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이름
'''Anton Ludwig August von Mackensen'''
안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1]
출생
1849년 12월 6일, 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작센
비텐베르크 하우스 라이프니츠 (Haus Leipnitz)
사망
1945년 11월 8일(향년 95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하노버 헤비호스트(Habighorst)
복무
프로이센 왕국군(1869년 ~ 1871년)
독일 제국군(1871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20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대십자 철십자장
푸르 르 메리트
1. 소개
2. 생애
2.2. 제1차 세계 대전
2.3. 전간기 그리고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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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최후의 후사르(Der letzte Hussar)'''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제국군 장군으로 보불전쟁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나치의 집권부터 몰락까지 지켜본 인물.
프로이센 왕국 → 독일 2제국 → 공화국 → 독일 3제국 → 패망 후 점령까지 체험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49년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비텐베르크 근교 달렌베르크(Dahlenberg) 근교 하우스 라이프니츠(Haus Leipnitz)에서 태어났다. 농장의 관리인이었던 부친은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라서 1865년에 할레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보냈다. 1869년에 제2친위후사르연대(Leib-Husaren-Regiment Nr. 2)에 자원입대했고, 보불전쟁에 참전해 2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소위로 승진하는 등 공을 세웠다. 제대하고 나서 한때 할레 대학을 다녔으나 1873년 다시 군에 들어가 빌헬름 2세의 군사사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이때의 인연으로 빌헬름 2세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참모본부에서 복무(1891년~1893년)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창안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당시 참모총장이었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후 제1친위후사르연대(Leib-Husaren-Regiment Nr. 1), 친위후사르여단(Leib-Husaren-Brigade), 단치히에 주둔하던 31사단을 지휘했으며 1908년에 제17군단의 군단장이 되어 대전 발발 직후까지 지휘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최후의 후사르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는 그의 참모장 젝트와 함께 독일 제국의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다[2]. 1914년 8월 타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하고, 그 해 11월 제9군 사령관이 되어 세르비아 왕국을 정복했다. 이듬해 4월 제11군 사령관으로 옮겨 고를리체를 함락시키며 러시아 전선을 돌파[3], 이 전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이후 세르비아 전역에서 마켄젠 집단군(독일 제11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3군, 불가리아 제1군)을 지휘하여 세르비아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세르비아 왕국군의 잔존전력이 알바니아로 퇴각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세르비아군은 프랑스에 의해 재무장되어 발칸 전선에 재투입된다. 1916년에 루마니아 왕국이 참전하자 1개월만에 루마니아를 탈탈 털고는 종전 때까지 루마니아 군정 총독으로 있었다.

2.3. 전간기 그리고 말년


[image]
마켄젠의 90세 생일을 축하하러 온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좌측 프로이센 기병원수 예복을 입은 노인이 마켄젠.
1918년의 휴전협정 이후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 억류되어 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고, 1920년에 전역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반대하였으나 힌덴부르크 등처럼 정계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1933년에 헤르만 괴링은 그를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 나치 시대에 그는 군주제 지지자로 남아 있었으며 간혹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그의 기병 원수 군복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
1935년 장검의 밤 당시 슐라이허가 숙청당하자 장군참모협회에서 히틀러와 괴링에 대해 비난연설을 했다. 이에 히틀러는 프로이센 브뤼소의 토지 1,250 헥타르를 줬고, 매수된 마켄젠은 연회를 열어 히틀러를 초대해 화답했다.[4] 그 땅은 원래 호엔촐레른 왕가 사유지 였기 때문에 카이저는 불쾌감을 드러냈다.[5]
1945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에 입성한 영국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나 11월 8일 96회 생일을 얼마 앞두고 하노버 주에서 사망하였다.

3. 여담


  • 예의를 갖춰야 할 자리가 있으면 항상 프로이센 기병 예복 차림을 하는 걸로 유명했다.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제국으로 바뀌고 말이 자동차와 전차로 바뀌었으며 다른 원수들이 모두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예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만큼은 항상 프로이센 기병 예복을 버리지 않았다. 당장 위의 사진들에서도 전부 프로이센 기병 예복을 입고 있다.
  • 마켄젠이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힌덴부르크보다 2년 늦게 태어났고(1849년생) 보불전쟁 당시에 자원입대까지 했던 사람이 힌덴부르크보다 12년을 더 살아 나치 독일이 패전하고 2차 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 후반까지 살았다.
  • 두 번 결혼[6]해서 4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 전처 도로테아의 소생이다. 그의 3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1889-1969)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군 장성으로 기병 병과를 선택하여 상급대장까지 진급했고 동부전선과 이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체포되어 로마에 소재했던 영국 군사법원에 의해 전쟁범죄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47년 10월 2일부로 그의 형량은 21년 징역으로 감형되었고 5년간 복역한 후 1952년 10월 2일에 석방되었으나 다른 나치 시절 장성들처럼 서독 군대에 참여하지 않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노르토르프 근처 알트 뮐렌도르프에서 죽을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계획한 마켄젠급 순양전함 1번함 마켄젠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왔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시나리오 시작 당시 독일 제국의 육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은퇴 이벤트가 뜨며 리타이어한다.
  • Hearts of Iron IV에서 나치 독일 플레이시 국가 중점으로 히틀러에 반기를 들면[7] 독일이 둘로 나눠져 내전이 시작되고 마켄젠이 독일군사정부의 지도자로 나온다. 고증대로 군주제 지지자로 나오며 이후 다시 황제를 데려와 독일 제국을 만들거나 선거제를 도입해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국을 수립할 수 있다.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마켄젠'이 되지만 '마켄젠'으로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물론 현대 한국 대중들 에게 있어서 이름이라도 잘 알려진 이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정도[3] 그러나 애초 동맹국이 목표로 했던 러시아 주력군의 포위섬멸은 러시아군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마켄젠을, 그리고 나레프 강 유역에 힌덴부르크를 오랫동안 묶어놓는데 성공하면서 달성되지 못했다.[4] 마켄젠 원수는 1차 대전의 뛰어난 명장이고 왕당파의 거두였으므로 그를 죽인다면 국방군 내 왕당파(von자 들어가는 장군들)의 복종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계산 하에 그를 달랜 것이다.[5] Black Marks: Hitler's Bribery of His Senior Officers during World War II, NJW Goda번역본[6] 도로테아 폰 혼(Dorothea von Horn) (1854–1905), 레오니 폰 데어 오스텐(Leonie von der Osten) (1878–1963, 1908년 재혼)[7]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첫 중점인 라인란트 재무장의 대체 중점이다(독일 AI는 역사적 진행시 무조건 라인란트를 가장 먼저 찍는다). 마켄젠을 중심으로 한 귀족 및 왕당파 장성들이 라인란트 재무장에 반발해 휘하 병력 및 반나치 민병대를 이끌고 봉기하는 설정이며, 이에 맞서기 위해 히틀러 역시 슈츠슈타펠을 무장시키고 친나치 및 잔류파 장성 휘하 병력들을 이끌고 방어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