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도 피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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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수문장. 남미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꼽히며 자국에서도 거진 원탑으로 쳐준다.[1]'''"내가 본 골키퍼 중 최고는 피욜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69년 5월 1일 킬메스에서 우라칸을 상대로 성인 무대에 데뷔했다. 2시즌간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피욜은 1972년 라싱 클루브로 이적했고 이 시즌 리그에서 무려 6개의 페널티 킥을 선방해내며 리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피욜은 1974년 아르헨티나 최고의 팀 중 하나인 CA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했고 1983년까지 10여년간 활약했다. 피욜은 리버 플레이트에서 7회의 우승을 차지했다.[2] 특히 1975년 첫 우승은 리버 플레이트의 18년 묵은 우승의 한을 풀었다.
피욜은 그 이후에도 3차례의 메트로폴리타노와 2차례의 나시오날 리그 우승을하며 CA 리버 플레이트에게 7개의 타이틀을 안겨준다. 피욜은 1977년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남미 올해의 선수상에 3번이나 2위에 랭크된다.
1983년 이후 피욜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CR 플라멩구 등 여러 팀을 전전했고, 1985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1년 동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차전에 3:1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그후 1986년에 라싱 클루브에 복귀했고, 1989년까지 활약하다, 벨레스 사르스필드로 이적해 활약하다, 1991년 만 40세의 나이로 벨레스 사르스필드에서 축구화를 벗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4년 감독이었던 오마르 시보리에 의해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써드 골키퍼의 지위로 그 해 1974년 서독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되었다. 아르헨티나는 2차 조별리그에서 강력한 네덜란드를 맞아 0-4로 두들겨 맞았고 피욜은 마리오 켐페스와 함께 이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3]
4년 뒤인 1978년 자국에서 열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피욜은 이제 넘버원 골키퍼가 되어있었다. 젼년도인 1977년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선수로 선정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건 덤. 다니엘 파사레야와 마리오 켐페스, 그리고 피욜 등의 맹활약으로 아르헨티나는 1차 조별리그에서 2위로 2차 조별리그로 진출했고, 폴란드를 꺾고, 브라질과는 비긴 후 페루를 6:0으로 격파하여, 결승전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도 네덜란드를 3-1로 꺾으며 첫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다. 피욜은 이 대회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경기 외적 요인 등 아르헨티나는 전체적으로 슬럼프에 빠진 팀이었고 결국 2차 조별리그에서 악명 높은 이탈리아, 브라질에게 동네북 역할만 했다.[4] 이후 네리 품피도에게 주전자리를 내주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우승을 TV로 지켜봐야만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피욜은 특유의 민첩한 모습으로 관중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슈퍼세이브를 만들어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기술 고문, 국가대표팀과 CA 리버 플레이트의 골키퍼 코치로 활동했다.2004년 친정팀인 라싱 클루브의 지휘봉을 잠시 잡기도 했다.
5. 이야깃거리
아르헨티나는 2008년 우발도 피욜 상이라는 것을 신설했는데, 이는 라리가의 사모라상처럼 시즌마다 가장 낮은 실점률을 보인 골키퍼에게 수상된다. 유명한 수상자로는 헤로니모 루이 등이 있다.
[1] 경쟁자로는 1921년 코파 아메리카 MVP에 빛나는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주전 수문장 네리 품피도 등이 있다.[2] 전기, 후기 리그를 분리해서 볼 시[3] 켐페스는 후반전에 출전하긴 했다.[4] 이 조별리그는 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로 꼽힌다.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 지쿠 - 소크라치스 - 호베르투 팔캉 - 토니뉴 세레주를 필두로 역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던 브라질, 그리고 사실 아르헨티나도 지난 대회 우승 전력들이 그대로 보존된 것에 초신성 디에고 마라도나까지 합류한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