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우리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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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우리딜은 오스트리아 오타크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사였으며 8살 무렵부터 축구를 접했다고 한다. 많은 유소년 클럽을 돌아다니다 1914년, 공격수로 뛸 수 있다는 이유로 SK 라피트 빈에 정착했으며 1차 대전 때는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딜은 소속팀과 함께 많은 우승컵을 손에 넣었으며 1921년 공식적으로 기록된 오스트리아 1부 리그의 첫 득점왕이 되기도 했다.
1921년에 우리딜은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에 남을 명경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디오니스 쇠네커를 상대로 라피트 빈은 후반 30분까지 3대5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나마도 1대5에서 2골을 더 넣어 2점차까지 스코어를 좁힌 것이었다. 하지만 라피트 빈은 불과 15분 만에 4골을 더 넣어 7대5로 경기를 뒤집어 버렸다. 우리딜은 이 경기에서 '''7골을 혼자 다 넣는 대활약'''을 펼쳐 당연히 MOM이 되었다.
1.1.2. 국가대표
우리딜은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8경기에 출전, 8골을 기록했다. 스위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2. 감독 생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우리딜은 1929-30 시즌에서 AS 바리의 선수 겸 감독으로 감독 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루마니아에서 있을 동안에는 리펜시아 티미쇼아라를 준우승으로 이끄는 동시에 라둘레스쿠와 공동 감독으로 루마니아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 후에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4] 1938년부터 독일에 정착했고 슈바르츠바이스 에센과 알텐뵈게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1953-54 시즌에는 친정팀 SK 라피트 빈에 복귀해서 감독 자리에 앉았고 이 해에 라피트 빈은 1부 리그 왕좌에 다시 앉았다. 이 시즌 전 라피트 빈은 잉글랜드의 아스날 FC을 6대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와 SK 라피트 빈을 대표하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가끔은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나 센터 하프백으로 뛰기도 했다.
당시 인기도 대단해서 그의 이름을 딴 맥주, 사탕 등이 나오기도 했고 그를 소재로 한 Heute spielt der Uridil(오늘의 우리딜의 플레이)라는 음악도 있었다. 1924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3. 수상
3.1. 선수
3.1.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6회: 1915–16, 1916–17, 1918–19, 1919–20, 1920–21, 1922–23(SK 라피트 빈)
- ÖFB-컵 우승 3회: 1918–19, 1919–20, 1926–27(SK 라피트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2회: 1917-18(SK 라피트 빈), 1925-26(피르스트 비에나 FC)
- ÖFB-컵 준우승 1회: 1925-26(피르스트 비에나 FC)
3.1.2. 개인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득점왕 1회: 1920-21(SK 라피트 빈)
3.2. 감독
3.2.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1회: 1935-36(BSK 베오그라드)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1회: 1953-54(SK 라피트 빈)
- 디비자 A 준우승 1회: 1933-34(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유고슬라비아에선 BSK 베오그라드에 우승컵을 안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