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비아누스

 



[image]
'''휘'''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생몰년도'''
331년~364년 2월 17일
'''재위기간'''
363년 6월 26일~364년 2월 17일
331년에 신기두눔(현재는 세르비아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요비아누스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근위대에 들어간 뒤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자 종군하였으며,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요비아누스도 종군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자마자 요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시아 황제와의 협상이 잘 돼서 페르시아 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도시 앙카라와 티그리스 너머의 로마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아울러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해야만 했다.[1]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마술을 믿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했을 정도로 기독교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때가 아니라 사실상 요비아누스의 치세 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덕분인지 죽어서 성당에 묻혔다. 상당히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요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굴욕적인 강화라는 무리수를 둬 가면서 빠르게 퇴각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퇴각 도중에 다다스타나[2]라는 곳에 차려진 자신의 천막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였는데,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죽음은 당대에도 암살이라고 추정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그의 치세가 이어진 기간은 겨우 8개월에 불과했다.

[1] 그리고 이런 조건하에 이루어진 퇴각은 당시에 대단한 불명예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요비아누스가 빠르게 인망을 잃는 원인이 되었다.[2] 안퀴라(지금의 앙카라)와 이즈니크 사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