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진
禰寔進
615년 ~ 672년
백제의 장군. 백제의 지방구분인 5방 중 하나를 담당한 북방령(北方領)이자 웅진성주였으나,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시킨 배신자이자 매국노.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웅진도독부의 동명주자사(東明州刺史)를 지냈다 한다.
2006년, 중국 뤄양시의 골동품상에 나타난 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출토지는 시안시라고 한다. 출토지는 시안인데 뤄양의 골동품상에서 판매한 건 출처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세탁' 과정 때문일 것이라 한다.
2007년, 지린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기존의 다른 백제 유민들의 묘지명과 함께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4월, 시안 시내의 한 공사장에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禰素士), 손자 예인수(禰仁秀)의 일가족 무덤이 동시에 발견되었다. 특히 이들 가족묘에서는 예소사와 예인수의 묘지명이 동시에 출토되었고 기존 예식진묘지명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예씨의 가족 내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묘지명에 의하면 무왕(백제) 16년(615년)에 태어나 당고종 대인 함형(咸亨) 3년(672년) 5월 25일 향년 58세로 죽어 그 해 11월 21일 장안(長安, 현 시안)의 고양원(高陽原)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가계도는 위로는 아버지는 좌평 예사선(禰思善)이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예다(禰譽多)이며, 증조부는 좌평 예복(禰福)이고, 예복(禰福)의 증조부는 예숭(禰嵩)이다. 아래로는 아들은 예소사(禰素士)이고, 손자는 예인수(禰仁秀)이다. 옆으로는 형인 예군(禰軍)이 있다.
백제의 요충지인 웅진성을 거점으로 했던 것으로 볼 때 예씨(禰氏)는 웅진성을 기반으로 했던 대성팔족의 백씨(苩氏)가 몰락한 후에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유력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씨일족이 대성팔족인 백씨들을 몰락시킨 것이라면 무령왕의 왕위쟁탈전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즉 예씨일족은 무령왕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높다.
예인수 묘지명에 의하면 선조는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 한다. 다만 예군 묘지명, 예소사 묘지명, 예인수 묘지명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군, 예소사, 예인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양식의 형태를 띄는 점을 통해 볼 때 백제의 예씨가 정말로 삼국지의 그 예형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중국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무령왕이 최측근으로 중국계를 많이 기용했음을 알 수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와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겨간다. 당초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나당연합군은 고대국가의 전쟁형태인 영토 획득 전쟁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백제 멸망을 목적으로 한(수도인 사비성을 집중 공략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3]
의자왕은 백제의 모든 지방군들을 동원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고 15만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그대로 아사시키는 전략을 위해 사비성을 빠르게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은 수비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지에 있는 웅진성이 보다 수비에 용이했다. 게다가 백제 귀족들이 비록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수백년간 달고 살아온 간판을 한 순간에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4] 의자왕이 백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과 대립해서 갈등의 골이 커졌다고 한들, 서로의 피로 피를 씻어온 적국인 신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백제 안에서는 유력한 귀족으로 권력의 핵심과 가까운데 존재하지만, 신라에 항복하면 수많은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는 골품제가 있어 타국가들보다 더욱 심했다. 백제 유력 귀족들은 신라에서 진골은 커녕 6두품으로도 못 들어가고, 5두품 이하만 받았다.[5]
이런 모든 계산하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겨 버티기 작전을 구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설대로 백제군이 애초에 장기전을 노렸다면 성충의 간언대로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은 뒤 양군의 합류 자체를 저지한 뒤 시간을 끌었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는 당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신라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피난 움직임은커녕 본격적인 전략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백제의 초기 대응은 완전히 실패였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했다면 급박한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해 옮겨갔을 것이지, 처음부터 장기전을 노린다는 대국적 전략을 수행하려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단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던 백제군 수천을 격퇴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기벌포가 금강 하류라고 해석한다면 합류지연을 노리고 요격하기는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보다는 요격 방식이 문제였다. 즉 1안은 당군이 상륙 자체를 못하게 막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안이었고, 2안은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물러가게 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 2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은 당군의 수륙병진에 박살이 나서 기벌포의 방어선은 그대로 돌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긁어모아 야전에서 당군과 맞섰으나 대패했다. 즉 백제의 초기 방어 전략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의자왕이 대국적인 전략을 위해서든, 급한 불을 끄기 위함이든 웅진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한 이상 곤란한 것은 나당연합군 쪽이었다. 웅진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비축된 물자도 있었고, 벼랑과 강으로 삼면에 둘러싸여 있어 군사적으로 제대로 공략 가능한 곳은 사실상 한 면 뿐인 천혜의 요새로서 아무리 대군을 몰고 닥돌해도 하루아침에 점령하기 힘들었다.[6] 또 고구려라는 변수도 있다. 당이 요동을 건드리는 양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입장에선 바다를 건너온 당의 13만 대군을 그냥 두고보진 않았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동맹이라는 고구려가 뭔가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건 백제가 너무 빨리 항복해버려서 끼어들어 뭘 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실제로 좀 늦었긴 해도 백제부흥운동과 맞물려 신라 북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으니 그것이 660년의 칠중성 전투, 661년의 술천성 전투와 북한산성 전투였다. 이 전투들은 신라군의 주력이 백제 땅에 있는 것을 노려 방비가 허술해진 신라령 경기도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신라군이 백제부흥군 토벌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이 공격은 신라 측의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의 철벽수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남하한다면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특히 소정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7]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
예식진과 비슷한 이름의 예식(禰植)이란 인물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언급된다. 예식은 예식진하고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이는데, 식(植)이라는 이름이 예식진의 원래 본명이거나, 혹은 그의 자(字)로 추정할 수있다.[8]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이민족 출신들의 공로는 김일제에 비교되곤 했다. 그런데 예식진이 세운 공이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표현으로 결국 예식진이 세운 위대한 공은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군에게 넘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데리고"라는 의미로 쓰인 한자 "將"은 강제로 끌고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큰 공의 정체였다는 주장이다. 비록 묘비명에 이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하나 정황상 그외에는 의자왕의 갑작스런 항복과 웅진성의 낙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기 나라 왕을 잡아서 적에게 넘겨버린 사실을 자기 묘비에 직접적으로 적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또한 백제의 예씨 가문 자체가 토착 가문이 아닌 중국에서 이주한 신흥귀족이다. 예씨 가문의 묘지명 마다 시기에 대한 기록이 달라 중국에서 백제로 정확한 이주한 시기에는 이견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때, 다른 지방 귀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백제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동질감도 낮았으며, 반대로 중국에 대한 친밀감은 타 귀족보다 비교적 높았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가족으로 형제인 예군이 있다. 역시 당에 항복하여 관직을 받았다.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혹은 함께) 항복하였다.' 라는 기술은 신당서, 구당서에 모두 기록되어있고[9] <<삼국사>> 신라본기에도 예식(예식진)이라는 이름만 없지 '웅진방령이 함께 항복하였다'라는 기술이 존재한다.[10] 따라서 위의 구당서(소정방열전)을 제외하고 예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다. 애초에 둘째문단에서 신당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구당서를 분석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셋째 문단에서 신당서와 구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 예식이라는 인물과 묘비에 기록된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 기록된 묘지명이 발굴 되었으며 이 중에는 아들인 예소사(禰素士)와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있어서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친 걸 대놓고 적고 있어서 그가 매국노임이 명확해졌다''' (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애초에 유명하지도 않던 적장 한 명을 (요새로 피신한) 적의 왕보다 앞에 기록한다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반론에서 말하듯 의자왕과 더불어(與) 항복했더라면, 예식진이 당나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도 이해가 안된다. 공적이 있어야 벼슬을 받을 것 아닌가? 당나라 대장군이 단순히 항복했다고 주는 지위가 아닌 만큼, 예식진이 벼슬을 받을 만큼의 공로[11] 를 세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반론이고 뭐고 필요없는 일.
예식진이 나라를 팔아먹을 당시 백제의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의자왕의 신변이 무사한 가운데 난공불락인 웅진성까지 도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승리하고 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되고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이 백제 내부를 들쑤시는 상황에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식진의 배신을 그 당시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할 순 없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쳐들어 와 악전고투 끝에 더 버티기 어렵게 되어 항복한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왕을 사로잡아 항복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는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7월 18일 예식진의 배신으로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는 당나라가 상륙한지 고작 10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 고구려의 구원군과 백제 지방의 지원군들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12] , 왜국 또한 백제를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적 압박은 소정방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보급품을 배에 싣고 원정을 했기 때문에 한정된 양의 보급품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속전속결하지 않는다면 크게 곤란한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이러한 보급의 문제 때문에 이후 당나라는 17만 대군을 이끌고도 신라에게 패하게 된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볼 때,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의자왕의 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예식진의 이런한 배신은, 질 싸움인 줄 알면서도 나갔던 계백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계백을 따르던 5천 결사대와도 비교가 된다. 백제가 망하자 곧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왜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역사도 있다. 그리고 예식진은 배신의 대가로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대장군이 되기 까지 했다. 이 점은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 호의호식한 이완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예식진의 배신이 합리화 될 수 없는 까닭은, 나라가 망국의 상황에 처했다고 나라를 팔아넘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은 그 어느 나라에서나 분명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예식진 묘지 발견 이후, 다시 예군의 묘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 일본(日本)이라는 글자가 존재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오늘날 일본의 국호는 원래 백제 땅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왜나라(倭國)에서 일본(日本)으로 국호 성립에 백제인들이 관여했다고 일본 고대사학계 권위자인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가 말했다. #
실제로도 예군(禰軍)의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해좌(海左:바다 동쪽)’ , '부상(扶桑:중국 전설에 나오는 아침해가 뜨는 나무)', 또는 ‘영동(瀛東:중국 동쪽)'으로 표기 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日本)은 본래 백제를 부르는 말이었다는 것.
원문을 보면,
도노 교수에 따르면, 묘지명에 기록된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중국의 주변 나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부상·풍곡·반도' 등 자연환경적 특징에 근거한 은유적 명칭을 썼는데, '''유독 일본만 공식 국호를 썼을리 없다'''는 논지다. 묘지명의 ‘일본’은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군의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문학학술원장은 이 같은 사실이 예군 묘지가 제작된 시점, 즉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다. 예군 묘지는 일본 국호의 성립이 678년 이후의 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란 것이다. [15][16] #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일본’이란 단어가 일본에서 생산된 용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며 일본의 국호 제정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의 지적인 역할을 추정케 해준다”고 말했다.
또한 <구당서>에 "일본국은 왜국의 다른 종족이다. 그 나라가 해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이라 이름하였다. 혹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해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혹자는 '''일본(日本)은 옛날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지역을 합병하였다고 말한다'''."[19] 라고 쓰여져 있다.
구당서에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말이 이때까지 이해가 힘들었는데, 여기서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을 썼으며,[20] [21] 이후 왜국의 지도층이 되어 일본을 정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615년 ~ 672년
1. 소개
백제의 장군. 백제의 지방구분인 5방 중 하나를 담당한 북방령(北方領)이자 웅진성주였으나,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시킨 배신자이자 매국노.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웅진도독부의 동명주자사(東明州刺史)를 지냈다 한다.
2006년, 중국 뤄양시의 골동품상에 나타난 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출토지는 시안시라고 한다. 출토지는 시안인데 뤄양의 골동품상에서 판매한 건 출처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세탁' 과정 때문일 것이라 한다.
2007년, 지린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기존의 다른 백제 유민들의 묘지명과 함께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4월, 시안 시내의 한 공사장에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禰素士), 손자 예인수(禰仁秀)의 일가족 무덤이 동시에 발견되었다. 특히 이들 가족묘에서는 예소사와 예인수의 묘지명이 동시에 출토되었고 기존 예식진묘지명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예씨의 가족 내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묘지명에 의하면 무왕(백제) 16년(615년)에 태어나 당고종 대인 함형(咸亨) 3년(672년) 5월 25일 향년 58세로 죽어 그 해 11월 21일 장안(長安, 현 시안)의 고양원(高陽原)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가계도는 위로는 아버지는 좌평 예사선(禰思善)이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예다(禰譽多)이며, 증조부는 좌평 예복(禰福)이고, 예복(禰福)의 증조부는 예숭(禰嵩)이다. 아래로는 아들은 예소사(禰素士)이고, 손자는 예인수(禰仁秀)이다. 옆으로는 형인 예군(禰軍)이 있다.
백제의 요충지인 웅진성을 거점으로 했던 것으로 볼 때 예씨(禰氏)는 웅진성을 기반으로 했던 대성팔족의 백씨(苩氏)가 몰락한 후에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유력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씨일족이 대성팔족인 백씨들을 몰락시킨 것이라면 무령왕의 왕위쟁탈전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즉 예씨일족은 무령왕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높다.
예인수 묘지명에 의하면 선조는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 한다. 다만 예군 묘지명, 예소사 묘지명, 예인수 묘지명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군, 예소사, 예인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양식의 형태를 띄는 점을 통해 볼 때 백제의 예씨가 정말로 삼국지의 그 예형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중국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무령왕이 최측근으로 중국계를 많이 기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예식진은 누구인가?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와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겨간다. 당초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나당연합군은 고대국가의 전쟁형태인 영토 획득 전쟁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백제 멸망을 목적으로 한(수도인 사비성을 집중 공략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3]
의자왕은 백제의 모든 지방군들을 동원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고 15만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그대로 아사시키는 전략을 위해 사비성을 빠르게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은 수비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지에 있는 웅진성이 보다 수비에 용이했다. 게다가 백제 귀족들이 비록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수백년간 달고 살아온 간판을 한 순간에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4] 의자왕이 백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과 대립해서 갈등의 골이 커졌다고 한들, 서로의 피로 피를 씻어온 적국인 신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백제 안에서는 유력한 귀족으로 권력의 핵심과 가까운데 존재하지만, 신라에 항복하면 수많은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는 골품제가 있어 타국가들보다 더욱 심했다. 백제 유력 귀족들은 신라에서 진골은 커녕 6두품으로도 못 들어가고, 5두품 이하만 받았다.[5]
이런 모든 계산하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겨 버티기 작전을 구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설대로 백제군이 애초에 장기전을 노렸다면 성충의 간언대로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은 뒤 양군의 합류 자체를 저지한 뒤 시간을 끌었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는 당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신라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피난 움직임은커녕 본격적인 전략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백제의 초기 대응은 완전히 실패였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했다면 급박한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해 옮겨갔을 것이지, 처음부터 장기전을 노린다는 대국적 전략을 수행하려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단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던 백제군 수천을 격퇴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기벌포가 금강 하류라고 해석한다면 합류지연을 노리고 요격하기는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보다는 요격 방식이 문제였다. 즉 1안은 당군이 상륙 자체를 못하게 막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안이었고, 2안은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물러가게 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 2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은 당군의 수륙병진에 박살이 나서 기벌포의 방어선은 그대로 돌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긁어모아 야전에서 당군과 맞섰으나 대패했다. 즉 백제의 초기 방어 전략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의자왕이 대국적인 전략을 위해서든, 급한 불을 끄기 위함이든 웅진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한 이상 곤란한 것은 나당연합군 쪽이었다. 웅진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비축된 물자도 있었고, 벼랑과 강으로 삼면에 둘러싸여 있어 군사적으로 제대로 공략 가능한 곳은 사실상 한 면 뿐인 천혜의 요새로서 아무리 대군을 몰고 닥돌해도 하루아침에 점령하기 힘들었다.[6] 또 고구려라는 변수도 있다. 당이 요동을 건드리는 양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입장에선 바다를 건너온 당의 13만 대군을 그냥 두고보진 않았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동맹이라는 고구려가 뭔가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건 백제가 너무 빨리 항복해버려서 끼어들어 뭘 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실제로 좀 늦었긴 해도 백제부흥운동과 맞물려 신라 북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으니 그것이 660년의 칠중성 전투, 661년의 술천성 전투와 북한산성 전투였다. 이 전투들은 신라군의 주력이 백제 땅에 있는 것을 노려 방비가 허술해진 신라령 경기도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신라군이 백제부흥군 토벌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이 공격은 신라 측의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의 철벽수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남하한다면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특히 소정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7]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
3. 예식진? 예식?
예식진과 비슷한 이름의 예식(禰植)이란 인물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언급된다. 예식은 예식진하고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이는데, 식(植)이라는 이름이 예식진의 원래 본명이거나, 혹은 그의 자(字)로 추정할 수있다.[8]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이민족 출신들의 공로는 김일제에 비교되곤 했다. 그런데 예식진이 세운 공이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표현으로 결국 예식진이 세운 위대한 공은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군에게 넘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데리고"라는 의미로 쓰인 한자 "將"은 강제로 끌고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큰 공의 정체였다는 주장이다. 비록 묘비명에 이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하나 정황상 그외에는 의자왕의 갑작스런 항복과 웅진성의 낙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기 나라 왕을 잡아서 적에게 넘겨버린 사실을 자기 묘비에 직접적으로 적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또한 백제의 예씨 가문 자체가 토착 가문이 아닌 중국에서 이주한 신흥귀족이다. 예씨 가문의 묘지명 마다 시기에 대한 기록이 달라 중국에서 백제로 정확한 이주한 시기에는 이견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때, 다른 지방 귀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백제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동질감도 낮았으며, 반대로 중국에 대한 친밀감은 타 귀족보다 비교적 높았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가족으로 형제인 예군이 있다. 역시 당에 항복하여 관직을 받았다.
4. 반론과 재반론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 및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글은 찾기 어려우며,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다.
- 또한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 경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가 되어, 《신당서》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혹은 함께) 항복하였다.' 라는 기술은 신당서, 구당서에 모두 기록되어있고[9] <<삼국사>> 신라본기에도 예식(예식진)이라는 이름만 없지 '웅진방령이 함께 항복하였다'라는 기술이 존재한다.[10] 따라서 위의 구당서(소정방열전)을 제외하고 예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다. 애초에 둘째문단에서 신당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구당서를 분석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셋째 문단에서 신당서와 구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 예식이라는 인물과 묘비에 기록된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 기록된 묘지명이 발굴 되었으며 이 중에는 아들인 예소사(禰素士)와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있어서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친 걸 대놓고 적고 있어서 그가 매국노임이 명확해졌다''' (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애초에 유명하지도 않던 적장 한 명을 (요새로 피신한) 적의 왕보다 앞에 기록한다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반론에서 말하듯 의자왕과 더불어(與) 항복했더라면, 예식진이 당나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도 이해가 안된다. 공적이 있어야 벼슬을 받을 것 아닌가? 당나라 대장군이 단순히 항복했다고 주는 지위가 아닌 만큼, 예식진이 벼슬을 받을 만큼의 공로[11] 를 세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반론이고 뭐고 필요없는 일.
5. 평가
예식진이 나라를 팔아먹을 당시 백제의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의자왕의 신변이 무사한 가운데 난공불락인 웅진성까지 도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승리하고 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되고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이 백제 내부를 들쑤시는 상황에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식진의 배신을 그 당시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할 순 없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쳐들어 와 악전고투 끝에 더 버티기 어렵게 되어 항복한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왕을 사로잡아 항복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는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7월 18일 예식진의 배신으로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는 당나라가 상륙한지 고작 10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 고구려의 구원군과 백제 지방의 지원군들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12] , 왜국 또한 백제를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적 압박은 소정방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보급품을 배에 싣고 원정을 했기 때문에 한정된 양의 보급품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속전속결하지 않는다면 크게 곤란한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이러한 보급의 문제 때문에 이후 당나라는 17만 대군을 이끌고도 신라에게 패하게 된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볼 때,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의자왕의 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예식진의 이런한 배신은, 질 싸움인 줄 알면서도 나갔던 계백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계백을 따르던 5천 결사대와도 비교가 된다. 백제가 망하자 곧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왜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역사도 있다. 그리고 예식진은 배신의 대가로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대장군이 되기 까지 했다. 이 점은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 호의호식한 이완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예식진의 배신이 합리화 될 수 없는 까닭은, 나라가 망국의 상황에 처했다고 나라를 팔아넘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은 그 어느 나라에서나 분명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6. 예군[13] 묘지명의 일본 명칭 논란
예식진 묘지 발견 이후, 다시 예군의 묘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 일본(日本)이라는 글자가 존재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오늘날 일본의 국호는 원래 백제 땅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왜나라(倭國)에서 일본(日本)으로 국호 성립에 백제인들이 관여했다고 일본 고대사학계 권위자인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가 말했다. #
실제로도 예군(禰軍)의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해좌(海左:바다 동쪽)’ , '부상(扶桑:중국 전설에 나오는 아침해가 뜨는 나무)', 또는 ‘영동(瀛東:중국 동쪽)'으로 표기 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日本)은 본래 백제를 부르는 말이었다는 것.
원문을 보면,
라고 쓰여있다.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日本(백제)의 잔당은 왜국(扶桑)에 의지하여 처벌에서 도망쳤다. 고구려(風谷)의 남은 무리들은 신라(盤桃)를 등에 지고, 굳세게 저항하였다." [14]
도노 교수에 따르면, 묘지명에 기록된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중국의 주변 나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부상·풍곡·반도' 등 자연환경적 특징에 근거한 은유적 명칭을 썼는데, '''유독 일본만 공식 국호를 썼을리 없다'''는 논지다. 묘지명의 ‘일본’은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군의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문학학술원장은 이 같은 사실이 예군 묘지가 제작된 시점, 즉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다. 예군 묘지는 일본 국호의 성립이 678년 이후의 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란 것이다. [15][16] #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일본’이란 단어가 일본에서 생산된 용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며 일본의 국호 제정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의 지적인 역할을 추정케 해준다”고 말했다.
또한 <구당서>에 "일본국은 왜국의 다른 종족이다. 그 나라가 해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이라 이름하였다. 혹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해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혹자는 '''일본(日本)은 옛날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지역을 합병하였다고 말한다'''."[19] 라고 쓰여져 있다.
구당서에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말이 이때까지 이해가 힘들었는데, 여기서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을 썼으며,[20] [21] 이후 왜국의 지도층이 되어 일본을 정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7. 같이보기
[1] 현재 중국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실에서 보관중이다.[2] 예식진의 2살 위의 형[3] 영화 황산벌의 초반부에서 의자왕이 계백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4] 일례로 백제가 멸망한 뒤 지방의 귀족들과 잔존 왕족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신라에 완전히 합병된뒤에도 옛 백제지역의 "귀족" 유민들은 자신이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였다.[5] 이는 후에 신라 말기, 중앙정부에 반기를 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6] 웅진성의 견고한 방어력은 아이러니하게도 200년 뒤 통일 신라의 대규모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 이 때 김헌창의 장안국 군대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난공불락으로 꼽히는 삼년산성에서 방어전을 치르고도 순식간에 패배하는 등 '이렇게 못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졸전을 거듭했지만 웅진성에서는 신라 대군을 상대로 열흘 이상을 버텼다.[7] 바다건너 10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한 당의 입장에서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이상 고구려의 직접적인 참전뿐 아니라 고구려 수군(거기에 더해 백제 수군까지)에 의하여 해로가 위협받는다면 심각한 악재가 된다. 신라가 나당연합군 18만의 장기간의 보급을 제대로 대지 못한다면 당군은 적극적으로 끝장을 보려들기보단 적당한 선에서 협상하고 물러날 가능성도 높다.[8] 예식진의 형 예군(禰軍)의 자가 온(溫)으로 기록되어 있다.[9] 《구당서》권83, 소정방열전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신당서》권111, 소(蘇)열전 "其將祢植與義慈降"[10] 《삼국사》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8일조,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11] 예를 들면 배신해서 의자왕을 갖다 바친 것 정도.[12] 당나라가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는 속전속결 작전을 들고온 원인으로 추정. 당나라가 아무리 국력이 대단해도 당시 왕조의 힘으로는 바다건너 전선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없다.[13] 예식진의 2살 위의 형[14] 여기서, 고구려는 풍곡(風谷), 백제는 일본(日本), 신라는 반도(盤桃) , 왜국은 부상(扶桑)[15] 반면, 구당서 동이전과 삼국사기에서는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국은 왜의 다른 이름이다. 나라가 해가 머무는 곳에 있으므로해서 이름지었다. 혹자는 왜국 스스로 그 명칭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해서 싫어하기 때문에 일본(日本)으로 고쳤다고 말한다."(日本國者倭之別稱也 以其國在日處故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 이성시 원장의 말은 여기에 나오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틀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16]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은 '''701년''' 다이호 율령 이후에 쓰이게 된다.[17] 삼국사기는 구당서를 참조[18]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 250년이 지나 구당서를 지었으니 틀릴만 하다.[19]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20] 왜국은 난쟁이를 연상케하는 비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백제 유민 입장에서는 사용하기 싫었을 것이다.[21] 또한 일본 이라는 말은 해가 뜨는 곳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입장에서 봐야 일본섬의 위치가 해가 뜨는 동쪽이 된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타지역 사람이 일본으로 유입된 이후 왜국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