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스미스티크

 


[image]
이름
요제프 "페피" 스미스티크[1]
(Josef "Pepi" Smistik)
생년월일
1905년 11월 28일
사망년월일
1985년 11월 28일
국적
[image] 오스트리아
출신지

포지션
하프백
신체조건
183cm / 76kg
등번호
-[2]
소속팀
'''SK 라피트 빈 (1926-1937)'''
ESV 슈타들라우 (1938-1940)
FAC (1940-1941)
크렘저 SC (1941-1945)
국가대표
39경기 / 2골 (1928-1936)
감독
FC 샤프하우젠 (1952-1956)
FK 아우스트리아 빈 (1958-1959)
FC 샤프하우젠 (1964-1965)
1. 생애[3]
1.1. 선수 생활
1.2. 감독 생활과 그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생애[4]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스미스티크는 그의 형제 프란츠와 함께 그의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FC 슈타들라우 클럽에서 뛰었다. 그러다 1926년에 SK 라피트 빈의 공격수였던 카를 본드라크에 의해 라피트 빈에 입단하게 된다.
스미스티크의 입단 첫 해부터 소속팀 라피트 빈은 ÖFB-컵 우승과 미트로파 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미트로파 컵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파르타 프라하에 2게임 동안 합계 3대7로 패했다. 이듬해에도 라피트 빈은 미트로파 컵 우승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번엔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 TC에 1차전에서 1대7로 깨박살이 났다. 스미스티크는 2차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결국 라피트 빈은 1930년에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며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라피트 빈은 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스미스티크 역시 1931년부터 팀의 주장으로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이 기간동안 라피트 빈은 3차례의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1937년을 끝으로 라피트 빈을 나와 고향팀 슈타들라우를 포함한 여러 팀을 거쳐 1945년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1.2. 국가대표팀


스미스티크는 1928년 5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고 3대0으로 오스트리아가 승리했다.
1931년 오스트리아는 스코틀랜드에 5대0의 대승을 거두면서 비영연방팀으로서 최초로 패배를 안겼다. 오스트리아는 다음 상대인 독일을 적지인 베를린에서 무려 6대0으로 박살을 내놓았고, 홈에서 열린 리턴 매치에선 5대0으로 또 대파하며 6대0의 결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는 벨기에를 6대1, 프랑스를 4대0으로 크게 이기면서 유럽 대륙팀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오스트리아를 사람들은 분더팀이라 불렀으며, 스미스티크는 주장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5] 오스트리아는 1933년 4월부터 이탈리아 월드컵 이전까지 1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는 강력한 포스를 보였고,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지만 준결승전에서 호스트 이탈리아엔리케 구아이타에게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다.
월드컵 이후 스미스티크는 대표팀 경기 기록에 7경기를 추가했으며 통산 39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겼다.

1.2. 감독 생활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스미스티크는 1952년 스위스의 샤프하우젠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1958년에는 오스트리아FK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잠시 감독 자리를 맡았고, 샤프하우젠에서 한 시즌 감독을 맡고 난 이후엔 볼프룸(Wolfrum)이라는 주류 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말년의 스미스티크는 파킨슨병에 걸려 투병했으며 80번째 생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고향인 슈타들라우에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뛰어난 기술과 훌륭한 시야를 바탕으로 한 롱패스가 장기였던 하프백. 또한 소속 클럽과 분더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리더십도 뛰어난 선수였다.

3. 뒷이야기


  • 고향팀 슈타슬라우에서 뛸 때 후배였던 에른스트 오크비르크의 포지션을 공격수에서 하프백으로 바꾸도록 설득한 인물이 바로 스미스티크였다. 스미스티크는 오크비르크의 포지션 변경 이후 자신의 노하우를 상당히 전수해주었고 그를 바탕으로 오크비르크는 50년대 유럽 최고의 하프백으로 성장했다.

4. 수상



4.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3회: 1928-29, 1929-30, 1934-35(SK 라피트 빈)
  • ÖFB-컵 우승 1회: 1926-27(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0(SK 라피트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3회: 1927-28, 1932-33, 1933-34(SK 라피트 빈)
  • ÖFB-컵 준우승 2회: 1928-29, 1933-34(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26-27, 1927-28(SK 라피트 빈)

4.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 중유럽 컵 준우승 2회: 1927-30, 1933-35
[1] 독일어에서 s는 t또는 p가 결합한 상태에서 어두에 올때만 슈 발음이 난다. 단, 복합어일때는 어두에 올때랑 같은 조건으로 인정해준다(예: 아인+슈타인). 이 경우 스미+슈티크의 복합어여야만 슈 발음이 가능.[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다만 월드컵 본선에서 대표팀 주장은 요한 호르바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