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시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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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57년부터 1965년까지 유벤투스에 있으며 역대 유벤투스 득점 순위 5위에 랭크된 축구선수다.
60년대의 마라도나라고도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였다.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존 찰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공격진, 트리오 마지코(마법의 삼각편대)를 구축하며 유벤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항상 양말을 발목 밑까지 내리고 경기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소위 말해 '알까기'라 불리는 스킬을 애용했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하나이며 1961년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클럽 선수로는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1954년 아르헨티나 최강팀인 리베르 플레이트에서 데뷔했다. 당시 리베르는 La Maquina(기계)라는 별명으로 40년대 아르헨티나 축구를 평정했던 팀이었고 여기서 시보리는 앙헬 라브루나, 펠릭스 로우스타우와 같은 대선배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성장한다. 데뷔 시즌, 시보리는 16경기에 나서 8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리베르의 리그 3연패에 일조했다. 당시 리베르의 감독은 30년대 유벤투스에서 결승골을 자주 기록한 것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레나토 체사리니였고 그는 제자가 유벤투스로 넘어갈 수 있도록 했다.
1957-58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는 지난 시즌 9위라는 굴욕적인 시즌을 만회하고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거인 공격수 존 찰스를, 리베르에서 시보리를 영입했다. 1000만 페소로 종전 후안 스키아피노가 밀란으로 이적할 때 기록한 세계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며 이탈리아 무대에 입성한 시보리는 적응기 없이 리그에서만 22골을 넣었고, 보니페르티, 찰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공격진, '''트리오 마지코'''(마법의 삼각편대)를 구축하며 유벤투스의 10번째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다. 시보리는 첫 4시즌간 리그에서 89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였고 1959-60 시즌에는 득점왕을 차지했다.
1960-61 시즌에는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더비 매치인 데르비 디탈리아에서 혼자 '''6골을 퍼부으며 9-1이라는 굴욕적인 스코어'''[1] '''를 인테르에게 안겨주기도 했으며'''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참고로 인테르의 출전 선수 중 이 날 데뷔를 한 18살짜리 어린 축구 선수가 있었다. 이 소년 선수의 데뷔전은 이렇게 처참하게 끝났는데 그 소년 선수는 바로 후에 인테르의 60년대 전성기를 이끈 인테르의 레전드 산드로 마촐라였다.
1961년 시보리는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클럽 선수로는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62-63 시즌에는 악명 높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시보리가 뛰어난 선수라는 것에 이견은 없었으나 그의 태도는 문제를 야기했다. 시보리는 브라질 선수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고 굉장히 이기적인 선수였다. 또한 규칙을 좋아하지 않았고 팀을 위해 희생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1964-65 시즌 에리베르토 에레라[2] 가 유벤투스의 신임 감독이 되었고 규칙을 요한 그와 이에 반항한 시보리의 관계는 좋을 수가 없었다. 시보리는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유벤투스를 떠나게 되었다.
시보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토리노를 떠나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향했다. 브라질 선수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은 그였지만 공격수 조세 알타피니와는 별다른 문제 없이 호흡을 맞추었다. 1967-68 시즌을 앞두고 콜롬비아 투어에 참가했던 시보리는 무릎 부상을 입었고 부상에 시달리다가 196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19경기에 나서 9골을 넣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까지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귀화해 9경기 8골을 기록했다. 메이저 대회로는 1957년 코파 아메리카, 1962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57년 페루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대회는 아르헨티나가 아름다운 축구를 펼친 마지막 대회였다. 시보리는 오마르 코르바타, 움베르토 마스키오, 안토니오 안젤리요, 오스발도 크루스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었고 이들은 '더러운 얼굴을 한 천사들'이라는 별명을 얻음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에게 대회 2연패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시보리는 대회에서 3골을 기록했고 마스키오, 안젤리오와 함께 이탈리아 무대로 건너갔다.
사족이지만, 시보리와 다른 선수들의 해외 이적은 아르헨티나가 58년도 월드컵에서 실패하는데 일조했고 60년대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짓이라도 하는 결과주의 축구가 아르헨티나에 출현하게 된 계기를 간접적으로 마련했다.
시보리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이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고 1961년 이탈리아 대표팀에 승선한다. 함께 귀화한 마스키오와 함께 1962년 월드컵에 참가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특유의 성격 때문에 칠레전에는 벤치에 있었다.[3] 이탈리아는 1승 1무 1패로 서독과 칠레의 벽을 넘지 못하고 광탈.
3. 지도자 경력
1969년 로사리오 센트랄의 감독직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의 클럽들을 지휘했다. 1972년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1974년 월드컵에 진출시켰다. 이 기간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우발도 피욜을 대표팀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4. 은퇴 이후
1979년 감독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친정팀의 유벤투스의 남미 지역 스카우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5년 만 69세의 나이로 고향인 산 니콜라스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
5. 플레이 스타일
굉장한 테크니션으로, 위에서 서술한데로 드리블에 능했다. 이기적인 선수로 알려져 있으며, 자부심과 승부욕이 굉장히 강했다. 때문에 수비수들이 자신을 막는 것을 굉장히 혐오했고 이 덕분에 퇴장도 굉장히 많이 당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CA 리버 플레이트 (1954~1957)'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55, 1956, 1957
- 유벤투스 FC (1957~1965)
- SSC 나폴리 (1965~1968)
- 코파 델레 알피: 1966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1957
6.2. 개인 수상
[1] 데르비 디탈리아 역대 최다 점수차 스코어이다.[2] 파라과이 출신으로, 후에 인터 밀란을 지휘한 적이 있으나 카테나치오의 대가인 엘레니오 에레라와는 다른 인물이다.[3] 62년 월드컵 칠레-이탈리아 경기는 산티아고의 난투극으로 불리는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매우 폭력적인 경기였다. 카드가 남발했고 90분 내내 양 국가 선수들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경기 전부터 양 국가는 감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고 폭력적인 경기가 될 것임을 예상한 이탈리아의 마차 감독은 감정적인 시보리, 리베라를 벤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