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상(범죄자)

 


[image]
'''이름'''
박한상(朴漢相)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생'''
1971년 (52-53세), 충청남도 천안시[1]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가족'''
2남 중 장남
'''학력'''
현대고등학교
원광대학교 중퇴
'''범죄유형'''
존속살해, 살인
'''살해인원'''
'''3명'''[2]
'''선고'''
사형 (형집행대기자 신분)
1. 소개
2. 다른 사건들과 차이점
3. 성장 과정
4. 상세
4.1. 사건의 발단
4.2. 범인 검거
4.3. 범인의 도박중독
4.4. 범행
4.5. 발각된 사유
5. 그 후
6. 여담
7. 둘러보기


1. 소개


'''부부를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범인은 바로 그 집 큰아들이었습니다. 소문은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고,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이윤성 KBS 뉴스 9 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에서.

대한민국에서 존속살해범으로 가장 악명높은 인물 중 하나이자 '''극심한 패륜아이자 금수저 패륜아의 대명사'''.

2. 다른 사건들과 차이점


존속살해는 박한상 말고도 종종 있어왔던 범죄이지만 존속살해가 벌어지는 경우는 주로 서민이나 가난한 집안에서 보호자와 자식 간의 갈등이(주로 경제적 갈등) 심각해지다 폭발하는 경우와 심각한 정신질환 보호자이거나 막장보호자 밑에서 자라는 자식의 고통을 사회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다. 반면 이 사건의 경우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금수저 집안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1차적인 원인이 자식의 부도덕함이라는 점에서 다른 존속살해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였다.

3. 성장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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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상의 가족사진. 왼쪽의 인물이 박한상이고 가운데 두 부부가 박한상에게 희생 당한 보호자[3], 오른쪽 얼굴을 가린 이는 박한상의 동생이다.
박한상은 1971년 아버지 박순태(前 고려한약유통공사[4] 대표)와 조순희의 3남[5]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25세, 어머니는 24세로 그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얻었다. 박한상은 어렸을 때부터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대형 약재상 '덕양한약방'을 하는 보호자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원래 박한상은 교회활동을 매우 성실히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고등부 회장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벗어나면 180도 반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교회에서도 금기시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교회 장로이며, 부장교사였던 박한상의 아버지는 박한상에게 '고3이니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박한상은 더더욱 막장의 길로 빠져들었다.
박한상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성적 역시 저조했다. 박한상의 친구 증언에 따르면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자동차 튜닝 분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6] 하지만 박한상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 마땅히 여겼다는 것이다. 경동시장의 한약방을 기업체로 키워낸 자수성가 약재상이었던 박한상의 아버지는 아들인 박한상이 가업을 이어받고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한상은 한의대에 가는 데도 관심이 없었고 갈 능력도 없었다.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7]에 입학했으나 대학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이때부터 유흥업소에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박한상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에 강제로 도피유학을 보냈다. 당시 박한상과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증언하기를, "대한민국에서도 공부를 못 쫓아가는 애가 어떻게 미국 가서 공부를 하냐, 결국 거기서 놀러다니고,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대한민국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 미국에서도 제대로 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아들이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사고나 치고 다니는 큰아들 박한상은 더이상 집안의 기대 대상이 아닌 골칫 덩어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박한상이 3,700만 원의 도박 빚을 지게 되면서[8] 아버지한테 갚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고 박한상을 대한민국으로 호출하게 된다. 그리고 박한상은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뒤 위와 같이 '''패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박한상은 사실 자잘한 정신 질환으로 인해 이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등 상당히 안 좋은 인성을 가졌다. 이 때문에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싸움질과 폭력을 휘두르는 학교폭력 가해자였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통제하려고 했고[9] 또 어떻게든 공부하게 하려고 교회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다시 다니라고 했지만 박한상은 더욱 엇나갔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원래 다정한 성격이었고 박한상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행동을 취했지만, 그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점점 강압적인 태도로 변한 것이다. 태도는 강압적이었을지언정 1990년대 기준 18,000달러라는 엄청나게 큰 돈을 박한상이 달라고 해서 내어줄 정도면 박한상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사람 한 번 만들어 보려고 강압적으로 굴었던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편애해주던 아버지를 강압적으로 만들 정도로 박한상이 태생부터 악하고 비윤리적인 인간[10]이라는 것은, 결국 나중에 돈을 목적으로 보호자를 살해하면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동정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친구들도 박한상을 극심한 패륜아로 규정하고 그 형량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박한상에게 주어질 동정표는 그가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존속살해를 저지른 시점에 더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호자의 잘못된 교육이 이런 막장 행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긴 했겠지만, 일차적으로 개인 자체가 방탕하고 안좋은 성격과 굉장히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게 문제였기에 동정을 받으려야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증거인멸을 위해 불을 질러 죄 없는 '''12살의 어린 사촌 동생까지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완벽하게 막장스러운 보호자를 만나고 그 막장 보호자의 강압과 폭력을 짊어진 채 힘든 삶을 살다가 그 삶에 의해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나머지 보복성 살인을 했던 이은석과 달리[11], 사건의 책임을 박한상의 보호자에게 묻기에는 '''박한상의 죄가 너무 크고 불량'''했다. 실제로 이은석은 똑같은 존속 살해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한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법원에서도 그간의 가정 폭력을 감안해 이례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줬을 정도였다.

4. 상세


박한상은 1994년 살인사건 당시 나이 23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사립 고등학교인 현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었다. 방위 복무를 마친 뒤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 퍼시픽 칼리지 부설 어학원으로 영어연수를 갔으나 도박에 빠져 보호자가 대준 유학 비용을 죄다 날려 먹고 빚까지 졌다. 귀국해서 보호자님께 유학 시절 노름한 것과 방탕한 생활한 것에 대해 질타를 받게 되자, 결국에는 원한과 재산 상속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보호자를 살해하고 집에 방화한 희대의 패륜'''을 저질렀다.

4.1. 사건의 발단


1994년 5월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60-1번지에 소재한 1백억대 자산가 박순태 고려한약유통공사(현 고려허브) 대표[12] 부부의 집에 불이 나서 부부가 사망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 화재 사고로 처리했으나 형식적으로 실시한 부검에서 '''화재 현장에서 잔해로 발견된 시신이 각각 40여 군데 난자 된 상태'''임을 발견하고 살인 사건으로 보아 수사에 착수했다.

4.2. 범인 검거


결국 당시 여러 정황을 봐서 면식범의 소행으로 파악하던 경찰은 "'''박한상의 머리에 피가 묻었다'''"는 간호사의 증언과 박한상의 '''다리의 잇자국'''을 이야기한 친척의 제보로 수사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4.3. 범인의 도박중독


사건 당시 박한상은 미국에서 유학 중에 도박과 향락에 빠져 학업에 제대로 열중하지 않은 채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룻밤에 5천 달러를[13] 잃는 일이 비일 비재 했으며, 94년 1월 귀국해 아버지에게 혼다 어코드[14]를 사 달라고 졸라 1만 8천 달러를 '''받아''' 출국했지만 그 돈마저 도박으로 잃는다. 1994년 4월에는 보호자 몰래 귀국해 은행에서 발급 받은 카드로 사채업자에게 현금을 빌린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오렌지족 생활을 했다. 그러나 4일 만에 보호자에게 귀국한 것을 들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여전히 술, 마약, 도박에 빠진 생활을 하던 그는 오히려 3700만 원의 빚만 지게 되고 결국 아버지의 반 강제적인 호출을 받아 귀국했으며, 아버지로부터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라느니, "내 아들이 아니니 호적을 파 가라"는 식의 꾸지람을 들었다.

4.4. 범행


자신이 원하는 고급 승용차를 사주지 않고[15] 자신의 빚도 안 갚아주고 호되게 꾸중한다는 이유로 보호자에게 앙심을 품은 그는 본격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5월 13일 세운상가호남정유 주유소 등지를 돌며 등산용 칼, 휘발유 따위의 살인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5월 19일, '''속옷까지 다 벗어버린 알몸에 양손에 칼을 하나씩 쥐고 보호자를 40군데나 찔러서 살해'''했다. 옷을 벗은 것은 살해 후 샤워로 혈흔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였으나 칼에 난자 당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박한상의 종아리를 물어뜯어 결국 그가 검거되는 빌미가 되었다. 게다가 살해 후 샤워를 마친 뒤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했고 이 때문에 '''다른 방에서 잠자던 사촌동생마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16]
사실 화재 당시에도 오줌이 마려워서 나가다가 불이 나자 '''보호자와 이종 사촌동생[17]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도망간''' 그의 행색이 수상해서 경찰의 수사대상에도 올랐지만 당시 관점으로 친아들이 보호자를 그렇게 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집안의 문제아였긴 했어도 장례식날 기절까지 한 친아들을 처음부터 범인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4.5. 발각된 사유


하지만 경찰은 한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박한상만 이렇다 할 상처가 없고 특이하게 잇자국이 '''종아리에 남아있는''' 점과 머리에 묻은 타인의 혈흔, 살해잔해 등을 근거로 추궁하자 이내 박한상은 보호자의 재산을 노리고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자백했으며 그 자리에서 구속했다. 옷을 모두 벗고 나체인 채로 보호자를 살해한 뒤 사워를 해서 몸에 묻은 혈흔을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머리에는 피가 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지 않아서 범행이 발각됐다.

5.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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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인권변호사이자 바로 직전에 환경부장관을 지낸 황산성 변호사가 그의 변호를 자처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상술된 박한상의 진술인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직후에 사퇴한 것으로 보면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패륜아에게 법원은 관대할 이유가 없었다. 1심, 2심 모두 사형 판결이 났으며 지난 1995년 8월 25일 대법원은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한상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후 사형수의 신분으로 현재도 수감 중이며 현재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 폐지국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8]
게다가 박한상의 진술 중에 '''"미국 영화 장면을 보고 살인 수법을 배웠다."'''는 말 덕분에 많은 영화는 물론이요 애꿎은 애니메이션들이 도매금으로 올라서 탄압받았다. 심지어 ''''유산을 물려주는 게 범죄의 원인''''이라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을 한적이 있었지만 묻혔다.
당시 시사만화들을 보면 이홍우는 동아일보에서 돈을 수백억 모은 부자가 이런 사건뉴스를 보고 불안해하자 아들이 걱정 말라더니 병원으로 가면서 "'''아버님을 위하여 성전환을''' 하러 갑니다"라고 말하는 그림을 그렸다. 사실 가부장제로 인한 성차별 문제가 그나마 나아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라, 딸은 상속에서 차별을 받거나 아예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19]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성전환을 한다는 묘사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박재동 화백은 한겨레신문 '한겨레그림판'에서 이런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경악할 때 반대편에선 그 무렵 터진 대학교수 임용비리와 맞물려 매수된 대학 교수가 나오면서 "요즘은 돈이면 다 된다는 거 몰라?"라고 말하는 만평을 그렸다.
1년 뒤인 1995년 3월 14일에는 또 부유층 존속살해 사건이 일어나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서경대학교 교수 김성복이 부친인 덕원예고 이사장 김형진 씨를 살해한 사건. (황당하게도, 김성복은 출소 후 재단을 매각한 돈 중 78억을 고스란히 받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나면, 처음에 사형이 구형된 김성복은 어머니가 재판정에서 '아버지가 심하게 권위적으로 다루었다'라며 적극 감싸 준 덕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16년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는데,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 재단을 판 돈 130억 중 78억을 다른 자식들 몰래 김성복에게 증여했다. 그의 형제들은 '유산 노리고 아버질 죽인 패륜아가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게 말이 되냐!!'라고 분개했지만, 어머니의 증여의사가 확실하다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 와중에 김성복은 '''"내가 집안을 풍비박산 냈으니 다시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다"'''라고 개소리를 시전 중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793885)
언론에서 사형제에 관해 다루면서 나온 그의 근황은, 1997년과 2002년에 동료 수감자와 큰 주먹다짐을 하자 교도관들에 의해 독방으로 보내졌고 얼마 후 다시 다인실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수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경찰청 사람들 2015 7월 16일 방송분에서 모자이크 처리된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40대 후반의 중년이 되었는데 본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6년 동안 상담했던 양순자 교화위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모두 거짓이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호자를 살해하고도 반성은커녕 빠져나갈 생각만 하면서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모습에 느낀 참담함은 말할 수가 없으며 양씨도 상담해보고는 두손두발 다 들었다고 했다. 특히 박한상이 양순자 씨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위와 같이 한결 같았고, 양씨가 ''''보통 사형수들을 상담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많은데 박한상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며, 아예 상담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대책이 안서는 답이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20]

6. 여담


  • 이 당시만 해도 존속살해가 있어도 대부분 보호자와 자식 간의 갈등이 원인이지 이와 같은 계획적인 재산 상속 목적의 살해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에 벌어진 존속살해 사건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 그가 패륜 살인까지 저지르며 노렸던 100억대 재산은 동생이 모두 물려 받게 되었다[21][22]. 박한상의 동생은 재판 진행 도중 구치소로 형을 한 차례 면회 갔다가 참회는커녕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고, 그 후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검찰청과 교도소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비켜, 비키라고 XXX아!"이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뉴스영상을 통해 그대로 방영되기도 했다. 아무리 흉악범죄자라 해도 보통 이 과정에서는 다소 체념 상태로 말이 없이 지나가는데, 박한상은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폭언을 해댔다. 평소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이후 범죄자들 중에서도 이런 케이스가 정말 드물다.
  • 2002년에 개봉한 영화 공공의 적(영화)의 악역 조규환의 모티브가 되었다. 단, 조규환은 인성은 그야말로 쓰레기 그 자체이지만 직업적인 면에서만큼은 나름 잘 나가는 금융맨에 혼자서도 자산을 불릴 능력을 갖춘 엘리트인 반면, 박한상은 그마저도 아니다.
  •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방영된 뉴스자료: KBS, MBC
  • 당시 박한상을 수사했던 강남경찰서 서장이 배우 이하늬의 아버지인 이상업이다.
  • 1심(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1948)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황식 본인은 사형제 폐지론자에 가깝다. 다만 판결 자체는 당시 법리상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 비슷한 범죄자로 2002년 어머니와 할머니(노인)를 살해한 패륜아 김근우[23]가 있으며 미국에는 메넨데즈 형제가 존재한다.[24]
  • 사이트가 접속이 안 되지만 고려허브는 2020년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접속이 되지 않는)회사 사이트에 나왔던 연혁을 보면 1994년에 새로운 대표이사가 취임했다고 나온다.

7. 둘러보기





[1] 해당기사 참조.[2] 부모 살해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인지 보통 부모 두 사람만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같이 살고 있던 이종 사촌동생도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3] 한겨레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47세(1947년생), 어머니는 46세(1948년생)라고 한다.[4] 1991년에 박순태 등 전국의 한약업자 98명이 7억 5천만원을 출자해 세운 법인이다.(참고)[5] 막내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돼 있다.[6] 박한상이 고교생이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자동차 정비사가 꽤나 유망한 직종으로 거론되기는 했다. 물론 명문대 출신 전문직마냥 대우가 넘사벽이었던 건 아니지만, 일단 한 번 배워두면 평생 써먹을 수 있으면서 자동차 정비소 하나를 차리면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었으니까. 물론 최근에는 자동차정비업이 레드오션화가 된 데다가 전기차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인지라 완전히 옛말이 되어가고 있으며, 대표적인 기피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7] 전과를 통해서든 아니든 어떻게든 한의대로 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참고로, 한의대와 치대는 전과가 가능하다고 한다. 의대는 2015년에 전과 제도가 폐지되었다.[8] 원금 2,000만원. 아마 1,700만원의 이자를 포함한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9] 당시만 해도 강압과 폭력을 교육의 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박한상의 아버지가 딱히 막장보호자였던 것은 아니다.[10] 같은 보호자 밑에서 자란 친동생은 반듯하게 자란 것이 이를 증명한다.[11] 참고로 이은석은 형이 있었는데, 형은 대학교에 가자마자 막장 부모와 연을 끊었고 보호자를 살해한 동생을 옹호해주기도 했다.[12] 당시 대한한약협회 서울시지부장 역임.[13] Dollartimes 기준 환산 시 1994년의 5천 달러는 2016년 기준으로 8천 달러가 넘는 돈으로, 무려 800만 원이 넘는 큰 돈이다. 2016년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연봉이 4000만 원가량 (월 370만 원가량), 중견기업, 중소기업 급도 약간 적은 금액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히 돈지랄이라 할 수 있다.[14] 미국에서 소나타급의 중형차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상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차량이다. 겨우 23세의 대학생이 타기에는 상당히 고가의 차량이었다.[15]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는 차를 사라고 돈을 줬다...자기가 도박으로 받은 돈을 전부 날려 놓고 이랬다.[16] 다만 박한상의 동생은 학업 관계로 타지 거주중이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17] 당시 12살 국민학생으로, 사촌동생의 보호자(박한상의 이모 부부)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충주 수안보로 여행을 간 상태였다. 90년대는 학교 개근을 무척 중요시하던 시절이라, 함께 가지 못하고 친척에게 맡긴것.[18] 일반적인 무기징역은 최소 20년 이상의 형기를 살고 경우에 따라 가석방이 가능하다.[19] 법적으로 유류분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보호자가 주기 싫어도 무조건 일정부분을 상속받게 되어 있다.다만 이것도 법적으로 따로 청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20] 인터넷에 떠도는 사형수 근황은, 이런 식으로 언론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 아니면 철저하게 가려 듣는 게 필요하다. 보통 출처가 사형수 동을 맡는 교도관이 그랬다 카더라인데 사형수 동에 배치되는 교도관들은 은퇴한 이후라도 사형수들의 근황에 대해 절대 함구하도록 서약서를 쓰며 굳이 서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사형수 동에 근무했던 일 자체를 몹시 꺼림직하게 여기기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21] 민법 1004조는 직계 가족 및 보호자를 살해하려 하거나 살해한 사람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22] 비슷한 사건이, 연고자가 거의 없는 남자와 사실혼한 상태에서 몰래 혼인신고를 하고 내연남과 짜고 남자를 살해한 후 재산을 가로채려 한 남양주 니코틴 살인사건. 범인이 체포된 뒤 유산은 조카에게 상속되었다.[23] 카드빚을 갚아 주기를 거부한 가족들을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했고 아버지와 형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역시 사형 선고를 받고 현재도 수감 중이다. 다만 이 놈은 흙수저 집안이다.[24] 재산을 노리고 노인과 보호자를 살해한 형제 살인범. 둘 다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도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