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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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后 于氏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형사취수제를 통해 왕후의 자리를 2대 동안이나 유지하고 권력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2. 생애
2.1. 고국천왕 시기 (180~197년)
고국천왕 2년 2월에 고국천왕의 비였다 왕후가 되었다.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라고 한다. 다만 '우'가 성씨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후 고국천왕 12년 9월에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왕이 제지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왕후가 선대 신대왕의 왕후를 말하는지 우씨를 말하는지는 모호하지만 후자일 경우 상당한 권력의 상실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귀족출신들이 권력에서 배제되고 안류, 을파소 등의 재야출신의 왕의 심복들이 권력을 잡고, 백성들에 대한 선정을 베풀었다.
2.2. 발기, 연우와의 만남
그러다 197년 5월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우씨는 왕의 사망을 숨기고 왕의 동생인 발기를 찾아가 후사를 논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후계자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인지 발기는 야밤에 찾아온 형수를 외면했고, 우씨는 대신 다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발기와는 달리 연우가 예를 갖추고 우씨를 맞이하자, 연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씨는 발기를 모함하고 연우에게 자신의 호위를 부탁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와중에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고 언급해,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 외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럴 만한 이유 및 상황이 충분히 잘 들어맞는 것이,
우선 '''발기에겐 고국천왕의 승하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버젓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2] )이러니 당연히 발기 입장에선 차기 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왕의 후계자에 대한 말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왕조 시절엔 왕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자기 집안 전체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역모 사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왕이 가장 두려워 하는게 쿠데타고, 후계자 문제도 매우 민감했었다. 우씨는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일단 찾아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이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발기였기에 명분 쌓기 용으로 찾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에겐 고국천왕이 승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 그것도 어느정도 얘기를 진행하면서 이 사람이 차기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미 연우와 어느정도 정치적으로 합의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후에 발기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호응해주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문제도 충분히 계산되었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ㅡ삼국사기
참고로 이전 서술에는 연우가 미혼이라 했으나 발기가 엄연히 처자식을 언급했으므로 미혼일리는 없다. 다만 연우 스스로가 왕위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므로 우씨와 고국천왕 생전에 어느 정도 연계고리를 구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처자식을 버리고 우씨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오히려 왕위를 위해 처자식까지 버린 연우의 냉정함을 이야기할 수 있다.[3]
하여간 덕분에 발기가 유력했던 고구려의 왕위는 연우에게 돌아가게 되고 그가 바로 고구려의 10대 왕 산상왕이다. 분노한 발기는 요동태수 공손탁(또는 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것을 왕의 막내동생 계수가 진압한다. 이후 계수는 형인 발기의 잘못을 꾸짖었고 결국 왕실과 나라에 큰 위기를 몰고왔다는 죄책감에 발기는 자결하고 만다.
2.3. 산상왕 즉위 이후
그 뒤 왕위를 차지한 산상왕은 우씨 덕에 왕위를 얻은지라 다시 장가들지 않고 그대로 우씨를 왕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씨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고 그를 고민하던 왕은 산천에 기도를 하다 꿈에 작은 왕후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우씨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왕후 들일 엄두도 못냈던 왕은 신하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을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에게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몇년 후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쳐서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마을의 예쁜 여자인 후녀의 도움으로 잡게 되고 그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그 마을에 방문해 후녀와 관계를 가지고 아들을 낳으면 버리지 않기로 약조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격분한 우씨는 질투해서 병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으나 후녀의 기지로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되려[4] 그 사실을 병사들이 왕에게 알려서 정식으로 작은 왕후로 맞이하는 결과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작은 왕후가 된 후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11대 국왕 동천왕이다. 하지만 왕후는 그런 작은 왕후와 왕태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시녀를 보내 일부러 국을 쏟게 하거나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자르는 등 괴롭혔고 왕태자로 즉위도 태어난지 4년 후에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효심이 깊고 온화했던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산상왕 28년에는 왕손 연불, 12대 국왕 중천왕도 태어났다. 이후 산상왕이 승하하고 동천왕이 즉위하자 왕태후로 봉해진다.
2.4. 사망
234년(동천왕 8년)에 사망한다. 사망하기 전에 유언하기를 살아서 한 짓을[5] 돌이켜 보니 면목이 없어 고국천왕릉에는 묻힐 수 없고 산상왕의 무덤에 장사지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당이 와서 말하길, 고국천왕이 아내가 동생과 합장되는 걸 보고 대노하였고,[6] 그가 세상 사람들 보기 부끄러우니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국천왕의 무덤 주위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서 무덤을 가렸다.[7]
3. 평가
인륜을 어긴 악녀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유교가 중심인 조선시대에서는 거의 동물과 같은 취급을 할 정도. 정절이라는 관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정상적인 계승권자라고 할 수 있는 고발기를 타당한 이유도 없이 자기 임의대로 배제하여 발기의 난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팜 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능동적으로 행동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 시대 여성 중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4. 기타
- 상당히 장수한 인물인데, 고국천왕과 혼인한 180년을 기준으로 생년을 추측하자면 160년~165년 사이인데 234년에 사망했으니 60대 후반~70대 중반까지 장수해 동천왕 재위 초반 때까지 생존해있었다.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8]
- 관련 창작에 대해서는 좀 아쉬운게 당시 고국천왕의 다섯 형제 모두와 연관이 있고, 권력을 쥐는 과정과 몰락의 과정도 재밌고, 을파소 등의 네임드 인물도 많이 나오고, 시대적으로 보면 중국에서는 삼국지 시대의 가장 중심에 살았던 인물이라 드라마나 소설로 쓸 여지가 많아 보이는데도 관련 미디어 작품이 거의 없어 의아한 인물이다. 그런데...누가 그걸 진짜 그렸다. ... 네이버 베스트도전 웹툰으로도 나왔는데, 작화와 고증이 매우 호평받고 있다. # 해당 웹툰은 2020년 6월 1일부터 버프툰에서 정식연재되고 있다. 왕후의 제국 문서 참고.
[1] 생년은 확실치 않으나 고국천왕 재위 2년인 180년에 혼인했기 때문에 160년~165년 전후로 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2]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조 "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于氏)는 임금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밝히지 않고...(이하 생략)''' ''[3] 다만 고구려의 왕들에게서는 중혼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원래 처를 작은 왕후로 내리고 유력한 우씨를 첫째 왕후로 받아들인 것일 가능성도 크다. 참고로 원래 처자식은 형 고발기의 반란 때 모두 죽었다. 그리고 산상왕 고연우는 본왕후 우씨의 자식이 아니라 한미한 평민 출신 작은 왕후인 후녀의 소생 고교체를 태자로 임명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산상왕은 동천왕 이전엔 아들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우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4] 이때 후녀가 임산부라 그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렸다. 자신을 죽이면 왕의 자식도 죽이는 셈이 되는데 그 결과는 처형은 기본 가족까지 연좌되지 않는게 다행인 처벌을 받게 된다. [5] 여성으로서의 절개를 깨뜨리는 형사취수를 시행한 것도 모자라 왕위 계승에 대해서 같은 고국천왕의 동생인 고발기에게는 전혀 일언반구도 없었고 그 밑에 동생에게만 말해준 것 등을 말한다.[6] 심지어는 둘이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고국천왕이 산상왕에게 따지는 형식이었겠지만[7]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8년조 '''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8] 우씨의 출생 시기로 추정되는 160~165년 사이 태어난 삼국지 등장인물은 유비(161년생), 순욱(163년생)이 있는데 두 사람은 우씨보다 10년, 20년씩 일찍 죽었다. 그리고 우씨와 같은 해인 234년에 사망한 사람으로 제갈량, 헌제 유협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181년생으로 우씨에겐 자식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