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정

 

'''임창정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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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대상 대상'''
김건모
'''스피드'''
(1996년)

'''임창정
그때 또 다시
(1997년)'''

H.O.T.
'''빛'''
(1998년)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류승범
(2007년)

'''임창정
(2008년)'''

주진모
(2009년)






<colbgcolor=#595959><colcolor=#FFFFFF> '''임창정
任昌丁 | Im Chang-Jung'''
'''출생'''
1973년 11월 30일 (51세)
경기도 이천군 백사면 송말리[1]
(現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송말리)
'''국적'''

'''본관'''
풍천 임씨
'''신체'''
168cm, 62kg, B형
'''가족'''
부모님, 1남 3녀 중 셋째
'''배우자'''
서하얀(1991년생, 2017 결혼 ~ 현재)
'''자녀'''[2]
아들 임준우(2006년 8월 18일생)
아들 임준성(2008년 2월 1일생)
아들 임준호(2010년 12월 19일생)
아들 임준재(2017년 5월 10일생)
아들 임준표(2019년 11월 9일생)
'''학력'''
이천남초등학교 (졸업)
이천중학교 (졸업)
이천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영상학 / 중퇴)
'''직업'''
가수, 배우, 코미디언, 사업가
'''병역'''
사회복무요원 소집해제[3]
'''종교'''
개신교무종교[4]
'''소속사'''
예스아이엠엔터테인먼트
'''데뷔'''
1990년 영화 〈남부군
'''특기'''
작사, 작곡, 모든 운동, 남도창, 모창
'''별명'''
'''만능 엔터테이너''', 나창정[5], 창정이형[6], 갓창정, 킹창정, 심형래, 임착한, 임번복, 임꺽정, 임아빠, 대표님[7]
'''링크'''
, , , [8]
1. 개요
2. 설명
4. 가창력
5. 연관된 작곡가들
5.3. 원상우
5.4. 이동원
5.5. 멧돼지
6. 활동
6.1. 영화[9]
6.3. 공연
6.3.1. 뮤지컬
6.3.2. 콘서트
6.3.3. 컴백 쇼케이스
6.5. 광고
6.6. 홍보대사
8.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가요계와 영화계, 그리고 예능계를 모두 종횡무진 누비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2. 설명


1980년대에 김창완, 전영록 등이 활약할 때부터 개념은 존재했지만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었던 ''''멀티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사실상 최초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멀티엔터테이너로서 가수, 예능, 연기 세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사람 중 임창정과 비교할 만한 사람은 엄정화, 그리고 최근으로는 이승기 정도뿐이다. 이후 연예인들이 여러 분야를 병행하는 케이스는 몇배 이상 늘어났고,[10] 성공을 거둔 연예인이 가끔 나오긴 하지만 이들 중 아직 그의 경지까지 올라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가요계에서 주류이면서도 영화계에서도 꾸준히 주연급으로 출연해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보면서 정상급의 위치를 굳히도록 성장했으나 다른 멀티 엔터테이너들은 가요, 연기, 예능이든 적어도 한 분야에서는 그의 최고 커리어에 도달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재다능한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11]
멀티 엔터테이너의 라이벌로서 엄정화김민종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래로는 대부분의 지표에서 임창정이 앞선데다 아직까지도 차트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점에서 꾸준함으로도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12] 연기 쪽에서는 김민종은 드라마는 잘됐지만 영화는 아쉽고, 엄정화는 흥행, 수상경력 등 임창정보다 급이 더 높아 두 분야를 종합하면 비등하다 할 수 있다. 다만, 임창정은 예능에서도 메인 출연자로 활약하며 노래 • 연기 • 예능의 세 분야에서 정상에 선 경험이 있는 '''트리플 멀티 엔터테이너''', 즉 만능이라는 점에서 더욱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3. 이력




4. 가창력


연기력이나 예능감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임창정에게는 돋보이는 능력은 물론 가창력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에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국내 최정상급의 가창력'''을 지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며, 내는 곡마다 대히트를 치면서 국내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이크를 배나 가슴팍에 대고 불러도 무대를 빈틈없이 꽉 채우는 '''무지막지한 성량'''과 0옥타브 중반대에서 3옥타브 중반대까지 발성하는 '''넓은 음역대''',[13] 특히 국내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 '''속이 꽉찬 고음''', '''폭발적이고 진솔한 감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발라드 히트곡들을 만들어냈다.
임창정은 기본적으로 공간을 어느정도 좁힌 채 강한 호흡의 힘으로 그대로 질러내는 발성 스타일을 갖고 있다.[14] 이는 임창정이 판소리의 창을 수련했던 경험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판소리처럼 극한으로 소리를 짜내는 수준까진 아니고 대중가수들 중에서는 어느정도 목을 좁힌 채 호흡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보컬. 물론 2014년 이후로 전보다 공간이 넓게 쓰긴 하지만 여전히 특유의 스타일은 유지하고 있다.[15] 아래 후술하겠지만 호흡을 잘 사용하는 것이 발성적으로 임창정의 최대 강점인데, 단순 호기 흡기를 잘해내는 것 뿐 아니라 지속적이고 적당한 수준의 호흡압력을 성대에 때려줌으로서 접촉을 강화하고 얇은 접촉면적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임창정이 라이브에서 선보인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미(E2)[16]~3옥타브 미(E5)'''[17]까지로, 연습 중에는 조금 더 높은 음까지 올라간 적 있다고 한다.[18][19] 현재로서는 '''3옥타브 레♯(D♯5)''' 정도까지는 낼 수 있는 듯하다.[20] 여러모로 굉장한 음역대. 더불어 타고난 테너 성종[21]에 소리 자체가 강해서 고음 질감에서는 웬만한 보컬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을 자랑한다. 더불어 3옥타브 대에서 말도 안되게 높은 진성비율을 유지하며 동시에 일정한 배음을 전 음역에서 가져가 소리가 굉장히 탄탄하고 잘 잡힌 느낌을 준다. 게다가 하이톤임에도 음색이 두꺼우며 강해서 저음부도 강한 몇 안되는 테너.
더불어 호흡을 굉장히 잘 사용하는 가수 중 하나다. 본인이 항상 강조하는 소리를 낼때 호흡을 내뱉는것을 상당히 중시하는데, 이는 발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훈련과 연습을 통해 호흡근과 폐활량이 워낙 발달해있고, 소리와 함께 운용하는 방식도 워낙 정교해서 전문가들이 임창정 보컬에서 기술적인 부분으로 많이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22] 더불어 흉곽을 매우 잘 이용하는데, 가령 2옥타브 후반대에서 'ㅏ' 나 'ㅔ' 발음을 내지를때는 흉곽을 다소 좁힌 뒤 강하게 발리며 호흡 에너지를 사용한다. 따라서 성대 접촉은 강하나 목이 조이지 않게되는데, 때문에 소리 배음이 매우 안정적이고 성대도 일정하게 잘 붙어있으며 속칭 알맹이 있는 소리가 된다. 특유의 미친 성량과 짱짱한 소리도 이 뛰어난 호흡 운용과 큰 관계가 있다.
그러나 임창정이라는 가수가 가장 높게 평가받는 부분은 발성적, 테크닉적 완성도가 아니라 엄청난 고음역의 노래를 매끄럽게 소화하며 동시에 그 고음에서 말하듯이 가사를 전달하는 '''표현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연기자 출신인 그가 다른 가수들에 비해 가질 수 있는 이점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는 것. 특히 노래 중간에 비치는 애절한 표정연기는 보는 사람의 감정을 더욱 잘 이끌어낸다.
그의 유니크함이 드러나는 점은 거의 생목에 가까운 벨팅을 사용한다는 것도, 꺾는 창법이 가미된 발라드를 부른다는 것도 아닌 남들은 중저음에서도 어려워하는 '말하듯이 부르기'를 엄청난 고음역대에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남들은 그냥 내기도 힘들어하는 고음역대에서도 모든 발음이 또박또박 확실하게 들려온다.
또한 임창정은 어렸을때 창을 배웠기 때문에 음의 널뛰기나 꺾기가 자연스러운데, 이런 이유로 임창정의 노래는 그가 아니면 느낌이 안 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표곡 중 하나인 나란놈이란 같은 경우만 봐도 수많은 커버 영상이 있지만 임창정 특유의 꺾기가 가미된 고음이나 멜로디 타는 능력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23]
과거에는 임창정이 생목 가수라는 오명을 쓴 적도 있지만[24] 2014년도에 전국투어 콘서트를 다닌다거나 '그때 또다시'를 여자키로 올려 부른다거나[25] 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이런 오해는 벗겨진 지 오래. 대신 고음에서도 성대접촉과 배음을 유지하여 음색이 변하지 않는 가수로서 높게 평가받는다.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과일가게 주인에게 소리를 지르는 부분이있는데 이때 낸 음이 '''3옥타브 레(D5)'''(...)
나란놈이란으로 활동할 때부터 창법에 변화가 생겼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고 정확히는 12집 흔한 노래로 활동할 때 부터이다. 확실히 나란놈이란으로 복귀했을 당시 전과 비교해 목소리가 두꺼워졌고, 더군다나 노래 자체의 음역대가 이전의 임창정 노래에 비해 낮은 편[26]이어서 그런지 더욱 안정적인 라이브를 선보여 창법 변화가 이때부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때 역시 임창정은 후두가 조이고, 불안정한 자세로 노래를 부르는, 복귀 이전의 버릇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창법이 변화된 것은 12집 활동부터. 타이틀곡인 흔한 노래가 '''3옥타브 도(C5) ~ 도♯(C♯5)'''에 해당하는 고음을 길게 질러야하며 그외에도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이 클라이맥스에서 연이어 터지는 헬곡이다보니 이를 안정적으로 소화하고자 발성을 훈련하고 창법을 개선한 것이다. 그 증거로는 이 당시 임창정 펜카페에 임창정 본인이 발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게시글을 올린 흔적이 있다. 교정 이후 확실히 후두의 위치와 발성 자세가 안정화되고, 고음 시 턱을 당긴다거나 성대를 꽉 눌러붙이는 등 가수들 사이에서도 좋은 편에 속하는 발성능력을 얻게 되었다. 날 닮은 너의 창법 변화 전과 후의 라이브 영상을 이어붙여 비교한 영상을 보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이 영상에서 창법 변화 후 영상으로 나온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송분은 레전드 라이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3옥타브 도♯(C♯5)'''에 이르는 고음을 단단한 성대접촉 질감을 유지하며 질러내는, 발성적인 전성기를 맞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018년 9월 19일, 14집 발매 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여 '내가 저지른 사랑'을 무려 '''3키'''올려서 소화했다. 그렇다는건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에서 '''3옥타브 레(D5)'''가 8번 난사된다는건데 음이탈 하나 나지 않고 진성으로 말끔히 소화했다.[27]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행사들이 취소되어 목을 아껴서 그런지 매우 좋은 목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5. 연관된 작곡가들


은퇴 전까지 정규 앨범만 10장을 발매하면서 수많은 작곡가들과 작업을 했다. 이 문서에서는 그 중에서도 임창정과 많은 작업을 하거나 임창정의 노래를 언급하는데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작곡가와의 음악적인 면에서 임창정과의 관계를 서술한다.
먼저 작곡가들을 언급하기 전에 음악적인 면에서 임창정의 음악적 특징과 스타일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는데, 임창정 본인의 음악적인 색깔은 대중적인 색깔과 조금 거리감이 있다.[28] 임창정이 작곡한 대부분의 곡들은 음악 자체적으로 기승전결이 다른 대중적인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뚜렷하지 않으며, 한 소절 이후 다음 소절에 어떤식으로 노래가 진행이 되는지 예측하기 꽤 어렵다.[29] 임창정 특유의 스타일은 그의 창법에서도 드러나는데, 본인이 가장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창법은 서정적 발라드보다 트로트에 가깝다. 이러한 창법들로 인해 90년대 이후 대중이 선호하는 서정적 발라드에 꼭 맞는 창법을 지닌 가수는 아니라는 점. 물론 임창정 정규 앨범 수록곡중 모든 곡들이 임창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30] 그만큼 임창정 본인의 임창정스러움과 대중적 필요를 둘 다 충족시키기는 작곡가 입장에서 어려울 수 있다.[31]

결론적으로 임창정 본인의 스타일을 (첫 번째 은퇴 이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곡에서 1) 고음이 여실히 드러나야 하며[32] 2) 특유의 꺾는 창법이 요소요소 잘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는 90년대 이후 대중적 발라드가 (고음 제외) 추구하는 바와는 상반된다.

5.1. 김형석


임창정하면 당연 작곡가 김형석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임창정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곡가이다. 임창정을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성공한 발라드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장본인이자 3집부터 5집까지 임창정 앨범을 총괄 프로듀싱했으며[33], 이후 조규만이 앨범 프로듀싱을 맡은 이후에도 8집의 '기다리는 이유'와 9집의 '슬픈 혼잣말'이라는 명곡 타이틀들을 2번이나 내놓은 작곡가다.
임창정을 대하는 김형석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각 시대 대중이 원하는 발라드의 이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것이며 임창정이란 가수를 활용함으로서 대중에게 어떻게 어필할지를 아는 작곡가였다는 것.[34]
임창정 스타일의 발라드를 완성시켰다고 말해도 될 만큼 임창정 전문 작곡가의 자질을 원없이 보여줬다. 가끔 임창정 본인의 음악적 색깔을 극대화시킨 작곡가는 아니라고 단점을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위에 언급 되었듯이 김형석이 작곡한 발라드가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이러한 평가들은 주관적인 견해가 섞이기 마련이다. 다만 결론적으로 김형석이 다른 임창정 곡들을 써낸 작곡가들보다 더욱 빛나는 영역은 바로 임창정의 목소리를 통해 임창정만의 전통 발라드를 완성시켰고 특유의 슬픈 감성이 잘 묻어나오는 명곡들을 만들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담으로 세바퀴에서 밝혀지길 김형석과 임창정의 첫 만남은 노래방에서였다. 옆방에서 너무 노래를 잘해서 김형석이 양주 한 병을 들고 찾아갔는데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임창정이여서 이 사람이 이렇게 노래를 잘했나? 하고 놀랐으며, 꼭 작업을 같이 하자고 연락처를 교환했다고 한다. 다만 김형석은 임창정이 당시 자신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당시 임창정도 작곡가 김형석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35]

5.2. 조규만


김형석이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작곡가라면 조규만은 본인의 색깔이 뚜렷하면서 (가장 정형화된 발라드 스타일) 그 색깔 자체가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이라 작곡가중에서도 못해도 중박 이상은 치는 작곡가다. 5집까지 김형석의 시대가 끝나면서 6집부터 임창정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기 시작했는데 6집부터 그가 임창정에게 선물한 곡들은 임창정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주옥같은 곡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3집 'Summer Dream', 6집의 'Smile Again', 7집의 '그대도 여기에', 8집의 '너에게 모자란 나' 같은 곡들. 하지만 조규만 스스로의 스타일이 너무나도 확고하면서도 그 확고한 스타일이 임창정과는 극인지라 노래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임창정 본인의 스타일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않았던 작곡가. 조규만 작곡의 곡들을 들어보면 임창정보다는 예전 전성기의 조성모에게 더욱 더 어울리는 곡들이 많다. 조규만의 음악적 성향과 임창정의 그것이 극이라는 것은 임창정이 조규만 곡을 라이브로 부를 때 특히 잘 드러난다. 녹음과는 달리 본인 특유의 음악적 성향을 감출 수 없는 공개 무대 라이브에서 부른 조규만 작곡의 'Smile Again' 후렴부를 들어보면 녹음곡과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임창정 특유의 꺾는 창법에 주의하면서 들어보자.# 물론 임창정이라는 가수가 임창정스러움을 버려두고라도 감정적으로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가수라 조규만과의 작업이 결코 나쁘지는 않았으나 점점 임창정스러움이 김형석 시절보다 더 억압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형석 못지않게 임창정과 많은 작업을 한 작곡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작곡한 곡들은 단 한번도 타이틀곡으로 선정되지 못했다는 점. 임창정에 대해서는 콩라인이다. 6, 7집에서는 갑툭튀한 원상우에게 밀렸다면 8집 이후에는 다시 임창정과 작업한 김형석에게 밀려버렸다...[36] 그 후로 타이틀곡에 미련이 없어졌는지 9집이후 조규만 곡들은 8집 보다는 퀄리티가 떨어지는 편.(갓조언 의문의 1패)
다만 그가 총괄했던 음반중 6집이 임창정 팬들사이에서 주로 최고의 명반으로 뽑힌다는 점에서 임창정의 은퇴 이전 후반부의 가수 인생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사실. 사실 조규만의 곡 색깔과 임창정 본인의 색깔이 안 맞았을 뿐이지 조규만 작곡의 곡들은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다만 조규만은 6집 이전에도 임창정과 같이 작업한 적이 있다.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지는 않았지만 3집의 "너를 잊기로 했어", "Summer Dream"은 조규만의 노래. 다만 이 노래는 기이하게도 6집 이후 조규만 작곡 노래들과는 달리 임창정스러움이 많이 묻어난다.
'''김형석과 조규만을 거치면서 예전 가장 임창정스러웠던 모습을 대중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작곡가는 없으리라 예상했으나...'''

5.3. 원상우


김형석이 앨범을 총괄하던 시대가 끝나고 조규만이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 조규만의 시대가 오나 했지만... 갑툭튀한 원상우가 작곡한 곡들이 6, 7집의 타이틀곡으로 선정된다. 원상우의 곡들은 임창정 뮤직 유니버스에서는 신세계였는데 임창정 본인의 스타일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유일한 작곡가였던 점. 실제로 6집 나의 연인의 경우에는 가장 임창정스러움의 요소 (고음과 꺾는 창법)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들으면 깊이 빠져들만한 매력을 선사한다. 물론 조규만 곡에서도 임창정 특유의 꺾는 창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규만 곡이 임창정 창법을 억압하는 방향이었다면 원상우는 임창정을 최대한 지지하면서 어떻게 대중적으로 잘 어필할 수 있는지 아는 작곡가였다는 것.[37] 원상우의 곡이 임창정의 임창정스러움을 잘 표현하면서도 6, 7집 한정으로 조규만의 곡들과 비교했을 때 대중적인 면모가 부족하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임창정의 작곡가로서 원상우의 가장 큰 의의는 제일 처음으로 임창정스러움과 대중적 선호를 조화시키는 법을 아는 작곡가였다는 점.[3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원상우의 가장 큰 장점은 얼마지나지 않아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는데 7집이후 그가 임창정에게 선물한 곡들은 대중적인 요소가 많이 파괴된 면모를 보인다. (물론 임창정스러움은 더욱 부각되었을지 몰라도.) 즉, 임창정이라는 문맥안에서 원상우의 리즈시절은 6, 7집, 그 중에서도 6집이었다는 것. 7집 이후 임창정과의 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임창정 특유의 스타일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곡은 두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39][40]

5.4. 이동원



현재 임창정하면 가장 많이 회자되는 곡은 바로 '''소주 한 잔'''이고 이 명곡의 작곡자가 바로 이동원이다. 2016년 9월에 13집 타이틀 곡인 내가 저지른 사랑이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한 임창정이지만 꾸준히 임창정 이미지를 대표할 곡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소주 한 잔일 것이다.
사실 임창정 발라드 곡들이 대부분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소주 한 잔이 다른 곡들보다 왜 더 인기가 많은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이동원이 작곡한 2집의 혼자만의 이별[41]을 떠오르면 미칠듯한 고음과 일반인들은 도저히 커버가 불가능한 난이도 덕분에 대표적인 발라드 곡으로 자리잡지 못 하였다. 또한 실용음악이 그때 당시 거의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평균적인 일반인들 가창력이 현재보다 높지 않았고, 그렇기에 임창정 노래는 노래방에 가서도 부르지 못 하는게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소주 한 잔이 나오고 임창정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았기에 준수한 음 높이로 여러 남성들이 부를 수 있었고, 결국 이 난이도 조절이 소주 한 잔의 대중적 성공에 견인했다.
결국 2집 이후 김형석이 임창정을 인기가수로 견인하고 그 후 조규만이 후반 프로듀싱을 책임지면서 이동원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으나 은퇴 이전 마지막 앨범인 10집에서 소주 한 잔을 내세우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42] 일명 왕의 귀환. 이 후 소주 한 잔이라는 노래가 임창정이라는 문맥안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니 작곡한 곡수는 많지 않아도 임창정에게 있어서는 큰 도움을 준 작곡가.
이후 14집친구 10년 사랑 1년 등의 곡으로 도움을 주었다.
2020년 10월에 나올 정규 앨범 16집의 일부 작곡을 맡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 그러나 공개된 16집 트랙리스트에 이동원의 이름이 없어서 팬들은 의아해했다.

5.5. 멧돼지


그는 복귀 이후 계속 중박 이상의 성적을 내고 있었으나, 현재 젊은 층에게 그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현재까지의 전성기를 이어올 수 있는 데에는 멧돼지 작곡가의 공이 컸다. 12집부터 합류하여 "또 다시 사랑(2015)"부터 임창정과 동업하며,[43] "내가 저지른 사랑"(2016), "그 사람을 아나요"(2017),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2018), "십삼월(never ending)"(2019), "힘든 건 사랑이 아니다(2020)"을 히트시켰다. 공동작곡인 만큼 둘의 팀워크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 활동



6.1. 영화[44]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활동'''
'''관객수'''
'''흥행'''
1990년
남부군
조연[45]
37만명
성공
장미여관
단역
-
-
1992년
섬강에서 하늘까지
단역
-
-
걸어서 하늘까지
단역
-
-
1994년
게임의 법칙
단역
-
-
1997년
'''비트'''
조연
35만명
성공
1998년
엑스트라#s-3
주연
8만 2000명(서울)
실패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주연
20만명(서울)
실패
2000년
행복한 장의사
주연
12만명(서울)
실패
자카르타
주연
70만명
실패
2001년
두사부일체
우정출연
-
-
2002년
해적, 디스코 왕 되다
주연
130만명
성공
'''색즉시공'''
주연
420만명
성공
2003년
위대한 유산#s-3
주연
225만명
성공
낭만자객
우정출연
-
-
역전에 산다
특별출연
-
-
2004년
시실리 2km
주연
200만명
성공
2005년
파송송 계란탁
주연
110만명
성공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주연
254만명
성공
2006년
아치와 씨팍
주연
10만명
실패
2007년
만남의 광장
주연
130만명
성공
1번가의 기적
주연
275만명
성공
'''스카우트'''[46]
주연
31만명
실패
색즉시공 2
주연
209만명
성공
2009년
청담보살
주연
132만명
성공
2010년
육혈포 강도단
조연
123만명
성공
불량남녀
주연
49만명
실패
2011년
사랑이 무서워
주연
40만명
실패
2012년
비처럼 음악처럼
주연
미개봉
-
공모자들
주연
164만명
성공
2013년
창수
주연
43만명
실패
2014년
기술자들
특별출연
-
-
2015년
치외법권
주연
35만명
실패
2016년
대결
우정출연
-
-
2017년
로마의 휴일
주연
13만명
실패
2018년
게이트
주연
10만명
실패
<rowcolor=#FFFFFF> '''총 영화수'''[47]
'''총 관객 수'''
'''평균 관객수'''
26편
약 2785만 명[48]
약 107만 명[49][50]

6.2. 음반




6.3. 공연



6.3.1. 뮤지컬


<rowcolor=#FFFFFF> '''연도'''
'''작품명'''
'''비고'''
1993년
동숭동연가

마의태자

에비타

2009년
빨래 - 솔롱고 역
5개 도시[51]
2010년
- 2011년
라디오스타 - 매니저 박민수 역
6개 도시[52]
2012년
- 2013년
벽을 뚫는 남자 - 듀티울 역
이화여대 삼성홀

6.3.2. 콘서트


  • 단독콘서트는 총 58회 개최했으며 전국투어는 2014년, 2015-16년, 2018-19년 총 3번 개최했다.
<rowcolor=#FFFFFF> '''연도'''
'''콘서트명'''
'''비고'''
1998년
1998 임창정 콘서트
서울힐튼호텔 컨벤션센터, 총 3회
1999년
1999 임창정 콘서트
3개 도시[53], 총 7회
2013년
청춘나이트 시즌 2
[54]
2014년
흔한노래.. 흔한 멜로디..
9개 도시[55], 총 10회
"SHOW MAN"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 총 2회
2015년
- 2016년
My Story
10개 도시[56], 총 12회
2016년
JTN 콘서트
[57]
I'M THE 형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 총 2회
2017년
서울대학교 행복 기부 콘서트
[58]
2018년
JTN 콘서트
[59]
2018년
- 2019년
"IM CHANG JUNG"
국내 15도시[60], 해외 4도시[61] 총 20회
2019년
롯데면세점 패밀리콘서트
[62]
The Christmas Show
잠실실내체육관, 총 2회
2020년
평창 평화 페스티벌
[63][64]

6.3.3. 컴백 쇼케이스


<rowcolor=#FFFFFF> '''연도'''
'''앨범명'''
'''비고'''
2016년 9월 5일
I'M

2017년 10월 23일
그 사람을 아나요

2019년 9월 6일
십삼월
1부 쇼케이스
2부 팬사인회 및 식사
2020년 10월 19일
힘든 건 사랑이 아니다
온라인 쇼케이스

6.4. TV




6.5. 광고


<rowcolor=#FFFFFF> '''연도'''
'''기업명'''
'''브랜드명'''
'''비고'''
1997년
빙그레
빙그레 초코지오

빙그레 뉴면
[65]
하이트진로
하이트진로

한솔
한솔 PCS 원샷 018

1998년
롯데그룹
롯데칠성 사각사각

삼성
삼성 애니콜

2000년
한국정보통신
한국정보통신 엔메트로닷컴

IMC
IMC

2002년
오리온
오리온 감자팝

SK텔레콤
SK텔레콤 TING

해태제과식품
해태제과 2&4

코니카필름
코니카필름
[66]
2003년
다음
다음커뮤니케이션

2004년
우체국
우정사업부 우체국택배

2005년
오뚜기
오뚜기 그대로카레, 짜장

2008년
코카콜라
코카콜라 제로(더빙)

2014년
리니지 시리즈
리니지 전사의 탄생

2015년
LG U+
LG U+ tv G 4K UHD

2016년
알바몬
알바몬
[67]
넷마블
레이븐

투다리
투다리

2017년
광동제약
광동 헛개차
[68]
히어로즈
레전드 스포츠 히어로즈

히어로즈
레전드 야구교실
[69]
히어로즈
래전드 스크린 야구존
[70]
2021년
BLANKOZONE NETWORK KOREA
갑부: 장사의 시대


6.6. 홍보대사


<rowcolor=#FFFFFF> '''연도'''
'''홍보대사명'''
2001년
금연 홍보대사[71]
2009년
한국야구협회 아마야구 홍보대사
2013년
경기경찰 홍보대사
2017년
오산시 홍보대사

7. 수상 경력




8. 여담


  • 임창정의 팬클럽 이름인 '빠빠라기'는 사모아어로 '하늘을 찢고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응원 도구로는 금색 풍선을 사용한다.[72]
  • 희대의 유행어 17대 1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 몽고 제국대장공주의 개링구였던 풍천 임씨이고 선조가 몽고인 혹은 중국 한족이라는 것.
  • 2014년 신혜성과 듀엣곡을 발표했다.[73]
  • 주당으로 유명하다. 주사를 묻는 질문에 ' 마시면 그냥 잔다'라고 하자, 마르코가 "아침 9시까지 마시는데 잠이 안오면 사람이 아니죠.'' 비틀즈 코드에 나와서 밝히기로는 술이 '깨면' 주사가 생긴다고 한다. 그 주사란 술을 찾는 것.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는 팬티 바람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주사라고 한다(...).
  • 아버지가 6.25 전쟁 참전 용사였기 때문에 병역감면 특례를 받아 사회복무요원으로 6개월간 근무했다.[74]
  • 1996년에 발매된 2집의 타이틀곡 혼자만의 이별은 3옥타브 레(D5)라는 최고음을 비롯한 후렴구 때문에 수준급 발성을 요구하는 노래다. 리즈시절 임창정의 고음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노래이자, 왜 그가 전설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노래이다. 한 번은 방송사 실수로 라이브 도중 1키를 올려버린 실수가 있었음에도[75] 가뿐히 소화해냈다. 참고로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임창정 암살로 검색해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음역대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 케이스.
  • 김창렬의 라디오에서 갑자기 "소주 한 잔"을 라이브로 부르게 되었는데, 음이 너무 낮은 것 같아서 제작진에게 계속 올려달라고 하다 결국 여자 키로 완창한 적도 있다.
  • 임창정이라는 가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흔히 '노력형 가수'라는 이야기가 많다. 불후의 명곡 출연 당시 본인 입으로도 난 타고난 게 없다, 99%의 노력이 있고 1프로가 타고났다. 따라서 김건모, 이승철과 같은 타고난 가수들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2009년 인터뷰 기사
  • 목소리의 톤이 높고, 어렸을 때 창을 배웠었던 경험을 토대로 저음과 고음에서 모두 매우 탄탄한 소리를 낸다.[76] 립싱크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에도 꾸준히 라이브만 해와서 그런지 사소한 음이탈은 신경쓰지 않고 화끈하게 노래를 부른다. 공연 환경이 좋지 않은 지상파 음악방송에 나와 마이크를 저만치 떼어서 불러도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도 압권. 조수미가 좋아하는 가수로 임창정을 꼽은 바 있는데, 다름 아닌 가창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디오 스타에서도 마이크를 한참 떼어놓고 부르는 모습에 다들 감탄했다.
  • 핸드 마이크로 노래를 할 때는 주로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는데, '나란놈이란'으로 활동할 때 뮤직뱅크에서 간주 중 마이크를 왼손으로 바꿔 든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갤러리에 인증을 했다.[77]
  • 5집 타이틀 곡 'Love Affair'의 녹음 시에, 곡의 후렴구 중에 '우리 단 한 번'이라는 가사 부분을 부를 때, '한~번'으로 음이 올라갈 때 실수로 실제 작곡된 코드보다 반음 내려진 음으로 '번'을 불러 녹음했는데, 당시 이 곡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싱을 맡았던 작곡가 김형석이 오히려 흡족해하며 훨씬 좋다고 판단해 그대로 앨범에 싣게 되었다고 한다.
  • 7집 타이틀 곡 '날 닮은 너' 에는 "두려워 겁이 나"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노래부를 때 이를 항상 "두려워 겁씨나"로 발음하여 이야깃거리가 된 적이 있다. 표준어의 올바른 사용에 민감한 사람들은 상당히 거슬린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본인은 이에 대해 "틀린 발음인 것은 알았지만, 강조를 위해 일부러 그리 한 것"이라 뉴스기사를 통해 해명.[78] 사실 70대 이상 어르신들 중에 이렇게 발음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지만, 옛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 중에는 임창정이 외국인처럼 한국어를 발음한다며 원래 없었던 외계어나 언어 파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 2002년 가요 프로그램 출연 시에 대기실에 들어갔는데 낯설어 보이는 여자 가수가 대기실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신인인 거 같아 보이는데 인사할 기미가 없는 여자 가수에게 선배로서 한 소리 할려고 앞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가수는 다름 아닌 6년 만에 컴백한 가요계의 마돈나 김완선이었다고.[79] 결국 임창정은 당황하면서 김완선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는.
  • 배우 이병헌의 데뷔 초반기에 임창정이 로드매니저 보조로 활동하던 경력이 있어서 이병헌과 옛날에는 무척이나 호형호제하던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임창정이 스타가 되고 난 후에 술자리에서 대판 크게 싸우고 난 뒤[80] 서로 3~4년 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임창정이 먼저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했고, 이를 계기로 임창정은 이병헌과 자신의 관계처럼 누군가 막역한 동생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는데 그 동생이 바로 신정환.[81] 1년 동안 친하게 지내며 이병헌처럼 티격태격 싸움도 걸어보다가 맞을 뻔 하고[83][84] 그만두기로 했다고. 하지만 최근에 이수근이 제발로 찾아와 줬으니 소원 성취한 듯. 실제로 막역하고 꽤나 아껴주는 듯하다.
  • 이수근과 경기도 이천시의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며 생가가 서로 앞집 뒷집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위치했지만 어릴 적에 이수근이 양평군으로 이사를 가 임창정은 몰랐다고 한다. 이걸 알고 있었던 이수근이 연예인으로서 유명해진 이후 임창정을 찾아와 어릴 적 살았던 주소를 이야기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임창정은 그 전에도 이수근을 연예인으로서 이미 알고 지냈는데 이걸 왜 이제 말하냐고 물었더니, 같은 곳에서 태어난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때 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특히 2010년에 개봉한 영화 슈렉 포에버에서 이수근이 극 중 슈렉과 대결하는 악역 럼플 역의 목소리를 더빙하기도 했는데, 영화 시사회 때 임창정처럼 영화에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는 코믹 연기를 하고 싶다는 자신의 뚜렷한 소신을 밝히는 등, 이수근에게 있어서 임창정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연예인으로서의 롤모델이 된 것으로 보인다.
  • 김현정을 놓고 자신의 절친인 김창렬현피를 뜬 적이 있다. 김창렬은 김현정을 애인으로 만들려는 욕심에 다른 남자 연예인들에게는 김현정에게 말을 걸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나 임창정이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85] 김창렬이나 임창정이나 둘 다 연예계에서 소문난 싸움꾼인데다가 온갖 말싸움에 주먹 교환까지 했을 정도로 대판 싸웠다고 한다.
  • 상기된 김완선과의 해프닝을 봐도 알겠지만 연예계에서 유독 군기를 강하게 따지는 성격이다. 사실 임창정이 자란 세대가 소위 똥군기가 넘치는 세대였고,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아역으로 데뷔해 쟁쟁한 선배들 밑에서 보고 자란 영향으로 보인다. 라디오 스타에서 신정환이 우연히 임창정을 식당에서 마주쳤는데, 임창정이 일행과 식사하고 있어 모르겠거니하고 대충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임창정이 이런 행동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고, 곧바로 신정환을 손짓으로 슬그머니 불러서(말하면서 신정환이 임창정 흉내를 내는 것이 백미다.) 뒤로 불려가 쪼인트 받고 엄청 혼났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신정환과 임창정은 연예계 군기에 관련해서는 완전히 상극이다 보니 비슷한 해프닝이 몇 건 더 있다고 한다.
  • 강심장에서 과거 오디션에서 "너는 이런 일(배우)해야 할 놈이 아니야. 너는 공부나 해야 돼. 너 같은 놈이 경쟁률 머리 수만 높여준 거다. 네가 뭐가 되겠냐. 네가 성공하면 내가 내 성을 갈겠다."라는 식의 조롱을 한 감독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십수년 후 바로 그 감독이 영화에 출연해 줄 것을 부탁하자 "매니저와 상의하시죠"로 대충 넘겨버린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한 바 있다.
  • 원래 여드름이 엄청나게 많았다. 방송용 메이크업으로도 피부의 울퉁불퉁함이 가려지지 않았을 정도.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꾸준한 관리와 피부과 시술로 매끈한 피부를 갖추게 되었다.[86]
  • 강심장에 출연해서 말한 에피소드로, 신인 시절의 임창정이 어느 날 이병헌이 불러서 노래방에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병헌의 생일파티 자리였고 연예계 관계자들이 각자 노래 잘하는 지인들을 불러서 가창력 배틀을 시키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병헌이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동생이라고 데려온 사람이 임창정이었고, 도착하자마자 임창정이 한 곡조를 뽑았더니 그 날따라 목소리가 좋았는지 폭발적인 환호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구석에 앉아있던 한 작달막한 20대 일반인 여자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도 연예계 감독이 부른 노래 잘하는 지인이었다. 이어서 그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신세계가 펼쳐졌다고 한다. 이후 며칠 간 임창정은 절망에 빠져 가수를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여자의 정체는 바로 데뷔 전의 박정현. 임창정이 강심장에서 이야기한 당시의 비화 임창정의 실제 증언에 따르면 박정현의 가창력은 방송으로 들어서는 다 느낄 수 없는 엄청나게 탁월한 가창력이라 박정현의 노래는 실제로 들어봐야만 그 엄청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 나는 가수다 출연설에 대해 이야기 한 바에 의하면 섭외 요청도 없었고 나갈 생각도 없다고 한다.#
  • 가수 허각이 임창정의 열렬한 팬이었고, 히든 싱어에 임창정이 출연하자 모창 능력자로 함께 출연하여 방청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원래는 임창정의 절친인 김창렬을 통해 이전부터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실제로 만나기는 방송에서가 처음이라고 했다. 덕분에 그의 앞에 서자 눈을 못 마주칠 정도로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임창정의 2003년 가수 은퇴를 회상하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SBS 가요대전에서는 함께 '문을 여시오' 무대에 서기도 했다.
  • 불후의 명곡 이선희 편에 출연해 팬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가수 이선희에게 많은 애정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강산'을 불러 앞에서 얘기한 과거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던 박정현에게 1표 차이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87]
  • 한때 쌩목가수라는 논란이 있었는데, 콘서트 경력이 전무한 데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쪼는 느낌의 고음부 발성 때문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임창정은 두 세 곡만 부르면 목이 가 버리므로 콘서트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많은 사람들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이는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창정은 1998, 1999년도 무려 두 번이나 콘서트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히트곡이 너무 모자랐고 시키는대로만 노래 부르던 콘서트였기에 정말 재미가 없어서 다시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었다고. 하지만 25년 차 가수가 된 지금은 히트곡이 넘쳐나기도 하고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가 그립기도 해서 콘서트를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부터 거의 매해 전국투어 콘서트를 열고 있다.
  • 노래를 부를 때 고개를 위로 치켜들면서 입과 눈을 엄청나게 크게 벌리는 표정을 자주 짓는다. 이에 팬들은 '가사가 하늘에 떠 있습니다.' 라는 개드립을 시전. 영상이나 사진 자료로 간간히 볼 수 있다. 애초에 임창정 노래는 엄청난 가창력과 고음을 요구하는 노래가 대부분인지라 일반인들은 이런 표정을 죽어라 짓고 노래를 불러도 힙겹게 완창하거나, 완창하지 못하고 포기, 너무 무리해서 삑사리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저런 표정을 짓든 안 짓든 그 음역대를 맟춰 노래를 부르는 게 대단한 일이다. 참고로 노래는 너무 좋아서 흥얼거리고 다니다가 막상 노래방을 가면 너무 높아 부르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1999년 마지막 콘서트로부터 15년이 지나서 전국투어 콘서트를 한다고 한다. 2014년 5월 23일, 5월 24일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전주, 인천, 광주, 대구, 고양, 부산, 울산, 제주까지 무려 9개 도시에서 10회에 걸친 콘서트를 하기로 했다는 듯. 얼마 전 끝난 서울 콘서트에서는 세 시간에 걸쳐 38곡이나 되는 그의 히트곡과 명곡들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 그의 현 주소지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그의 가게들이 여러 개 있다.[88][89] 그래서 그런지 그 주변에서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90] 성남시 축제에 시민 자격으로 초대가수로 와서 4곡 부르고 갔다고. 참고로 무료로.
  • {{{#!html
<iframe width="420" height="315" src="//www.youtube.com/embed/has78nHhRq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1997년 한솔엠닷컴 CM의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2014년 중국 CCTV에서 매년 설에 방영하는 특집 프로그램 '왕루춘완'에 출연했다.
  • 2015년 10월 9일 자 뮤직뱅크에서 또 다시 사랑으로 2003년 이후 무려 13년 만에 음악 순위 프로그램 1위를 거두었다.[91] 아이들의 이름들을 부르며 "아빠 1등했다!"는 감동적인 소감은 덤.[92]
[image]
디시인사이드의 임창정 갤러리에 한때 자주 나타났다. 팬들은 휴먼아재체라며 즐겁게 노는 중...이었으나, 2018년 2월 영화 게이트 출연을 놓고 갤러리에 상주하던 팬들과 마찰을 빚고, 그 이후로 갤러리에 등장하지 않았다.[93] 그의 디시인사이드 계정도 현재는 휴면으로 전환되었다.
  • 그러나 2019년 9월 십삼월 발매 후 다시 등장했고 팬들도 반가워했다. 조현민의 말에 따르면 간간히 자신의 갤러리를 눈팅하고 있다고 한다.
  • {{{#!html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tnLTL1Yc7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김창렬처럼 관련 방송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한 리니지 애호가다. 전사출시 당시에 본인이 출연했던, 어디서 좀 17대 1로 싸워서 놀아본 영화의 패러디 광고까지 찍었을 정도.
두산 베어스의 팬이다.# 두산이 초청한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2007년 한국시리즈 3차전 영상을 보면 임창정이 당시 찍던 영화 스카우트 홍보도 할겸 주포 김동주를 응원하는 팻말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날 경기는......
  • 지금은 그냥 노래 잘 부르는 아저씨 이미지 때문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의외로 준수한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당시 한창 뛰어다닐 시절에는 출발 드림팀 시즌 1에 꽤 나오면서 활약했던 에이스 멤버들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그 운동잘하기로 유명한 이상인이 잠시 몇 번 안 나왔을 때 임창정이 몇 번 대타로 뛰었는데 의외로 놀라운 운동 신경을 보여줘서 이상인의 공백을 멋지게 메꿨다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다만 아쉽게도 단신이라 그런지 뜀틀이나 이런 종목에서는 꽤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일부 댄스곡들을 제외하고는 전주, 간주, 후주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노래방에서 부를 때 간주 점프가 필요없으며 라이브 무대를 듣게 되면 중간에 박수칠 타이밍이 없다.
  • 이혼한 과정에서 세 아들 중 첫째, 둘째는 임창정이, 막내는 전 부인이 양육하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이를 두고 이상한 루머가 돌더니 급기야 '임창정의 셋째 아들은 임창정 친자가 아니며, 이를 이유로 두 부부가 이혼했고 막내만 부인이 키운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찌라시가 돌았다. 악플이 계속되자 결국 임창정의 전 부인이 악플러들을 고소했고, 그 과정에서 세 아들에 대하여 모두 친자검사를 한 결과 세 아들 모두 동일한 부계, 모계관계가 성립된다는 결과를 받았다. 악플러들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출처 아직도 이 루머를 믿고 인터넷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근거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사자들에게 당연히 큰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는다. 허위사실을 함부로 유포하지 말자.
  • 2016년 7월 19일에 부친상을 당했다. 향년 90세.
  • 위에 향년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는 1926년 생으로써 아버지 나이 쉰에 가까운 나이에 얻은 늦둥이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본인도 늦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에 여동생이 한 명 더 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20살 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로 나이가 젊었다고...
  • 나란놈이란 앨범 아트에 삽입된 얼굴 이미지를 12집부터 실물 음반의 앨범 아트에도 삽입하고 있다.[94] 팬들은 '도장'이라고 부르며, 2018년 전국 투어 굿즈로 출시된 응원봉에도 이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다.
  • 18세 연하의 일반인 여성과 2016년 11월 4일 임신과 함께 결혼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출처 그리고 2017년 1월 6일 임신 6개월인 승무원 출신 비연예인과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 만삭의 아내가 위험하게 대신 운전한 일로 비난을 받아 사과를 한 일이 있다.
  • 2015년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작은아들이 여덟 살적, 형만 믿고 아홉살이던 친구를 괴롭히는 걸 보자 화가 나, 결국 아들을 데리고 아들이 괴롭힌 친구의 집에 가서 그 아이 앞에서 무릎 꿇고 "미안하다, 아저씨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다." 며 빌자 아들은 이제야 잘못을 알았는지 울었다라는 일화를 밝혔다.[95]
  • YES IM 엔터테인먼트 설립 전에 소속된 소속사인 NH EMG[96]는 임창정을 데뷔시켜 준 소속사라고 한다. 정확히는 임창정이 가수로 초대박을 터뜨린 해인 1997년에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2003년에 임창정이 가수 생활을 그만두면서 잠시 결별했다가 돌아온 것. 2013년 9월에는 계약금을 안 받는 대신, 무려 10년 재계약을 했다고 한다. 대표님과 친해서 형님 동생한다고 동호 일화로 빵 터뜨린 적이 있는데 신동호유키스를 탈퇴하자 대표님이 자신을 불러 술을 먹는데 임창정이 신동호가 너무 일찍 나간 거 아니냐고 하자 대표님이 "어쩌겠냐 애가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하며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냥 놓아 주었다고 그러자 은퇴 선언을 했을 때 대표님이 임창정에게 뭐라고 했냐고 묻자 어마무시하게 욕을 먹었다고 한다. 임창정도 형님이 나 때문에 대인배가 되었다고 할 정도.
  • 2017년 로마의 휴일 제작보고회 당시 임창정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 볼 정도로 후덕해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같은 해 10월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면서 인스타그램에서 공개한 체중은 79kg로, 체질량 지수로 환산하면 27.99, 과체중 범위에 속하지만 비만 범위에 상당히 가깝다. 현재 다이어트를 위해 탄수화물을 자제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8년 가을에 9kg을 감량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 트렌디한 스타일링을 하며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97]
  • 2010년대 이후 출연하는 영화에 대하여 상당한 말들이 많다. 임창정 정도면 충분한 연기력과 인지도, 흥행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영화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재호[98]과 이덕희[99] 감독들과 지속적으로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감독들과의 작업으로 임창정의 배우 커리어는 거의 회복 불능 상태다. CGV 한글날 맞이 우리말 영화 제목 짓기 이벤트에 '임창정 안 나오는데 임창정 나올 것 같은 영화'.가 결승에 올라갔을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1990년대 ~ 2000년대에 음악 방송 활동을 할 때 유난히 스티브 유와 1위 후보로 자주 맞붙었다. 가요톱10에서 '그때 또 다시'로 골든컵을 수상한 주부터 당시 '가위'로 활동하던 스티브 유와 1위 후보로 만났으며, 그 후에도 '별이 되어', 'Love Affair', '날 닮은 너'로 활동할 때도 상대곡으로 '나나나', '열정', '찾길 바래'로 활동하던 스티브 유와 맞붙었지만 번번히 패했다.
  • 지금 프로필에는 혈액형이 B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과거 신문, 잡지 기사에 나온 프로필은 AB형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본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가 AB형인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후에서야 자신이 B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문희준, 박현빈, 전진과 함께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B형 남자 특집' 게스트로도 출연했다.
  • 14집을 발매했을 때 음악 방송이나 콘서트에서 흰색으로 페인팅한 커스텀 마이크를 사용했다.
  • 2018년 11월부터 공식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주로 본인의 콘서트를 포함한 공연 하이라이트와 일상, 브이로그, 그리고 고화질로 볼 수 없었던 옛날 뮤직비디오도 업로드한다. 구독자 이벤트도 하며 추첨을 통해 싸인 앨범, 임창정이 운영하는 음식점 이용권, 심지어 제주도 비행기 티켓임창정 1일 이용권 등을 상품으로 걸기도 한다.(30만 구독자 이벤트 참조) 2020년 3월 기준으로 구독자수 50만을 돌파했다.
  • '또 다시 사랑'까지 오랫동안 영문 표기로 'Lim Chang Jung'을 사용하다가 13집부터 'Im Chang Jung'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00]
  • 2018년 가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개최했다. 광주-안양-인천-대전-서울-대구-청주-의정부-부산-수원-창원-일산-전주-원주-천안-강릉 무려 16개 도시에서 전국투어를 개최한 뒤 미국의 뉴욕, LA와 캐나다 토론토 등에서도 콘서트를 열었다.[101]
  • 종합 엔터테인먼트사 '예스아이엠'을 창립했다. 예스아이엠 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 웹콘텐츠, 영화사업 위주로 운영되고 예스아이엠 트레이닝 센터는 연기학원, 예스아이엠 플레이어 센터는 트레이닝 센터를 거친 수강생들과 외부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곳이며, 몇몇 드라마 작가와 집필계약을 맺었고 영화 크랭크인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임창정 본인이 2019년 하반기 방영 예정인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다. # 예스아이엠 플래닛은 BJ, 크리에이터들을 매니지먼트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스아이엠 진로체험센터, 수제버거 카페인 예스아이엠도 창립했다.[102] 최근 SBS 예능 집사부일체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 Wanna One 출신의 김재환의 솔로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안녕하세요'를 선물했다고 밝혔다. 김재환의 솔로 데뷔 후 1주일 내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차트만 봤다면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 유튜브 '스브스뉴트로' 채널에서 스트리밍하는 1990년대 ~ 2000년대 인기가요 방송을 보는 네티즌들로부터 (방송할 때마다 출연한다고) '또창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 역시 스트리밍 방송을 시청하고 별명을 알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 2019년 9월 21일 소속사 차원에서 악성 댓글에 대하여 선처 없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 1993년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무당>의 출연진으로서 특별 공연을 했다.#
  • YES IM 엔터테인먼트가 KBS 주말 연속극 <오! 삼광빌라!>의 촬영 장소로 등장한다.[103]
  • 2020년 10월 13일에 방영된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김숙으로부터 자신이 이상형이라는 고백을 들었다.[104] 이에 김숙을 위한 즉석 라이브를 들려주었다.

[1] 풍천 임씨 집성촌이다.[2] 셋째까지는 전 아내 태생이다.[3] 아버지가 6.25 전쟁 참전 유공자여서 병역특례를 받아 공익근무요원(現 사회복무요원)으로 6개월만 복무하고 병역을 마쳤다.[4] 지금은 아니지만 신인 시절 인터뷰를 보면 잠시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5] 디시인사이드 임창정 갤러리에서 임창정 본인의 닉네임이었다.[6] 형, 우리 형, 창정이형 등등. 말 그대로 동네형 같은 이미지때문에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도 가끔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 예스아이엠 설립 후 2020년에 출연한 방송에서 다들 대표님이라는 칭호로 많이 불렀다.[8] 임창정 본인이 나창정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팬들과 자주 소통했었으나, 2018년 2월 영화 게이트 출연을 놓고 갤러리에 상주하던 팬들과 마찰을 빚은 후에는 앨범 컴백 시기에만 잠시 비로그인으로 등장하고 있다.[9] 2000년대 이전에는 제대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 관객수는 서울기준으로 작성[10] 이전에는 김민종김원준이 연기와 가수를 병행했고, 나름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김민종은 괜찮았던 드라마 커리어에 비해 영화에서는 죽을 쑤었고 김원준은 연기 쪽에선 실패를 거두고 있었다.[11] 사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노래나 예능에 비해 연기쪽은 연기력은 인정받으나, 흥행운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다. 반타작 정도인데 흥행한것도 한두개를 제외하면 애초에 제작비가 낮아서 본전을 넘은 경우라... 예능에서 자조적으로 써먹듯이 영화를 보는 선구안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럼에도 임창정은 연기를 너무 사랑해서 가수 은퇴까지 한적이 있다는 것이다.[12] 9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이 시간이 지나 목관리 등에 실패하며 성적이 쇠퇴하는 것에 비해 임창정은 한국갤럽에서 2016년을 빛낸 최고의 한국 가수 1위, 2016년을 빛낸 최고의 가요 1위로 내가 저지른 사랑이 뽑힐 정도로 제 2의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다.[13] 대표적으로 소주 한 잔은 최저 '''0옥타브 파♯(F♯2)''' 에서 최고 '''2옥타브 시(B4)''' 까지의 넓은 음역대를 자랑하기 때문에 고음이 안올라가 키를 낮추자니 앞부분이 너무 낮고, 앞에 음이 너무 낮아 키를 높이자니 후반부에 음이 너무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14년도 콘서트 버전 ‘나의 연인’의 경우 최저음이 '''0옥타브 미(E2)'''에서 최고음이 '''2옥타브 시(B4)'''이다. 전반부는 '''0옥타브 미(E2)''' ~ 1옥타브 초반의 그야말로 저음 대잔치에, 후반부는 '''2옥타브 솔(G4) ~시(B4)'''로 도배되어 있는 중고음 떡칠로 그야말로 저승길 편곡이라는 평가를 듣는 버전이었다.[14] 여기서 후두를 조금 더 내리고 호흡의 힘을 살짝 줄이면 노을이상곤의 발성과 흡사하다.[15] 이런 좁은 발성을 쓰게 되면 성대 수명이 짧아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임창정의 경우 성대 내공이 워낙 탁월하게 단단하고 적절한 휴식과 뛰어난 피지컬로 정규 15집까지 발매하는 등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16] '나의 연인' 콘서트 라이브 중 나의 연인 도입부를 '''1키 낮춘 뒤 1옥타브 내려서''' 부른 적이 있다. 해당 파트는 '너 없는 세상'[17] Ya Ya! Boo Boo!, Wake me up before you go go[18] 심지어 임창정은 '''벨팅'''을 구사한다.[19] 9집 슬픈혼잣말 활동당시의 인터뷰를 보면 한때는 '''3옥타브 파(F5)'''까지 진성으로 나왔다고한다.[20]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의 3절 싸비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가져 간 날 '''들 ''') 원키로 애드립을 넣으면 그렇다. 모서리족발 라이브, 뽕숭아학당 라이브가 대표적 예.[21] 스핀토 테너로 추정된다. 음역대는 리리코 테너와 비견될 정도로 높지만 바리톤스러운 음색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기정 사실.[22] 가장 많이 감탄하는 부분은 역시 엄청나게 높은 진성배음을 유지하며 3옥타브 레(D5)~3옥타브 미(E5)를 지르는 음역대[23] 나란놈이란이라는 곡 자체가 '슬픈 혼잣말' 이라는 곡과 함께 임창정 특유의 감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는 노래 중 하나다.[24] 이 점은 임창정의 전성기 당시 벨팅 창법에 대해 아는 일반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크다. 특히 당시는 고음병(...)의 절정이라 별 희한한 가창이론이 돌아다니던 시기라 임창정의 창법에 대해 뭐라 부를지 몰라 생목이라 부른 것. 다만 당시에도 "생목으로 저렇게 불러??"고 감탄하면 했지 임창정의 보컬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적었다. 사실 진짜 음알못이 아니고서야 생목이건 나발이건 임창정이 노래 잘하는 가수란 건 들어보면 안다. 그게 벨팅이란 걸 아냐모르냐 문제지.[25] '''3옥타브 레♯(D♯5)'''를 '''널뛰기'''로 내야한다.[26] '''2옥타브 라(A4)'''[27] 이전에 '''포맨의 신용재가 부른 적이 있지만 반가성에 가까웠고 임창정이 그와 나이가 16살이 차이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다는걸 알 수 있다.'''[28] 이는 임창정 본인이 작곡한 노래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음악적 깊이를 떠나서 대중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곡들이 대부분.[29] 임창정 본인의 음악적 색깔과 극을 이루는 작곡가로 임창정과 작곡가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조규만이 있는데 조규만의 곡들은 서정적인 분위기에 언제 어디서 음악적으로 극적인 전개가 등장할지 청중이 상대적으로 파악하기 쉽다. 조규만의 곡들은 대부분 기승전결이 뚜렷하며 verse와 후렴사이에 극적인 전개를 선호하지만, 임창정 본인이 작곡한 곡들은 대부분 이런 경계가 모호하다.[30] 그랬다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31] 이는 각 앨범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대중적 시선을 고려하여 선택한 타이틀곡과 임창정 본인이 작곡한 곡들 사이에는 음악적인 괴리가 있다. 대표적으로 2집 타이틀곡인 이동원 작곡의 혼자만의 이별과 임창정 작곡의 염원의 눈물을 비교해보자. '혼자만의 이별'에 비해 '염원의 눈물'은 상대적으로 임창정 특유의 꺾는 창법이 극대화되기에 임창정에게 최적화된 곡이다.[32] 임창정은 고음에서 특유의 톤과 감정이 가장 잘 표현되는 가수다. 단순히 고음을 잘 내기때문에 가창력있는 가수가 아니라 고음에서 감정표현이 가장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가수이기 때문.[33] 3집부터 5집까지의 타이틀곡은 모두 김형석 작곡이다.[34] 이는 김형석이 작곡한 임창정의 타이틀 곡에서 알 수 있는데 김형석만의 '정형화된' 음악적 스타일을 찾기 어렵다는 점. 그때 또 다시 → 별이 되어 → Love Affair → 기다리는 이유에 이르기 까지 음악적으로 다양한 (발라드 안에서) 스타일을 추구했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9집 슬픈 혼잣말에서 가장 정형화된 발라드 스타일로서 정착하게 된다.[35] 임창정의 언급에 따르면 김형석이 있는걸 알고 일부러 눈에 띄고 싶어서 더 열심히 불렀다고 한다. 그때 불렀던 노래는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이었고, 김형석은 솔리드에게 주려고 했던 그때 또 다시를 임창정과 작업하게 되었고 결과는 초대박이 났다.[36] 특히 7집 조규만 작곡 수록곡 "그대도 여기에" 작업 상황이 영상으로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녹음 후 임창정이 "타이틀 곡 나온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다시 원상우의 "날 닮은 너(#)"가 타이틀곡으로 선정된다.[37] 물론 원상우의 타이틀 곡들(나의 연인이나 날 닮은 너 #)이 임창정스러움을 100% 반영한 곡은 아닐 수 있다. 다만 그 임창정스러움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들중 가장 임창정스러운 곡들임에는 틀림없다.[38] 임창정의 곡들은 다른 가수가 부르기 꺼리는 곡들이 많은데 특히 원상우의 곡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대중가요계에서 임창정스러움을 표현할 수 있는 가수가 전무하기 때문.[39] 실제로 8집에 김형석 조규만 원상우가 프로듀서로서 참가한다고 했을때 임창정 팬들은 그때 또 다시 + 스마일 어게인 + 나의 연인을 기대했으나... 실제로 8집에서 조규만과 김형석이 프로듀싱한 파트는 결코 나쁘지 않았으나 원상우가 프로듀싱한 파트는 좀 매니악하다.. [40] 원상우가 작곡한 8집 '뭔데 뭔데'와 9집 '너를 너로써'는 그래도 후속곡이었다.[41] 재미나게도 임창정팬들에게는 명곡이나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던 2집의 혼자만의 이별을 작곡한 그 작곡가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방송국에서 두키올려버려 분노의 가창을 했던 그 노래가 바로 혼자만의 이별.[42] 2집 이후 10집전까지 임창정과 작업을 아예 안 한건 아니다. 5집의 숨은 명곡 운명이라는 곡도 그의 작품.[43] 노래를 반으로 나누어 작곡을 하는 방식, 주로 임창정이 후렴구를 작곡하고 멧돼지가 Verse를 작곡한다.(15집 타이틀곡인 십삼월은 이와 반대로 임창정이 도입, 멧돼지가 후렴을 도맡아 했다)[44] 2000년대 이전에는 제대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 관객수는 서울기준으로 작성[45] 데뷔작.[46]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임창정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47] 단역/특별출연 제외[48] 위 표에 의한 계산 기준[49] 위 표 기준[50] 90년대에는 관객수 집계가 정확히 되지 않은데다가 IMF크리까지 더해져 관객수가 현재에 비해 굉장히 적었다.[51] 서울-부산-대구-대전-군포[52] 서울-수원-부산-대구-대전-의정부[53] 서울-부산-청주[54] 2개 도시(서울-대구) With 김건모, 룰라, 현진영 등.[55] 서울-전주-인천-광주-대구-고양-부산-울산-제주[56] 대전-안산-서울-대구-창원-부산-일산-부천-광주-전주[57] 9월 20일 공연. With 유미, 변진섭[58] With 홍진영, 도끼, 우주소녀 등.[59] 5월 19일 공연. With 소향[60] 광주-안양-인천-대전-서울-대구-청주-의정부-부산-수원-창원-고양-전주-원주-천안-강릉[61] 토론토-밴쿠버-LA-뉴욕[62] 8월 9일 공연. With 김건모, 김연우, 볼빨간사춘기, 지창욱[63] 8월 9일 공연. With 송소희, 정동하[64] 코로나19가 잠시 잠잠해진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가을에 대확산이 다시 일어나면서 인제 드라이브 콘서트는 물론 연말에 계획된 전국투어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65] 국회의원 최종원과 함께 출연. 최종원이 "뉴면 시킨 사람! 쥐~익 손들어!" 라고 할 때 임창정이 "전 라면 시켰는데요?" 라고 한 뒤, 최종원이 "여기 하나 빼고! 쮜~익 뉴면!" 이라고 하자 임창정 본인도 뉴면을 달라 하는 것이 압권이다.[66] 김현정, 김흥국, UN과 함께 출연.[67] 혜리와 함께 출연[68] 정상훈과 함께 출연[69] 양준혁과 함께 출연[70] 양준혁, 이종범과 함께 출연[71] 막상 임창정은 10년쯤 후에 담배를 끊었다(...) [72] 풍선에는 '빠빠라기'라는 글자가 프린팅되어 있는데, 팬들은 풍선을 '나주 배'라고 부른다.[73] 위 참여칸에 소개한 '인형'이라는 곡[74] 임창정이 처음 병역판정검사를 받은 1992년에는 방위병 끝물이었지만 활동 때문에 방위병은 가지 못했고 방위병 대신 생긴 사회복무요원 제도로 병역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사회복무요원 1세대.[75] 2키 올린 라이브라고 알려져있는데, 원래 음원은 A키이고, 원래는 한 키 낮춘 Ab으로 부를 예정이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음원에서 한 키 높인 Bb 키로 라이브를 하게 된 것이므로 라이브 기준 2키이고, 음원 기준으로는 1키 올린 라이브이다.[76] 각 앨범 타이틀곡들만 불러봐도 가빠오는 호흡과 꾸준히 높은 음 때문에 노래방에서 안드로메다를 느낄 수 있게 된다.[77] '임박사와 함께 춤을'로 활동할 때는 왼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했다.[78]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난 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밝힌 바로는 겁씨나가 표준어인 줄 알고 그렇게 썼는데 일이 커지자 시적 허용이라고 했다고.[79] 참고로 김완선은 임창정보다 4살 많은 연장자인데다가, 가요계 데뷔년도는 임창정보다 10년 가까이 앞선 완전 대선배다. 그리고 착각할 만큼 동안이기도 하고.[80] 이병헌이 술을 계속 권하자 임창정이 스케줄 때문에 이를 거부했는데 그런 임창정을 보고 이병헌이 뜨고 나서 변했다며 나무랬다. 그러자 임창정이 무명 시절 이병헌이 도와주지 않았던 서운함이 터지며 대판 싸웠던 것.[81] MC대격돌 3기(공포의 쿵쿵따 2기) 때부터 함께한 경력이 있어서 친해진 듯.[82] 취한 일반인들이 먼저 남희석에게 시비를 걸어서 생긴 사건[83] 참고로 신정환은 한창 연예인 활동할 당시 방송 이미지와 달리 사생활에서는 꽤 카리스마 있는 편이고, 후배들이 따르는 선배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요계 군기반장으로 유명한 이성진조차 방송에서 "정환이 형은 군기를 잡는것도 아니면서 진지하게 동생들을 잘 챙겨서 따를 수 밖에 없는 형이다"고 할 정도. 과거 남희석-이상민-신정환-탁재훈 등 많은 연예인이 연루되었던 일반인과의 폭행시비 사건[82] 때도 물러나지 않은 건 신정환 뿐이라고 한다. 말이 일반인이지 대학교 조정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남희석의 말에 의하면 멱살을 잡혔는데 꼼짝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반대로 나이 차이 많이 안 나는 형들에게는 약간 대드는 느낌도 있는데, 선배가 후배에게 군기잡거나 규율 잡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1살 형인 임창정과 김창렬이 군기 잡듯이 행동할 때 저항한 것이라고 한다. 연예계에서 임창정-김창렬의 이미지 때문에 쫄았던 연예인들이 많지만 신정환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부류라고 한다.[84] 심지어 과거 라디오 스타 출연 당시에도 김창렬이 나왔을 때 신정환과 김창렬-임창정 사이에 있었던 그 일을 대략 이야기했는데 별 거 아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신정환이 그들을 만나 "어 형"하면서 손을 들고 인사했는데 그걸 건방지게 생각해 마음에 안 들어하는 태도를 임창정-김창렬 두 사람이 보이며 왜 그런 식으로 인사하냐고 물었고 신정환도 그에 화가 나서 상황이 크게 거칠어질 뻔한 것. 다만 진짜 싸우기 전에 마무리되고 그 후에 대충 풀리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정환은 그 말 이후 "나는 아직도 한두살 형들한테 90도 인사는 못한다."고 했고 김창렬은 "에이 우리가 언제 그런 거 하라고 했어?"라면서 약간의 앙금이 남아있음을 보였다.[85] 임창정이 동료로써 아끼는 동생이 김현정이기도 했고 예전에 스타실험카메라에서 김현정이 남자를 만나는데 만약 그 남자가 바람둥이일 때의 임창정의 반응을 살펴봤는데, 바람둥이 역을 맡은 남자가 잠시 자리를 뜨자, 김현정에게 "이 남자 좀 아닌 것 같다. 이 남자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 만나라." 라고 조언까지 해 줄 정도로 김현정을 막역하게 챙겨줬던 게 임창정이다. 당연히 임창정 입장에서는 그런 김창렬을 이해 못할 상황.[86] 연예인은 하고 싶은데 여드름이 너무 많아 항상 고민과 컴플렉스를 동시에 가지던 어느 날 민간요법으로 여드름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마늘을 빻아 팩처럼 얼굴에 발랐다고 한다. 이에 10분이 지나서 떼 보니 여드름이 가라앉고 새살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이왕 한 거 '제대로 해 보자!' 하고 얼굴 전체에 마늘을 바르고 10분 이상 있다가 떼었더니 얼굴 전체가 까맣게 되어버린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이에 임창정의 아버지는 "똥바가지 얼굴 주제에 무슨 연예인을 하느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87] 단 박정현의 순번이 1번이였고 임창정의 순번은 6번이었다.[88] 소주 한 잔이라는 술집이다. 참고로 울산점의 채용광고가 상당히 인기를 끌었는데, 직원의 대우는 몰론 마지막의 "사장이 적게 벌면 됩니다" 라는 문구 때문에 저기서 일해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89] 가끔씩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가기도 한다.[90] 특히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들과 근처 당구장에서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91] 햇수로는 13년, 만으로는 12년 만의 1위 수상이다.[92] 이 때 무대 위에 난입해 격하게 포옹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희철이다.[93]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팬들 역시 I'm the 형 투어 당시 그가 "팬들을 위해 영화를 신중하게 선택하겠다"던 발언을 뒤집고 감독들과의 친분만으로 영화를 고르는 모습에 현타를 맞았고, 무대 인사도 치외법권까지는 갤러들이 자리를 많이 채워주었으나, 그 이후에 개봉한 로마의 휴일, 게이트 무대 인사는 파리만 날리다시피 했다. 로마의 휴일 역대급 무대 인사 후기 현재 임창정 갤러리는 하루에 글이 한 두 개 올라올까 말까 할 정도로 리젠이 줄었으며, 그나마도 어그로성 글들이 자주 올라오는 편이다.[94] 그런데 미니앨범 2집 '그 사람을 아나요'에는 이 이미지가 없다.[95] 지극히 개념박힌 부모상으로 작은 폭력이라도 부모의 행동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이는 윤손하의 아들 사건으로 재조명됐다.[96] 전신은 천일기획, 라플 엔터테인먼트.[97]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을 때 유희열이 클래식 커트 헤어와 슬림한 정장을 입은 그를 보고 '이태리 아저씨' 같다는 말을 했다.[98] 게이트, 치외법권 감독[99] 로마의 휴일[100] 사실 1, 2집 활동 때도 'Im Chang Jung'을 사용했다가 3집 활동부터 20년 가까이 'Lim Chang Jung'을 사용했다. 그 때문인지 영문 표기를 바꾼 후에도 여전히 'Lim Chang Jung'을 쓰는 케이스가 자주 보인다.[101] 뉴욕에서 콘서트를 할 때 거리에서 제이크 질렌할과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기도 했다.[102] 회사명 홍보를 위해 일부러 카페 이름을 회사명과 같게 한걸로 보인다.[103] 주로 이해든과 관련된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104] 이것은 김숙이 '언니네 라디오'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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