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족

 

1. 개요
2. 성향
3. 사회문제
4. 현재의 오렌지족
5. 미디어에서의 오렌지족



1. 개요


1990년대 X세대와 관련있는 사회 용어이며, 주로 강남구의 부유층 자녀들이 압구정동 등지에 형성하여 기존 세대에 충격을 준 서브컬쳐 집단을 일컫는다. 최초에는 압구정에 모여들었던 부유층 젊은이들의 문화를 일컬었으나, 이후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어 소비적 문화에 열중하는 철부지 성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공식명칭은 '''수입 오렌지족'''이라고 하는데 특히 방학기간, 혹은 졸업 후 귀국한 부유층 유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소비문화는 서구적 문화를 동반했는데, 80년대에 바나나가 그랬듯이 90년대에는 오렌지가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어원에 관해서는 첫째로 서구적 과일이라는 상징성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수입 맥주에 라임이나 오렌지 슬라이스를 넣어 먹던 유행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로 주로 한인이 많이 사는 LA, (오렌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유학생들이 많아서 이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는 실제로 미국 이민 초창기 한인들[1]의 주요 일터가 오렌지 농장이기도 한 바에 기인한다.
"오렌지족"이라는 명칭이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비문화도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들의 소비문화 역시 중요한 측면이다. 다만 오렌지족이 사치를 한 예라고 해 봤자 고급차[2][3], 양담배, 양주 정도가 전부로써 오히려 요즘의 명품 문화가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오렌지족이 사회에 충격을 불러왔던 이유는 그들이 최초로 소비 문화에서 자아를 찾았던 세대라는 점 때문이다. 즉, 부모 세대가 놀란 점은 그들이 경제를 일으켜 세우거나 정치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쓰고 노는 것'''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경제, 정치에 이어 문화에 열중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 이 현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피땀 흘려 돈 벌고 키워 놨더니 아들딸들은 펑펑 쓰기만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90년대 X세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는데, 오렌지족은 이의 첫 첨병이었던 탓으로 미디어에 특히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난 면이 없지 않다. 오렌지족의 유흥 및 소비 행태는 오늘날의 강남이나 홍대 앞 클럽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성문화에 대한 설명만 들으면 마치 당시의 압구정에 술집과 나이트만 즐비했을 것 같지만, 실은 당시의 압구정은 커피, 와인, 컬렉터 샵, 판금된 음악, 갤러리 등의 문화가 움트는 곳이었다.
이들이 사회와 충돌하는 접점이 있었던 이유는 6.25 이후 갖은 노력으로 경제를 부흥시킨 부모 세대 및 독재정권과 사투를 벌여온 형-언니 세대가 보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자기가 번 돈이 아니라 부모의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압구정의 경우 유흥 문화와 성문화 등 일시적 쾌락과 허무주의에 집중하는 면이 분명히 존재했고, 비슷한 시기 홍대 앞의 게릴라 문화와는 달리 자생적, 창조적, 생산적인 면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일면이야말로 오렌지족이 당대 세기말의 아이콘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 2010년대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오렌지족에 대해 많이 생소한 듯하며, 당시의 오렌지족들이 지금은 이제 40대의 경제 참여세대로 접어들었고 그들의 젊은 시절이 이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때와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유학을 가는 경우는 그대로지만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소비율이 줄어들거나 긴축을 하는 등 그 시절 젊은 세대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까지는 IMF 구제금융 지원이 있기 3년 전의 일이었고 경제도 호황기였던 때였기 때문에 일부 세대를 중심으로 과소비 풍조가 늘어났던 시절이라 사회문제가 되었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과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 전반적 용어인 '''X세대'''와 미디어의 일부 부정적 인식이나 혹은 압구정동의 일부 부유층 서브컬쳐를 일컫는 보다 좁은 의미의 용어인 '''오렌지족'''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2. 성향


오렌지족들은 당시 기준으로 20대가 대부분이었지만 10대 후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제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미국 등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는 공부나 학습보다는 오히려 외국땅에서 막장놀이나 탈선 그리고 성추행 등 온갖 추태로 말썽을 저지르는 사례가 있었으며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까지 외국에서의 추태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부모들에게 속앓이를 안기게 하였고 이것은 90년대 사회문제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극도로 일부는 마약에도 손을 대기도 하였는데 별다른 죄 의식 없이 마약을 투여하면서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마초나 담배도 거리낌없이 피워대는 악습도 보였다.[4]

3. 사회문제


오렌지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당시 좋아진 경제호황기와도 맞물렸을 뿐 아니라 해외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풍습과도 맞물려서 결국에는 90년대 최대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부모세대들은 이들이 유학을 떠나서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지만 일부를 제외하고 일부는 공부나 학습보다는 아예 외국물을 먹게 되어서 새로운 방탕과 탈선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사례를 그리기도 하였고 결국 이러한 습관을 귀국 후에도 이어나가서 국내에서까지 미국 등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수준이었다.
특히 서구문화와 신세대 문화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빠지게 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무시하고 옛 것은 고리타분하다거나 요즘 말로 구리다거나 캐캐묵은 늙은이들 문화라고 비하하며 이들 문화를 철저히 외면하였다.[5] 그리고 스타일도 남이 보기에는 지나쳐 보이는 문신에 온갖 고급 장신구 등으로 장식을 해대거나 고가의 옷을 사 입으며 돌아다니는 등 사회문제로 대두될 정도.
그 당시 부모세대들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없었던 문제거리이기도 하였다. 자신들은 과거 젊은시절을 모두 노동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이들의 기여가 이렇게 한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서 자녀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는데 일부 철부지 자녀들을 중심으로 경제 호황기를 악용하여 과소비를 부추기고 심지어는 탈선과 추태를 보이는 등 자신들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행태 때문에 속앓이를 앓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당시 많은 오렌지족들은 언론의 지탄을 받고 사회 악 취급을 받았다. 물론 '''실제로는 이들의 구매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어딜가든 이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성업중인 강남의 클럽에 경찰과 국세청직원들이 일제 단속을 벌여 전원 마약검사를 한다거나 마약음성검사가 나온 무고한 청년이더라도 부모가 신분보증서를 경찰에게 써주어야만 풀어주었다. 또한 국세청에서는 오렌지족 부모들을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한다며 엄포를 놓기도 하는등 시민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연좌제식 처벌운운하기도 하였다.
1994년 당시 23세로 부모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렀던 희대의 패륜아 박한상도 한때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 곳에서 노름과 방탕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귀국하게 되고 결국에는 부모를 살해함으로서 오렌지족과 연계되는 문제로 비화 되어서 반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현상으로 야타족이 있었다.

4. 현재의 오렌지족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느새 20대였던 이들도 이제는 40대에 부모세대로 접어들었다.
오렌지족은 '''압구정동의 극소수 부유층 자녀들'''을 일컫는 용어였으며 언론에 의해 부정적 측면이 확대화되었다. 만일 부모님들에게 묻는다 해도 십중팔구 '...그게 뭐더라? 아 맞다! 90년대 신문에서 강남에 그런 놈들이 있다고 떠들어대기는 했는데 실제로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라는 의사를 보일 것이다. 부모님 세대의 청춘 문화[6]를 가리키는 보다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사회용어는 X세대다.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 사면서 엄청난 사치라고 덜덜 떨었고, 수입 음반 몇 개 모은다고 과소비라고 비난받던 것이 대부분의 X세대의 실정이다. 부모님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 등등의 수단으로 자기가 스스로 벌거나 용돈을 저금하여 사기도 했던 점은 지금의 청춘들과 똑같다. 오렌지족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여 당시의 젊은이들이 무슨 대단한 사치를 했던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오렌지족이었던 부유 계층은 이를 흑역사로 여기기는 커녕 IMF 때 부동산 등으로 더욱 축적된 부[7]를 부모 세대에게서 물려받고 이제는 명품족이나 강남 상류층이 되어 여전히 소비를 일삼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오늘날도 오렌지족과 비슷한 소비문화와 사치를 향유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모습은 소비를 악덕으로 여기지 않게 된 사회에서 90년대만큼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한때 희귀성으로 인해 이러한 금단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던 과일인 오렌지가 이제 대형 마트에 대량으로 쌓여 모두가 사가는 대중적 과일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런 오렌지족의 성향이 근래에는 더욱 대중화되었다. 수많은 패션, 유흥에 관한 서브컬쳐들과 수입 사치품의 대중화 등은 모두 이들로 부터 비롯되었다. 다만 대중화되면서 긍정적인 면도 있는데, 아르바이트나 저축 등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이런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부모 세대들이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일구어낸 성과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서구문화와 융합되는 경우도 있다.
당시 돈도 없으면서 오렌지족을 흉내내는 아류 집단 '낑깡족'이 있었다. 이들은 짝퉁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하고 고급차를 타고다니기는 하는데 자기 차가 아닌 렌트카를 이용했기 때문에 번호판이 '허'로 시작했고, 압구정동 등지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5. 미디어에서의 오렌지족


90년대 초중반, 그러니까 1997년 외환 위기를 맞기 전까지의 풍요와 방탕을 누렸던 당시 오렌지족들을 다룬 이야기는 시나 소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세기말적 분위기와 맞물려 일종의 퇴폐주의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하의 시집으로 시작해서 직접 감독을 맡아 영화까지 제작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와, 영화사 내부의 문제로 개봉이 차일피일 연기되다가 전설의 작품으로 남은 비상구가 없다가 당시 압구정동 젊은이(들과 오렌지족)들의 세태를 잘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2001년에 발매된 싸이의 1집 앨범 Psy from the Psycho World의 몇몇 곡을 들어보면, 전(?) 오렌지족으로 짐작되는 싸이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성공의 어머니" 트랙은 부모님의 돈으로 독일차를 타며 놀이문화를 향유했던 과거와 그간 느낀 점이 담겨 있으며, "Upskail Phenomenon" 트랙에는 대놓고 '난 오렌지, Driving Mercedes'란 가사가 나온다.
1997년에 나온 캠퍼스 러브 스토리라는 게임에서 주인공의 유형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
임창정 주연의 영화 엑스트라에선 가짜 검찰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임창정에게 당시 도로의 무법자처럼 군림하던 오렌지족을 하천에서 똥물에 목욕을 시키는 응징을 당하기도 했다.
1997년을 배경으로 한 2018년작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류덕환이 맡은 역할이 오렌지족이라는 설정으로, 엔딩크레딧에도 배역명이 '오렌지'라고 뜬다.
[1] 안창호를 예로 들 수 있다.[2] 슈퍼카는 아니다.[3] 당시만 하더라도 모터리제이션이 갓 자리잡은 상태이기 때문에 중형차인 쏘나타만 하더라도 고급차로 취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압구정에서 스쿠프는 현재 BMW 4시리즈 컨버터블, 콩코드나 쏘나타는 벤츠 E클래스, 각그랜저는 벤츠 S클래스 정도의 위상을 가졌었다. 물론 외제차는 연식 크기 배기량 가격 브랜드 상관없이 무조건 롤스로이스 팬텀이나 벤틀리 플라잉스퍼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4] 이는 사실 한국의 마약 관련 법에 비해 미국이나 유럽의 마약 관련 법안이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에게 마약은 단순히 파티나 즐거움을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 한국처럼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중범죄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 사실 한국도 70년대 초반까지는 단순투약자들을 심각하게 처벌하지 않았다.[5]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한국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한국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정석이라 할 수 있고, 서구권에서도 수백년간 다른 문화권과 문화를 융합하는 형식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오렌지족은 철저히 한국 전통문화를 무시했다는 것이 문제이다.[6] X세대 (1971 ~ 77년 생) 2세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나타나고 있다.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초혼 연령이 늦어져서 X세대 2세들의 연령대가 넓어졌다. 참고로 에코 세대의 끝이자 현재 결혼 적령기인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구성하는 83 ~ 87년생 중에서 미혼 남성은 85%, 미혼 여성은 70%이다.[7] 부동산 폭락은 전세와 대출을 반복하여 무리한 구매를 한 계층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겨주었고, 그렇게 저가 매물이나 경매로 나온 매물들은 대출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계층에게 넘어갔다. 이윽고 그 저가 매물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대폭등을 시작했으며, 이는 정부에서 집값 잡는다고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실시하는 것에 국민들이 대부분 반대하는 현상을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