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제2대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جمال عبد الناصر | Gamal Abdel Nasser
[image]
<colbgcolor=#FFBF00> '''성명'''
가말 압델 나세르 후세인 ARجمال عبد الناصر حسين
'''출생'''
1918년 1월 15일
[image]이집트 술탄국 알렉산드리아
'''사망'''
1970년 9월 28일(향년 52세)
[image]이집트 카이로
'''사인'''
심장마비
'''정당'''
아랍 사회주의 연합
'''사상'''
아랍 사회주의
'''가족'''
압델 나세르 후세인(아버지)
파히마 나세르(어머니)
타히아 카젬(부인)
칼리드 압델 나세르(아들)
'''국적'''
[image]이집트
'''신장'''
183cm
'''종교'''
이슬람 수니파
'''직업'''
군인, 정치가
'''학력'''
카이로 대학교(법학)
이집트군사대학
'''군복무'''
'''국가'''
[image]이집트
'''복무'''
[image]이집트 육군
'''복무기간'''
1938년 ~ 1952년
'''계급'''
중령대령
'''참전'''
1952년 이집트 혁명
아랍-이스라엘 분쟁
1. 개요
2. 초기 생애
3. 임기 초기
4. 나라를 한 나라로
5. 임기 후기
6. 여담

[clearfix]

1. 개요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현대 이집트의 국부. 이집트 대통령(1956~1970), 아랍 연합 대통령(1958~1970).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범아랍주의를 추진하며 한 사상에 나세르주의라는 이명이 후렴되게끔 했던 세기의 정치가였다. 나세르 집권기간 이집트는 주변 인접국에 대한 혁명수출국의 반열로 격상됐으며[1] 그 뒤 이집트는 21세기까지 그런 역할이나 위상을 다시는 갖지 못한다. 이는 1,2,3세계로 분극화된 질서있는 난세에 나세르란 개인의 외교적 기량으로 한 국가의 국제지위에 변동을 주었다는 증거이다.[2]
이집트 북부 지중해 연안 출신으로, 그가 4살 때인 1922년 이집트 왕국은 법적 독립을 얻었으나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소유'''하는 등 여러모로 영국에 심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나세르의 친척 중에도 정치적 이유로 구속 수감된 사람이 있었다. 이래저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상흔이 강하게 잔존한 지역에서 안그런 곳이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유독 나세르는 영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표면상 자신도 반영인사의 필두로 인지됐다. 친소정책, 매진한 아랍 통일과 이집트의 산업화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 및 야당을 탄압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서구에서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건 당시도 지금도 개판인 아프리나카 중동, 서아시아의 정세를 기준으로 내려진 평가는 아니다. 1세계의 말석에 있고 북한의 수교국과는 교류치 않던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평가는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무바라크 이후 이집트간 관계개선이 이뤄진 뒤 재평가됐다.

2. 초기 생애


나세르는 1918년 이집트 북부의 지중해 연안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지만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어린 나세르는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자라났다. 1939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령인 앵글로-이집트 수단(Anglo-Egyptian Sudan)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나세르는 훗날 이집트 대통령이 되는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영국과 싸우던 이탈리아의 첩보원 몇 명과 접촉했다. 그들은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침공했을 때 영국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패배했고 나세르의 계획은 실패했다, 나세르는 쉽게 이집트를 독립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영국에 반대하는 모임인 자유장교단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소령 신분으로 아랍 연합군에 참가한 나세르는 아랍 연합군이 패배하자 이집트로 돌아왔다. 당시 32세의 파루크 1세 이집트 마지막 국왕은 돈을 물쓰듯 했고 사치에 열중이어서 나세르를 포함한 자유장교단쿠데타를 계획한다. 1952년 7월 23일에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성들을 포박하고 정권을 잡아, 1953년에 왕정을 폐지한 후 제1차 중동전쟁에서 활약한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을 수반으로 한 혁명지도평의회가 결성되자 이집트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된다.

3. 임기 초기


1952년 나세르는 육군 대위였는데 이때 자신과 안와르 사다트 등의 자유 장교단이 지도력에 문제가 많던 파루크 왕정을 쿠데타로 퇴출시키고 그의 아들인 푸아드 2세를 꼭두각시 왕으로 즉위시켰다가 1953년에 폐위한 후 나기브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3][4] 나기브는 1954년 퇴출되고 나세르가 총리에 취임했다. 나세르는 국왕 일가의 망명을 허용했고, 파루크 1세 국왕은 와인 상자에 돈을 가득 채워 유럽으로 망명했고 유복한 생활을 누리다가 1965년 로마에서 점심을 먹던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선 하급장교가 국권을 장악하는 이런이 생각보단 많으나 한마디로 육군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5]
나세르는 국왕에 충성하던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부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시킨 것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제대 선에서 숙청을 마무리지었고 귀족들에 대해서도 귀족제도를 폐지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재산의 일부를 빼앗는 등의 조치를 취해 나라를 안정화시켰다. 나세르는 1952년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구 왕정 치하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범아랍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라크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과 연대해 "바그다드 조약기구" 결성에 반대하며 아랍 각국간의 단결을 외치면서 아랍권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1955년에는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지금은 크로아티아령인) 브리오니 섬에서 네루 인도 총리와 함께 3자회담을 가졌다. 그 이후 대표적인 제 3세계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1956년에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6년 1월에는 팔레스타인가자지구 난민처리를 놓고 이스라엘과 극비회담을 진행했고, 이스라엘과 화해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이집트로 팔레스타인 난민을 이주시키는 것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방 및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동시에 접근하며 서방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지원받았고 동구권에선 체코슬로바키아산 무기를 많이 들였다. 그런데 아스완 댐 건설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지만 동구권 무기를 들여오는 것에 자극받은 서방에서 건설 비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세르는 열받아서 동구권에 상당히 기울어졌다. 같은 해 영국 소유이던 수에즈 운하를 전격적으로 국유화한다고 선언해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에선 나세르를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파악했고 모세 다얀이나 다비드 벤구리온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의 수뇌부들은 나세르의 침공을 우려해서 예방전쟁과 도발을 통해서 여러 차례 그를 자극했다. 하지만 아랍 통합으로 아랍 내부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나세르는 이스라엘이나 가자 지구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수에즈 전쟁6일 전쟁으로 잇달아 이집트와 전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이집트가 패배했다.
제3차 중동전쟁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고 밝히고 다시 컴백,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은 자기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가정 하에서 짐짓 하야하는 척 하거나 하야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였다.

4. 나라를 한 나라로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합쳐 아랍 연합 공화국이 됐다. 나세르 본인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서로 다른 국가를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고, 이집트 쪽이 인구수가 월등히 많고 면적과 인지도가 앞서서[6] 시리아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시리아측의 불만이 점점 늘어갔다. 결국 1961년 시리아가 쿠데타로 독립을 선언하며 재분리해 '''3년 천하'''로 끝내 분열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랍 국가의 추가 가입 가능성을 의식해 아랍 연합 공화국의 국호가 계속 유지됐다.

5. 임기 후기


1962년 북예멘 내전에 개입해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고 많은 이집트 군대를 보내 공화파를 도왔다. 1967년 시리아와 대 이스라엘 포위진을 짰으나 많은 군대가 예멘에 묶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패배해 시나이 반도를 상실한다. 이것이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나세르의 이집트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의 국가 승인불가, 이스라엘과의 교섭불가, 이스라엘과의 화평불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회복을 내세우며 강경노선을 택했다. 한편 나세르는 도피 중이던 나치의 전범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업무는 이집트군과 정치기구의 양성, 그리고 반유대주의 선전물 작성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집트 정보국에서 반이스라엘 선전을 담당한 전 나치당의 선전활동가인 요한 폰 레르스(Johann von Leers)와 이집트 국가정치국에서 활동한 전 게슈타포의 간부인 레오폴트 글라임(Leopold Gleim)이 있다.[7] 이에 1960년대 이스라엘 정부는 이집트가 독일군의 과학기술을 입수해 로켓 개발을 하는 것을 꽤나 우려했다고 하며, 나치의 과학자로 일하며 로켓 개발을 담당했던 자를 이집트에 스파이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나세르는 나치에 적대적인 소련과는 우호관계였기 때문에 나치간부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소련중국,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권 및 공산국가들의 협력을 얻어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지만, 국내에선 수에즈 운하의 수입이 줄어들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경제적 성장에 실패하여 나세르 정권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걸었다.
그러던 중 1970년, 불과 52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원복가로세로 세계사 3권에서는 끝내 이스라엘을 못 꺾고 죽다니라고 원통해하면서 사망하는 걸로 묘사되지만 6일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로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의 패배를 목격하고 실의에 빠졌으며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고 있었다. 여기에 반발한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면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중동 전체를 개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나세르의 혈압을 올리고 있었고 나세르는 인생 말년에 중동 지도자들을 화해시키는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67년 이래로 심장병을 앓아온 나세르는 이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무리하게 정상회담에 나서 아랍 정상들 간의 관계를 중재하느라 크게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리고 9월 27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PLO 등 아랍 각국의 수장들을 모아놓고 화해를 호소한 후 쿠웨이트의 에미르를 환송한 직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9월 28일,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이집트는 물론 아랍 전체가 광란에 가까움 슬픔에 빠져들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아랍 각국의 지도자들이 몰려들어 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 후세인 1세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나세르를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2번이나 기절했으며 나세르의 죽음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아라파트도 계속 흐느꼈다. 하지만 나세르와 소련의 밀월을 불편하게 여겼던 서방 국가들은 그의 죽음을 무시했고, 반면 소련에서는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을 파견하여 조문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수상은 그를 전쟁광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빈정대는 촌평을 남겼으나 이스라엘의 아랍계 시민들의 애도를 허용했다. 그의 후임으론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으며 안와르 사다트는 갈고 닦은 이집트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회치기 위해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상당히 선전했다. 이후 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맺어 이스라엘을 정식국가로 승인하고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자 흥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다트를 암살했고, 그 뒤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잇게 된다.

6. 여담


  • 아랍의 봄이 성공했던 국가들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제명되지 아니한 인물이다. 상술했듯이 워낙 이집트 쪽에서도 지지자가 매우 많고 이집트 경제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수에즈 운하시나이 반도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로부터 되돌려받은 인물이다 보니까...
  • 무아마르 카다피와 친분이 있다고 한다. 카다피가 리비아군 대위 시절부터 같이 산책을 할 정도였다. 원래 카다피는 나세르를 존경했고 혁명 후에 카다피는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를 본받아 자마히리야 체제를 필 정도였다.
  •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나세르를 매우 높게 평가한 정치인중 한 명이다. 나카소네가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시절 이집트를 방문하여 나세르의 사저에서 나세르와 회담한 적이 있는데 그 검소함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 국산 SF 모바일 게임 엘라의 2048에는 나세르의 DNA로 탄생한 클론소녀 섀런이 등장한다. 진짜 나세르와는 반대인 성격이 나와 실패작 취급을 받는 듯한 불쌍한 소녀.
[1] 한창때는 아랍 전역과 제3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여 아랍 최고의 라디오 스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인 연설로 이름을 날렸다. 그 때문에 요르단과 예멘에서는 라디오 몰수 조치를 할 정도였다[2]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를 계승했지만 정책 전반에서 과격한 급진책으로 급반전하다 암살되고 호스니 무바라크는 그 조율을 잘 이뤄내 나세르처럼 패업을 달성하진 않아도 국정과 외교의 실리를 획득한 끝에 장기집권하였다.[3] 이때 하류층에서 지지가 많았던 무슬림 형제단과 많이 협력했다.[4] 이인태, '끝없는 테러공격: 테러리즘의 이해와 중동 테러 공격전술', 책과나무, 2016, p.109[5] 반면 나세르의 1952년 쿠데타에 고무되어 일어난 1958년 이라크 쿠데타는 학살, 약탈, 폭동으로 점철된 혼란의 절정이었다.[6] 물론 시리아도 역사적으로 볼때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길지만 하필 이웃이 이집트 아니면 이라크니..[7] 그 밖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진압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도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이 정당해산 명령을 받게되자 이집트로 잠시 도피해오기도 하였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