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슈투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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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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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독일군의 장성. 전쟁 내내 공수부대의 신화적인 존재인 독일 제7공수사단, 공수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2. 생애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주의 비르크홀츠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이후 비행 훈련을 받고 육군 항공대 조종사가 된다. 1차대전 초기에는 동부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중반 이후로는 서부전선에서 활동하였으며, 전간기에는 독일군의 항공기 보유를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육군 자원개발부서에서 근무하는 한편 민간인들의 모임이었던 글라이더 협회에서 활동한다. 또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이 소련과 군사교류를 진행함에 따라 슈투덴트 역시 소련의 적군과 교류를 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공수부대라는 개념을 맞닥뜨리게 된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역의 파기를 선언함에 따라 루프트바페는 재건되었고, 슈투덴트 역시 공군으로
전군하게 된다. 한동안 비행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독일 공군의 재건에 힘쓰던 슈투덴트 장군은 독일이 전쟁 준비를 하면서 헤르만 괴링이 설립한 '괴링 장군 연대'가 독일 국방군으로 흡수되고 육군 공수부대가 공군에 통합되면서 조직된 제7공수사단의 지휘를 맡게된다.
당시 독일군 안에서는 공수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서 일반 보병작전을 구사해야한다는 육군의 주장과 이들을 소규모 특공대로 운용해서 후방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구사해야한다는 공군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슈투덴트는 공군 측 인물이면서도 육군의 입장에 찬성했기 때문에 육군의 지지를 받았다. 독일군 장성으로는 드물게 나치당과 부하들의 신뢰를 골고루 받았던 인물이라는 점도 독특했다. 칼 되니츠 제독 정도가 이럴까...
이후 그가 이끄는 7공수사단은 프랑스 침공에서 B집단군 소속으로 활약했으며, 슈투덴트 자신도 중장 진급과 더불어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에는 군단급 부대인 제11비행군단으로 영전, 크레타 섬 전투의 독일군 측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그가 이끄는 공수부대는 전투 당시 용맹하게 싸운 것과는 별개로 낙후된 강하 장비와 빈약한 무장으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를 낳게 되었고, 결국 히틀러는 대규모 공수작전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후 1943년에는 무솔리니 구출 작전인 떡갈나무 작전의 입안을 명령하였고, 거기에 쓸 병력이 공수부대가 되게 하였다. 이후 떡갈나무 작전이 성공으로 끝나서 무솔리니가 구출되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세우게 되자 그 공로로 곡엽 기사철십자상을 받았다. 해가 바뀐 1944년 6월 이후 슈투덴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혼란스러워진 프랑스 일대로 이동하였고, 동년 7월 13일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다.[4][5] 이후 그의 부대는 연합군의 공수작전인 마켓 가든 작전에서 아른험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그는 11월에 제1공수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1945년 4월 28일에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국방군 육군 상급대장의 후임으로 바이크셀 집단군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허나 그는 부대로 가기 전인 1945년 5월에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고 만다. 따라서 부대를 지휘하지는 못했고, 공석이 된 바이크셀 집단군 사령관 직위는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 국방군 육군 보병대장이 새로 임명되어 종전까지 지휘하게 된다.
전후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크레타 섬 점령지에서 있었던 전쟁범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6][7] 하였다.이후 건강 문제로 인해서 조기 출소하였고, 1976년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1] 육군 소속 1st Parachute Army [2]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전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부대를 지휘하지 못 하게 되었다. 대신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 국방군 육군 대장이 종전까지 해당 부대를 지휘하게 된다.[3] 베를린 전투에 참전한 비스툴라 집단군의 명목상 지휘관이었지만, 전술했듯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에 영국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참전하지 못했다.[4] 참고로 슈투덴트는 독일 국방군 공군(루프트바페)에서 마지막으로 상급대장에 진급한 사람이다. 다만 추서자까지 합치면 끝에서 두 번째이다.[5] 여담으로 진짜 마지막 독일 국방군 공군 상급대장 진급자는 귄터 코르텐(Günter Korten 1898.7.26~1944.7.22)으로, 1차대전 당시에는 독일 제국 육군 소속의 프로이센군에서 사관후보생으로 종군했고, 훗날 공병대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육군에 남아있었으며, 이때 소련에서 비행 관련 연수를 받게 된다. 1935년에 독일 공군 창설 이후에는 전군하여 제4항공군과 3항공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했고, 전시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공적을 세워 소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발칸 전역과 소련 침공에서 싸웠다. 그리고 1942년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공 지원을 하는 공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다음해에는 항공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일에 히틀러의 지휘부가 있었던 볼프산체(늑대굴)에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설치한 폭탄의 폭발에 휘말린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후 그는 군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고 심각해져만 갔다. 결국 코르텐 항공대장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로 암살미수 사건 이틀 뒤인 7월 22일에 사망하고 만다. 사후 그는 공군 상급대장으로 추서되었고, 이는 루프트바페에서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6] 포로 학살등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7] 반면 같은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브루노 브로이어나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는 총살형으로 죽었다. 물론 브루노 브로이어는 뮐러의 죄를 상당부분 뒤집어쓰고 죽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