 산천부 절충도위에 제수하셨다.
于時
이 때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일본의 남은 백성은 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였고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萬騎亘野与蓋馬以驚塵千艘横波援原虵而縱沵以公格謨海左龜鏡瀛
東特在簡帝往尸招慰公序侚臣節而投命歌  皇華以載馳飛汎海之蒼鷹
翥凌山之赤雀決河眥而天吳靜鑒風隧而雲路通驚鳧失侶濟不終夕遂能
說暢  天威喻以禍福千秋僭帝一旦稱臣仍領大首望數十人將入朝謁
特蒙  恩詔授左戎衛郎將少選遷右領軍衛中郎將兼檢校熊津都督府
司馬材光千里之足仁副百城之心拳燭靈臺器標於芃棫懸月神府芳掩於
桂符衣錦晝行富貴無革雚蒲夜寢字育有方去咸亨三年十一月廿一日
詔授右威衛將軍局影  彤闕飾躬紫陛除、蒙榮晉驟歴便繁方謂克壯清
猷永綏多祐豈啚㬢馳易往霜凋馬陵之樹川閱難留風驚龍驤之水以儀鳳
三年歲在戊寅二月朔戊子十九日景午遘疾薨於雍州長安縣之延壽里第
春秋六十有六  皇情念功惟舊傷悼者久之贈絹布三百段粟三百升葬
事所須並令官給仍使弘文舘學士兼檢校本衛長史王行本監護惟公雅識
淹通溫儀韶峻明珠不颣白珪無玷十步之芳蘭室欽其臭味四鄰之彩桂嶺
尚其英華奄墜扶搖之翼遽輟連舂之景粵以其年十月甲申朔二日乙酉葬
雍州乾封縣之高陽里礼也駟馬悲鳴九原長往月輪夕駕星精夜上日落
山子草色寒風度原子松聲響陟文榭子可通随武山予安仰愴清風之歇滅
樹芳名於壽像其詞曰
冑胤青丘芳基華麗脈遠遐邈會逢時濟茂族淳秀奕葉相繼獻款夙彰隆恩
無替其一惟公苗裔桂馥蘭芬緒榮七貴乃子傳孫流芳後代播美來昆奠聲雖
歇令範猶存其二牖箭驚秋隟駒遄暮名將日遠德隨年故慘松吟於夜風悲薤
哥於朝露靈轜予遽轉嘶驂予跼顧嗟陵谷之貿遷覬音徽之靡蠹其三


3. 일본 국호 논란


이 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예군 묘지명의 내용 중에 '일본'이라는 표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 이전의 기록으로 후대의 문헌 기록인 삼국사기를 제외한 '일본'의 실제 사용 사례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목된다. 구체적으로는 '관군(당나라)이 번방(백제)을 멸하자 일본(백제)의 잔당들이 扶桑(부상, 일본)에 들어가 죽임을 면했다'는 문구이다.
여기서 '부상'은 중국에서 왜국을 가르키던 말로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목인 부상이 어원이다. 예군의 묘지명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해당 나라를 빗댄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라현대학의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 교수는 첫째, '부상'은 '일본'을 가리키는 명칭이고 둘째, 다른 나라는 다 빗대어 말하는데 일본만 국명을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이라는 단어'는 '백제'를 가리킨다[1]고 주장하였다.# 왜국이 부상으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일본이라는 단어'는 '해좌(海左)', '영동(瀛東)' 등의 단어를 통해 별도로 나타냈다고 주장하였다.
도노 교수는 풍곡을 고구려, 반도를 신라로 비정하면서, 묘지명에 기록된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중국의 주변 나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부상·풍곡·반도' 등 자연환경적 특징에 근거한 은유적 명칭을 썼는데, '''유독 일본만 공식 국호를 썼을리 없다'''는 논지다. 묘지명의 ‘일본’은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군의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문학학술원장은 이 같은 사실이 예군 묘지가 제작된 시점, 즉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다. 예군 묘지는 일본 국호의 성립이 678년 이후의 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란 것이다. [2][3] #
678년
예군의 묘에 '日本' 이라는 글자 (백제를 뜻함)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일본(日本) 국호 공식 사용
945년
구당서 편찬 - 여기서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나옴
1145년
삼국사기 편찬 -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나옴. [4]


애초에 670년에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구당서의 잘못으로 보임[5]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일본’이란 단어가 일본에서 생산된 용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며 일본의 국호 제정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의 지적인 역할을 추정케 해준다”고 말했다.
또한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그 나라가 해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 이름하였다.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어떤 사람은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해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어떤 사람은 일본은 옛날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 땅을 합병하였다고 말한다.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 구당서 동이열전

여기서 나오는 별종이라는 표현은 발해를 언급하면서도 나타나난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이란 자는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이런 면에서 살펴보면 일본과 왜국은 연속성 있는 다른 나라로 추측할 수 있다.동북아역사넷
구당서에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말이 이때까지 이해가 힘들었는데, 여기서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을 썼으며,[6] [7] 이후 왜국의 지도층이 되어 일본을 정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8]

4. 같이보기


  • 예식진
  • 예형[9]


[1] 즉, 문구 내용 중 '''백제는 일본으로''', 일본은 부상으로 표기했다는 주장.[2] 반면, 구당서(945년 편찬) 동이전과 삼국사기(1145년 편찬)에서는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국은 왜의 다른 이름이다. 나라가 해가 머무는 곳에 있으므로해서 이름지었다. 혹자는 왜국 스스로 그 명칭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해서 싫어하기 때문에 일본(日本)으로 고쳤다고 말한다."(日本國者倭之別稱也 以其國在日處故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 이성시 원장의 말은 여기에 나오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틀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3]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은 '''701년''' 다이호 율령 이후에 쓰이게 된다.[4] 삼국사기는 구당서를 참조[5]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 250년이 지나 구당서를 지었으니 틀릴만 하다.[6] 왜국은 난쟁이을 연상하는 비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백제 유민 입장에서는 사용하기 싫었을 것이다.[7] 또한 일본 이라는 말은 해가 뜨는 곳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입장에서 봐야 일본섬의 위치가 해가 뜨는 동쪽이 된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타지역 사람이 일본으로 유입된 이후 왜국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론.[8] 비슷한 예로 영국을 뜻하는 브리튼도 트로이의 귀족 브루투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학설이 존재한다.[9] 예식진의 묘지명을 보면 예씨집안의 선조가 예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