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하라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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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原万里, 1950-2006
1. 개요
2. 생애
2.1. 어릴 적
2.2. 작가 및 통역가
3. 작품 일람
4. 여담


1. 개요


일본러시아어 동시 통역사 및 작가.

2. 생애



2.1. 어릴 적


1950년에 일본 도쿄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이 프라하로 이주하여 1959년에서 19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공부했다.
프라하 거주 당시 다녔던 소비에트 학교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주재하던 각국 외교관이나 공산당 고위 간부,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일종의 특수 명문학교였고, 이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이 없어야 되는데, 왜 우리 학교 친구들은 다들 특권계급 티가 줄줄 날까?" 라는 의문을 여러 번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외교관의 딸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입주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가정부를 다락방에서 재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굳어버렸다고 할 정도. 하지만 프라하를 떠나고 20~30년 후 옛 친구들의 자취를 찾아 다시 프라하에 찾아갔다가, 소비에트 학교가 있던 시절부터 학교 앞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노부인과 대화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어를 잘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노부인에게 '어렸을 때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소비에트 학교를 기억하고 있던 노부인이 '그 학교는 스쿨버스도 운영했고, 선생님들도 매일 옷을 바꿔입는 멋쟁이였고, 학생들도 있는 집 자식이라는 티가 났다' 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그렇게까지 티가 났단 말인가' 라고 또 한번 씁쓸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특수한 학교답게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수준의 학생들간의 관계, 또는 학교 내의 분위기에서도 각국의 정치적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자신이 자국을 대표한다고 느끼고 있었고, 서구권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련 및 동구권 출신 학생들이 서구권 출신 학생들(대부분 서구권 공산당에서 파견된 외교관 집 자식들)과 관계를 자제한다거나, 티토가 지도하는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관계가 경색되자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체제를 소개하는 유고슬라비아 학생에게 소련 출신 교장이 직접 시비를 걸었다고 할 정도. 당장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당시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좌파로 분류되던 일본 공산당 출신인 자신이 우파로 분류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출신의 학생과 친구가 되면 '사상과 이념이 사람 사이의 우정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유고슬라비아인 친구를 사귀려고 했다고 할 정도. 물론 학교를 떠난 후에도 이런 정치적 특수성은 여전해서, 30년만에 옛 친구들을 찾으러 떠난 길에 유고슬라비아 출신 친구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그 친구 아버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이던 보스니아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다거나[1], 그리스 출신 친구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자 대뜸 '혹시 정치적 암살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대화를 주고받는 등, 꽤나 황당하기까지 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2.2. 작가 및 통역가


그 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서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까지 수료했다.
러시아어 번역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 취직이 되지 않자 시간때우기 겸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얼마 후 동구권 붕괴 소식이 들려오자 갑자기 사장이 휴가를 한달이나 내주면서 "앞으론 죽도록 바빠질테니 최소 몇년간은 쉬고싶은 생각 안 나도록 푹 쉬고 오라" 고 했다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소련 및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러시아어 번역자의 업무량이 폭주했고, 이 당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 때 받은 번역료 덕분에 친구들을 찾아 동유럽에서 돌아다닐 때 객실 하나를 전세내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정도라고. 일본 러시아어통역협회에서 초대사무국장을 지냈고 1992년 SJ 상을 수상하는 듯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작가로서는 주로 에세이를 집필했으며, 본인의 경험을 녹여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대체로 개인의 경험과 내면으로 대표되는 미시서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문단 주류와는 달리 대하서사에 가까운 거시서사를 익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녀서 유부녀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었다.
2006년 56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일람


  • 프라하의 소녀시대
  • 교양 노트
  • 속담 인류학
  • 미식견문록
  • 미녀냐 추녀냐
  • 문화편력기
  • 올가의 반어법
  • 마녀의 한 다스
  • 발명 마니아
  • 대단한 책
  • 언어 감각 기르기
  • 팬티 인문학
  • 차이와 사이
  •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 러시아 통신
  • 유머의 공식

4. 여담


  • 아버지 요네하라 이타루는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공산당원으로써 반정부 지하활동에 몸담고 있었고, 전후 중의원 의원까지 지낸 일본 공산당의 주요 간부 중 하나였다. 친척 중에는 현 참의원 아리타 요시후가 있다. 애초에 일가의 프라하 이주 자체가 일본 공산당 대표로 당시 범세계적 공산주의 정당간의 교류조직이던 잡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것을 계기로 한 것이었고, 이 잡지의 편집부에 파견된 각국 공산당 대표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대사급 외교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 아버지 요네하라 이타루의 경우,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 활동에 투신하여 제국주의 시대에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내에서 공산당 탄압이 극심하던 당시, 부모와 형제들이 '빨갱이짓을 그만두면 뭐든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 며 제발 공산당 활동을 그만두고 결혼이라도 해서 자리잡고 살라는 뜻으로 여러차례 미리 재산을 나눠주었지만 그 때마다 '넹. 투쟁자금 주셔서 ㄳㄳ' 하면서 당에 재산을 헌납했다고 할 정도. 다만 2차대전 패전 후 일본 공산당의 활동이 허용되면서 지하운동을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합법정치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까지 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지역 유지였던 요네하라 집안 입장에서도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여 집안의 세력을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한 믿음직한 친족이 되었지도 모른다. 소속 정당이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한 지방 권력 체계를 가장 적대적으로 견제하는 입장이던 일본 공산당이긴 하지만.(...) 자민당의 세력이 극히 강했던 농촌지역에서 공산당 소속으로 연거푸 당선되었던 것 자체가 해당 지역 최대의 유지(=지방 세력가)였던 요네하라 집안 아들+공산당 간부라는 이중 버프를 받아서 지주나 지역 유지/자산가+노인등 지역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 기득권층과 그 기득권층에 반발하는 청년+지식인 및 개혁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싹 긁어모아버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 또 여담이지만, 지하운동 시절 동지였던 요네하라 이타루와 결혼했던 마리의 어머니가 전쟁이 끝나고 수배가 풀린 후 남편과 함께 시집에 들어와보니 길거리를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마저 '요네하라댁 며느리' 라는 이유로 꾸뻑 인사하고 지나갔다고 하는 일화로 보아, 해당 지역에서는 상당히 위세가 대단했던 집안으로 보인다.
  • 요네하라 마리의 동생 이노우에 유리(결혼 전 성은 요네하라 유리)의 남편(요네하라 마리의 제부)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경우,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식민지배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주장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원래 요네하라 마리&유리 자매 모두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팬이었는데, 친구의 소개로 이노우에 히사시를 만나게 된 마리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생을 소개하여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는 성공한 팬질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그리고 2008년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측 기조발제자로 참여한 이노우에 히사시가 억압적 제국주의에 저항한 한중일 3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소개한 김산, 루쉰, 요네하라 이타루 중 요네하라 이타루는 (당연히) 이노우에 히사시의 입장에서는 장인이 된다.
  • 3살 아래인 여동생 이노우에 유리는 이탈리아 요리 전문 셰프이며 언니에 관해 언니 마리라는 책을 썼다.

[1]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찾기 위해 일단 친구의 아버지(=친구네 집안)의 행적부터 추적하고 있는데, 친구 아버지의 성만 알지 이름은 몰랐던 것. 그래서 성씨와 함께 '젊은 시절 반 나찌 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역임했다'는 경력만으로 그런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자 '그 집안에는 6형제가 있는데 모두 반 나치 파르티잔 활동을 했고, 그중 외교관 경력이 있는 건 막내인데, 막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전) 보스니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는 대답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 요컨데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누구나 이름 정도는 알만한 정치 명문 집안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