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에른스트 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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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진압하고 선전용 인터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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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장군.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반군에 협조하였다가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되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포함한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보상으로 2계급 특진으로 대령이 되었고 32살의 나이로 소장까지 올랐다.
종전 후 네오 파시즘의 가장 선조격이라고 볼 수 있는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활동금지명령을 받고 해외로 도피하였다가 결국 스페인에서 사망한다.
2. 생애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노이브란덴부르크 출생으로 13살 때 연합 청소년단(뷘디세 유겐트 Bündische Jugend)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 20살의 나이로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육군 원수에게 추천받아 국가방위군 육군 보병 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2.1. 2차 세계대전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중위로 포병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하였고,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9기갑사단의 기계화보병 포병대 중대장으로 배속받아 발칸반도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1942년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사단 예하의 그로스도이칠란드 1연대 대대장[1] 으로 발령받게 된다. 그 해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전체가 하르코프 공방전에 투입되어 SS 1기갑, 2기갑, 3기갑 사단을 보조하였으며 결국 소모전 끝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때의 전공으로 레머도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히틀러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지휘관을 역임했던 각급 부대들 또한 국방군 내에서도 엘리트적 성격이 강한 부대였으며 레머 본인도 그러한 엘리트 코스를 향해 가던 중이었다.
2.1.1.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3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연대에 연대장으로 전속되게 되었다. 이때 운명적이게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늑대굴에서 히틀러를 처치하지 못한 채 발키리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레머도 다소간의 혼란이 있었으나 반 히틀러 세력이 나치당원의 반란이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복귀하고 난 바로 직후에는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묘사처럼 레머가 베를린에 남아 있던 괴벨스를 잡아들일 차례에 괴벨스를 마주하게 되면서 레머의 입장이 달라지게 된다. 당시 늑대굴 통신담당이었던 통신대장 에리히 펠기벨이 통신선을 모두 차단했었지만 SS를 비롯한 수뇌부 직통의 라인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괴벨스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레머는 괴벨스가 건낸 수화기 너머로 히틀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레머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에는 히틀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이 목소리가 히틀러 본인의 목소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2]
이 통화에서 히틀러는 반란세력을 죽이지 말고 모두 체포할 것을 명령하였고 레머와 수도경비대대의 병력은 반 히틀러 반란세력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다만 당시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프롬이 본인의 불고지죄를 걱정하여 주모자들을 모두 총살시켰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켜질 수 없었다. 레머는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총살 명령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도 모자라 암살자 그룹의 계획을 상부에 알리지 않은 프롬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프롬은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1945년 3월 12일에 총살당했다.
어찌 되었건 반란은 레머의 전향으로 진압될 수 있었고 당시 소령이었던 레머는 2계급 특진하여 대령에 올랐으며 총통경호대대를 증편한 총통경호여단의 여단장으로 발령되었다. 뿐만 아니라 레머의 반란 진압에서의 활약은 선전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홍보되기도 하였다.
2.1.2. 아르덴 대공세
1945년 세계 2차대전의 판세는 연합군 측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베를린의 총통경호여단도 다시 사단으로 증편되어 전선에 배치되게 되었다. 레머 본인도 32세의 나이로 소장에 진급하여 증편된 사단의 초대 사단장을 역임하였다. 아르덴 숲에서 일련의 방어전은 성과를 거두었긴 했지만 이미 전황이 기울었던 상황이었고 이후 연합군에게 체포된다.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옮겨지고 난 뒤 1947년, 석방되었고 독일로 돌아온 레머는 네오 나치즘의 시초격 정당인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을 창당한다.
2.2.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 창당
1949년 레머는 프리츠 도리스와 함께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창당하였으며 나치 독일의 인종 범죄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였고, 나치 독일 및 나치당의 여러 정책과 행동 등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미화하는 입장을 내세웠다. 또한 당시 연합군 군정 치하였던 상황에서 반 연합군의 스탠스를 취하며 소련과 연계하여 군정 치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서 소련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종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당에 우호적인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던 만큼 창당 후 2년여간은 정당 활동이 가능하였으며, 니더작센 주의회에서 16석을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2년 서독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당활동이 금지되고 해산명령이 내려지게 된다.
2.3. 이집트로의 해외도피
레머는 정당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지자 이집트로 도피하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는 군비를 확충해나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레머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이집트뿐만 아니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무기 관련 거래와 관련된 일을 하기도 하였다.
2.4. 귀국과 사망
이집트 및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수십년간을 보내다가 80년대에 서독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NATO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등의 기존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새로이 창설한 자유 독일 운동이라는 단체 또한 네오 나치즘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유대인 학살이 존재하지 않았고, 나치 독일의 여러 전쟁범죄들을 미화하는 잡지를 출간하면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4년여간에 걸쳐 상고까지 올라갔으나 그의 유죄는 인정되었고, 결국 레머는 스페인으로 도주하였다.
도피했던 94년에 이미 82세의 고령이었으며, 스페인으로 도주한 지 3년이 지난 97년에 사망했다.
3. 기타
90년대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관련된 증언이나 인터뷰자료가 많은 편이며, 네오 나치즘의 거두답게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당시의 시대적 유행이며 유대인에 대한 그러한 감정은 독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하기도 하였다. 소련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본인이 총통경비여단에 있을 때 히틀러에게 직접 묻기도 하였는데, 처음부터 전쟁을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소련은 결국 유럽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취할 것이 분명했기에 소련 일선 부대들이 확충되기 전에 먼저 공격한 것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 발동 초기에 거두었던 성과를 미루어보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 대전 당시 소련에 대한 인식과는 별개로 종전 이후에는 연합군, 나토군이 독일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유럽에 나토군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소련을 우호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2009년에 개봉한 영화이자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토마스 크레치만이 그를 연기했다.[3]
4. 주요 보직 및 진급내역
- 1933년 4월 1일 사관후보생
- 1935년 4월 1일 소위
- 1941년 4월 1일 대위
- 1943년 1월 1일 소령
- 1944년 8월 1일 대령(2계급 특진)
- 1945년 1월 31일 소장
- 1942년 4월 1일 ~ 1942년 11월 30일 -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4기갑척단병 연대
- 1944년 5월 1일 ~ 1944년 8월 1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베를린경비연대장
- 1944년 8월 1일 ~ 1945년 1월 31일 총통경비여단 여단장
- 1945년 1월 31일 ~ 종전 총통경비사단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