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물
1. 개요
백제의 인물들의 목록.
고대의 백제에는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했을 것이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대신 일본서기에 백제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잘 보면 삼국사기보다 많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서 그 기록이 굉장히 부족하다.[1] 덕분에 백제사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편이다. 그런데 어째 고구려보다 남아있는 인물 숫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일본서기 덕분이다. 일본서기가 없었다면...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발해, 가야의 인물 기록도 상당한 비중을 일본의 기록에 할애하고 있는 등 한국 고대사에 있어 일본 사료의 비중은 결코 무시 못한다.
구분기준은 가나다순. 왕은 백제/왕사 참조.
2. 인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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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ㄱ
2.2. ㄴ
2.3. ㄷ
2.4. ㄹ
2.5. ㅁ
2.6. ㅂ
2.7. ㅅ
2.8. ㅇ
2.9. ㅈ
2.10. ㅊ
2.11. ㅋ
2.12. ㅌ
2.13. ㅍ
2.14. ㅎ
3. 테마분류
3.1. 재상
- 260년 고이왕의 관등정비[6] 이후 좌평[7] 직이 신설되고 내신좌평[8] 이 수석 좌평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했으나 408년 상좌평이 새로이 신설되어 좌평들의 좌장으로서 정사암 회의를 관장하고 나랏일을 총괄하였다.[9] 이후 사비시대 후반부터 언급되는 대좌평직은 일반적으로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상좌평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 내신좌평 역임자
- 상좌평 역임자
- 부여신(408~429)-최초의 상좌평[10]
- 해수(429~455)
- 부여문주(455~475?)-훗날의 문주왕
- 사택기루(6세기 중반)
- 사택지적(?~654?)
- 사택천복(?~660)-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상좌평)
3.2. 명장
- 기록에서 얼마 남지 않은 백제의 인물 중 백제의 장수로서 주목할만한 군사적 성과가 기록된 인물
4. 참고 항목
[1] 일례를 들자면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50여 편 중에서도 백제인의 열전은 고작 3개 정도에 불과하다.[2] 일본서기에는 누리시치케이(ぬりしちけい)라는 훈이 달려있다.[3]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으로 보며, 근구수왕 이전에 도모왕을 제외하고 1명의 왕이 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 다만 이 인물이 백제인으로 밝혀진 건 묘지명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5] 전국시대 다이묘 가문 중 하나인 오우치(大内) 가문이 이 사람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6] 허나 이후의 기록이 앞당겨진것 이라며 추측되며 근초고왕 시기때 비로소 관등 정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내용은고이왕 문서를 참고 바란다.[7] 현대의 장관에 대치되며 중국 6전제의 영향을 받아 6좌평제로 체계화되었다.[8] 왕명 출납을 담당했으며 현대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치된다.[9]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기존의 6좌평과 별개의 존재로 왕이 측근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고, 기존의 내신좌평 동일하게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10] 내신좌평 부여신과 동일인물.[11] 충성과 공로를 다하여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 데 대한 논공이 있고 시무를 보좌하는데 무공이 뛰어났다는 공로로 백제로부터 중국 남제에게 관직의 제수가 요청되어 남제로부터 삭녕장군에 임명됐으며 백제의 제후왕으로서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웅진 천도 당시 이탈한 지방세력들을 복속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리라 추측된다.[12] 목간나,사법명,찬수류,혜레곤으로 모두 490년 북위의 침공에 맞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다. 이 중 목간나는 유일하게 과거에도 군공이 있고, 선박과 성문을 때려 부수었다는 구체적인 군공의 설명이 있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이전의 다른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던 명장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