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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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吉
생몰년도 미상
중국 후한 시대의 도사. 낭야 사람.
후한 순제(順帝) 이전부터 살았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맞다면 삼국지에서 나왔을 때 나이가 70살은 거뜬히 넘었다는 의미다.[1]
후한서에는 우(于)와 비슷한 한자인 간길(干吉)로 기록되었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각지를 방랑하며 신비한 도술을 구사해 많은 백성들을 구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드높아 추종하는 세력이 많았으며, 그의 제자로는 궁숭(宮崇), 양해(襄楷) 등이 있어 이 책을 궁숭은 순제, 양해는 환제에게 바치려 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에는 진수가 정사삼국지를 쓸 당시에 기록된 기사가 아니라 배송지가 후대에 단 주석, 정확히는 <오서> 손책전에서 강표전과 그에 대해 평가를 단 임지, 수신기를 출처로 하는 대목으로 있다.
우희(虞喜)의 『임지(林志, 혹은 지림志林)』에 따르면, 후한 초기에 약초를 캐던 가운데 문득 도를 깨달은 백화(帛和)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곡양(曲陽)의 천수(泉水) 강가에서 우길에게 2부 10권으로 된 유명한 도술서 태평요술을 주었고, 그는 당시의 도교 사상들을 정립하고 민간요법 등을 폭넓게 담아 도교에서는 신서(神書)라 칭해지는 태평청령도 170여 권으로 다시 펴냈다.[2]
강표전에서 손책은 제장들이 그를 버려두고 우길에게 몰려들자 제장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저자를 믿지 말라. 일찍이 교주자사 장진(張津)이 이같은 사도(邪道)를 믿고 따르다가 결국 남쪽 오랑캐(남이, 南夷)에게 죽임을 당했다." 손책은 어머니와 제장들의 구명을 뿌리치고 우길을 죽였다. 그러나 배송지는 손책이 장진보다 먼저 죽었기에[3] 강표전은 기록에 어긋난다고 서술하였다.
수신기에서는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는 와중에 우길과 함께 길을 가다가, 장수들이 모여있자 질시하여 가뭄을 해갈하면 사면하겠다고 했으나, 비를 내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후 손책이 혼자 있을 때마다 우길이 나타나서 손책은 점차 평상시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는데, 상처를 치료하던 중에 거울을 보았더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 아니라 죽은 우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워진 손책은 거울을 깨트렸는데, 분개로 인하여 상처가 터져 손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
임지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손책이 우길을 죽였다는 기록은 애초에 우길과 손책의 시대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만큼 신빙성이 있는 기사가 아니다.[5] 배송지 역시 강표전과 수신기의 기록을 모두 다루면서 양쪽 내용이 다른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서술하고 있다. 애초에 수신기는 야사이기도 하다.[6]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29편에서 홀연히 등장해 민심을 모으다가, 손책에게 억울하게 죽고 나서 혼령이 되어 그를 저주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모티브는 손책이 우길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이유로 제장과 무열황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다는 부분은 강표전, 우길이 비를 내리게 했으나 죽였다는 이야기는 수신기의 설화를 따온 것이다. 또한, '''일단 옥에 가두었다가, 주변에서 그를 살려야한다고 간청하자 그를 질투해 오히려 죽이는''' 이야기의 구성은 손책이 죽인 유학자 고대의 죽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손책이 원소와의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던 있는 와중에 우길이 손책의 잔치에 참석한 백성들과 장수들의 숭배를 받자 사이비 교주가 아니냐며 당장 처형하라고 한다.[7] 그러나 신하들을 비롯해서 어머니인 무열황후까지 말리니 손책은 더욱 빡친다. 그러다가 여범이 "가뭄이 들었으니 비를 내리게 하라고 하시지요. 비를 내리면 살려주고 못 내리면 죽이면 됩니다."라고 해 나중에 뒷공론을 못하게 해 그나마 살릴 가능성을 높였다.
옥에서 우길은 "내 명이 다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자 간수가 "비를 내리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길은 "아무리 비를 내리가 한 들 나의 천수가 다했으니 살아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우길은 진짜로 비를 내려줬고 사람들이 계속 우길을 칭송하자[8] 열받은 손책이 부하를 닥달하여 우길을 죽이게 한다.[9] 그 이후는 우길의 환상이 현실이나 꿈에서 나타나서 농락하는 통에 손책이 시달린다.
참고로 우길을 죽였던 부하는 우연히도 손책의 손에 죽었는데, 손책이 우길의 환상을 보고 칼을 던졌다가 날아간 칼이 그 부하의 목을 잘라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결국 손책은 임종 시에 이성을 되찾고 무열황후, 손권, 대교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의 11권에서는 좌자와 함께 괴이하면서도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무리라고 까였다.
우길/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于吉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중국 후한 시대의 도사. 낭야 사람.
후한 순제(順帝) 이전부터 살았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맞다면 삼국지에서 나왔을 때 나이가 70살은 거뜬히 넘었다는 의미다.[1]
2. 역사기록
후한서에는 우(于)와 비슷한 한자인 간길(干吉)로 기록되었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각지를 방랑하며 신비한 도술을 구사해 많은 백성들을 구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드높아 추종하는 세력이 많았으며, 그의 제자로는 궁숭(宮崇), 양해(襄楷) 등이 있어 이 책을 궁숭은 순제, 양해는 환제에게 바치려 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에는 진수가 정사삼국지를 쓸 당시에 기록된 기사가 아니라 배송지가 후대에 단 주석, 정확히는 <오서> 손책전에서 강표전과 그에 대해 평가를 단 임지, 수신기를 출처로 하는 대목으로 있다.
우희(虞喜)의 『임지(林志, 혹은 지림志林)』에 따르면, 후한 초기에 약초를 캐던 가운데 문득 도를 깨달은 백화(帛和)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곡양(曲陽)의 천수(泉水) 강가에서 우길에게 2부 10권으로 된 유명한 도술서 태평요술을 주었고, 그는 당시의 도교 사상들을 정립하고 민간요법 등을 폭넓게 담아 도교에서는 신서(神書)라 칭해지는 태평청령도 170여 권으로 다시 펴냈다.[2]
강표전에서 손책은 제장들이 그를 버려두고 우길에게 몰려들자 제장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저자를 믿지 말라. 일찍이 교주자사 장진(張津)이 이같은 사도(邪道)를 믿고 따르다가 결국 남쪽 오랑캐(남이, 南夷)에게 죽임을 당했다." 손책은 어머니와 제장들의 구명을 뿌리치고 우길을 죽였다. 그러나 배송지는 손책이 장진보다 먼저 죽었기에[3] 강표전은 기록에 어긋난다고 서술하였다.
수신기에서는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는 와중에 우길과 함께 길을 가다가, 장수들이 모여있자 질시하여 가뭄을 해갈하면 사면하겠다고 했으나, 비를 내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후 손책이 혼자 있을 때마다 우길이 나타나서 손책은 점차 평상시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는데, 상처를 치료하던 중에 거울을 보았더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 아니라 죽은 우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워진 손책은 거울을 깨트렸는데, 분개로 인하여 상처가 터져 손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
임지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손책이 우길을 죽였다는 기록은 애초에 우길과 손책의 시대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만큼 신빙성이 있는 기사가 아니다.[5] 배송지 역시 강표전과 수신기의 기록을 모두 다루면서 양쪽 내용이 다른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서술하고 있다. 애초에 수신기는 야사이기도 하다.[6]
3. 연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29편에서 홀연히 등장해 민심을 모으다가, 손책에게 억울하게 죽고 나서 혼령이 되어 그를 저주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모티브는 손책이 우길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이유로 제장과 무열황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다는 부분은 강표전, 우길이 비를 내리게 했으나 죽였다는 이야기는 수신기의 설화를 따온 것이다. 또한, '''일단 옥에 가두었다가, 주변에서 그를 살려야한다고 간청하자 그를 질투해 오히려 죽이는''' 이야기의 구성은 손책이 죽인 유학자 고대의 죽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손책이 원소와의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던 있는 와중에 우길이 손책의 잔치에 참석한 백성들과 장수들의 숭배를 받자 사이비 교주가 아니냐며 당장 처형하라고 한다.[7] 그러나 신하들을 비롯해서 어머니인 무열황후까지 말리니 손책은 더욱 빡친다. 그러다가 여범이 "가뭄이 들었으니 비를 내리게 하라고 하시지요. 비를 내리면 살려주고 못 내리면 죽이면 됩니다."라고 해 나중에 뒷공론을 못하게 해 그나마 살릴 가능성을 높였다.
옥에서 우길은 "내 명이 다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자 간수가 "비를 내리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길은 "아무리 비를 내리가 한 들 나의 천수가 다했으니 살아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우길은 진짜로 비를 내려줬고 사람들이 계속 우길을 칭송하자[8] 열받은 손책이 부하를 닥달하여 우길을 죽이게 한다.[9] 그 이후는 우길의 환상이 현실이나 꿈에서 나타나서 농락하는 통에 손책이 시달린다.
참고로 우길을 죽였던 부하는 우연히도 손책의 손에 죽었는데, 손책이 우길의 환상을 보고 칼을 던졌다가 날아간 칼이 그 부하의 목을 잘라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결국 손책은 임종 시에 이성을 되찾고 무열황후, 손권, 대교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4. 후대의 평가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의 11권에서는 좌자와 함께 괴이하면서도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무리라고 까였다.
5. 미디어 믹스
우길/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손책한테 죽은게 대략 200년경이고 순제의 치세는 125년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화제 시대 사람도 살아있었다.[2] 우희는 강표전의 기록에 대해서 평하면서, "후한 순제와 헌제 시대는 대략 50~60년이 되니, 우길은 백살이 가까웠을 텐데 죽을 죄가 아닌 것을 잔혹하게 죽였으니 아름답지 않다"라고 평했다.[3] 장진은 사섭의 전임자격으로 건안 16년(201년) 교주목(혹은 교주자사)이 되었다.[4] 하지만 이 기록은 배송지 주에서 <오력>의 기록 뒷부분에 있는데, <오력>에는 손책이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병세가 회복될 수 없음에 분개해 상처가 터져 당일 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송지는 <오력>의 기록이 신빙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오력의 내용이 현실성이 있다.[5] 다만 손책이 그 전부터 영토 내의 태평도 교단을 탄압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우길이 죽고, 그 망령으로 손책 역시 죽었다는 기록은 태평도 측에서 지어내서 퍼트린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임지의 기록이 맞다면 태평이란 이름 자체가 우길에게서 온 것이다.[6] 강표전은 진대(晉代)의 우박(虞薄)이 저술했는데, 수신기보다는 사서에 가까우나 역시 신빙성은 높지 않게 다뤄지고 있다. 형주의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 강표전은 유비가 손권에게 형주를 빌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러 학자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는 대목이 신빙성이 낮은 대표적인 부분이다. 오나라 미화물이란 것이다.[7] 손책이 우길더러 너는 백성들을 속이는 요망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자, 우길은 내가 그동안 백성들한테 아무것도 속이거나 빼앗은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손책은 우길한테 너는 농사를 짓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는데, 네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은 그럼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 하고 더욱 비난을 퍼부었다.[8] 이때 손책의 부하 장수들까지 우길한테 달려가 엎드려 큰 절을 하는 바람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책은 부하들도 우길을 숭상한다는 사실에 더욱 질투심과 분노가 끓어올랐다(...)[9] 또는 본인이 직접 우길을 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