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

 

''' 罗贯中 '''
''' 나관중 | Luo Guanzhong '''
[image]
중국 산시성에 세워져 있는 나관중의 동상.
'''성씨'''
나 (羅)
'''이름'''
본 (本)
''''''
관중 (貫中)
''''''
호해산인 (湖海散人)
'''생몰연도'''
1330년? ~ 1400년
'''직업'''
소설가
1. 개요
2. 생애
2.1. 출생에 관해
2.2. 행적
3. 논란
3.1. 촉 옹호/위 비판 논란
3.2. 전투 규모 논란
4. 여담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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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인물.
중국 고전소설의 걸작 '''《삼국지연의》'''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중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또한 《수호전》의 편저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사대기서 넷 중 둘과 관련된 셈이다.

2. 생애



2.1. 출생에 관해


출생지에 대해 흔히 조운이 태어난 상산이나 관우가 태어난 하동 등으로 추정하지만[1] 소설 삼국지통속연의에 보이는 북방지리에 대한 고증오류[2][3]로 미루어 볼 때 남쪽 지역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었다. 일설에는 동부에 있는 장시성 여릉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2010년대에 한국에서 나관중의 고향을 찾아봤는데 산시 성 타이위안시 진중 치(祈)현에 있는 마을인 허완(河灣)촌에 나씨종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타이위안(태원, 太原) 치현에서 50km 떨어진 칭쉬(淸徐)현이 고향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본토에서 이렇게 추정하고 있는 것이나 전해지는 일화들을 봐선 북방출신, 그중에서도 산시성 타이위안 출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2.2. 행적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친구이자 머나먼 친척인 주서(周敍)[4]와 같이 과거 시험을 치렀는데, 주서만 합격하고 나관중은 떨어졌다. 이에 다시 과거 시험을 치렀지만 또 다시 떨어졌고, 이후에도 계속 과거 시험을 치렀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산서성 태원 일대에서 가문의 생업인 소금장사를 했으나, 천성이 게을러서 그랬던 건지 장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살던 곳의 근처 찻집에 드나들며 하루하루 놀고먹으면서 가문의 재산을 까먹고 살았다. 당시 그 찻집에서는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삼국희곡(三國戱曲)을 매일같이 공연해 나관중은 이 삼국희곡을 즐겨 들었는데,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달달 외우는 수준까지 도달해 이를 토대로 삼국지연의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문에서 쫓겨나 족보에도 나관중의 이름이 지워져 둘째 아들을 외지로 보냈다는 기록만 남았다고 하며, 이에 연구자들은 정부에 항거한 이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인 수호전을 지은 것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말년에는 은거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의 생존 시기는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 시대이며, 사망한 년도는 확실히 1400년이다. 다만 탄생년도만 불분명할 뿐이다. 삼국지연의 이외에도 여러 작품의 저자로 추측되고 있지만, 과거에 탈락하고 한량처럼 살았다는 점 이외에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 공부를 못해서, 즉 개인의 문제로 관직에 탈락했을 뿐이지[5] 원나라 때문은 아니거니와, 애초에 하등 상관도 없다. 명나라가 1368년에 건국됐는데, 그로부터 '''32년'''씩이나 지나서야 나관중이 죽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 볼 실력이 없었기에 오히려 천수를 누렸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선 홍무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수천에서 '''수만 명''' 단위로 죽여댔고, 심지어 재야의 재능있는 선비들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충성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끌려가서 처벌을 받는 살벌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과거에 합격했다던 주서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관중은 오히려 과거 공부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재야에서 문자 그대로 소설 창작에 열과 성의를 쏟아붓다시피 했고, 홍무제가 죽은 뒤에도 2년 동안이나 더 살 수 있었다. 과거에 여러 번 떨어져 실력이 없다는 것도 검증되었을 것이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처벌받지도 않았을테고 말이다. 어찌보면 거듭된 낙방이 오히려 복이 된 셈.
또 그는 과거 공부나 생업에는 게으르고 재능이 없었어도, 역사와 각종 재담과 민담에 관심이 많고 패관문학에도 재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현대에도 널리 알려진 문학작품인 삼국지연의수호전 등을 남길 수 있었다. 문학가로서의 유명세를 따지면 당대의 벼슬하던 다른 선비들보다 더 많이 이름을 알리게 된 셈이다.
이렇듯 당대에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고전이 되어 나관중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서양에서 흔히 삼국지연의를 소개할 때 동아시아에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영향력을 끼친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6] 오히려 당대부터 속된 패관의 문장을 정리해 적절한 문장으로 교정했다는 명성도 얻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더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3. 논란



3.1. 촉 옹호/위 비판 논란


삼국지연의를 지은 것 때문에 한동안 촉빠라서 위나라조조를 깠다느니, 역사왜곡했다느니 하는 비판을 받았다.
역사를 바탕으로 100년 가까이 되는 것을 ''''소설''''로 그려내면서 그만한 고증에다 민간설화나 여러 역사 책에 흩어져서 묘사된 내용까지 섭렵할 정도이니 나관중은 당시 기준으로는 어지간한 학자 수준이다. 오늘날에서 후한 삼국 전쟁 시대는 1700~1800년 전 이야기이지만 명나라 시대에서도 자그마치 1000년 전의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나관중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쓴 것도 아니며, 옛날엔 정보 모으기도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어려웠다.
삼국지 연의로 분석해 보건대 제갈량, 조운, 관우를 매우 존경하고, 당시 민간에서 인기가 있었던 장비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7] 특히 관우의 경우에는 나관중 본인은 관우가 죽는 장면조차도 묘사하지 않을 정도로 존경했던 것 같다. 명나라대의 나관중본에서 관우는 죽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아 신이 되어 승천한다. 청나라 시대에 모종강본이 나오면서 관우가 죽는 장면이 추가 된다.[8][9]
최훈은 그를 '저도의 유비빠'라고 평했지만, 모종강이야말로 유비를 거의 절대적인 이상적 유교의 군주로 표현했고, 나관중 본인은 유비가 관우를 속이는 말을 하고 장판파에서 장비를 20여 기만 따라온게 장비에게 맞아죽기 싫어서라고 표현하는 등 유비 측의 단점도 표현하여 삼국에 더 균형을 주었다. 즉, 나관중은 굳이 따지자면 "영웅쟁패" 위주로 썼고, 모종강이야말로 진정한 "숭유반조"(=촉빠위까)의 입장을 견지했다. 삼국지가 울고있네에 따르면 일본에서 "조조가 삼국 제일 영웅"이라고 하자, 중국 측에선 비웃은 게 일본은 나관중본이 알려지고 중국은 모종강본이 대중적이어서라고 한다.
분명 촉 장수들의 활약을 늘려 준 부분도 있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오히려 나관중을 촉까 위빠로 볼 수도 있다. 원래 엄청난 영웅이었던 유비는 전공이 전부 삭제되거나, 남의 전공으로 둔갑당했고 한술 더 떠서 유비를 상당히 위선적이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다. (이는 노신도 지적한 사실.)[10] 제갈량 역시 처음 느껴지는 포스는 소설 쪽이 더 강할지 몰라도 소설 속의 제갈량은 하나하나 따져보면 역사 속의 제갈량보다 허접하며[11], 유비 못지 않게 위선자에다가 권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참고로 모종강은 영웅논담 때도 나관중본에서는 유비가 번개를 무서워하며 치졸한 변명을 하고 조조는 이를 보고 한심해 하는 데에 비해 모종강본은 유비가 "번개가 치면 군자도 두려워했다 합니다."라고 하자 조조가 이를 옳게 여기는 등 유비를 더 좋게 그렸다. 심지어 모종강본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시험하기 위해 유비의 부인들과 함께 지내게 했더니 관우가 밖에 서서 밤을 지내는 장면까지 추가되었고 제갈첨등애에게 항복할까 고민하는 장면도 삭제되었다. 한마디로 '''촉빠위까는 모종강과 모성산인데 엄한 나관중만 덤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12]
이와 더불어 나관중 이전에 쓰여진 삼국지평화에선 아예 역사왜곡을 해가며 억지 해피엔딩/촉한 승리 엔딩을 만든 데 비해[13] 나관중은 촉한이 멸망하고 결국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것으로 끝낸다. 이후 후삼국지 같은 물건들에 비하면 나관중은 최대한 '''역사적 사실이 허용하는 내에서''' 촉을 띄워줬다고 볼수 있다.
연의에서 조조를 많이 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나관중은 역사서에 없는 내용을 조조에게 붙여준 것이 엄청나게 많다. 특히, 동탁을 암살하려 칠성검도를 꺼냈다 튄 이야기는 정말 난데없는 나관중이 창작해 낸 이야기이다. 원래 역사상으로 동탁에 대응하며 떠오른 이는 원소인데, 나관중이 이 시기의 원소 간지를 전부 조조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원소는 연의에서 답이 없는 막장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관점을 민간설화에서 차용한 것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 삼국지연의의 전신인 삼국지평화에서도 조조는 그저 동탁 mk-2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연의에서는 "내가 천하사람을 배반할지언정 천하사람이 나를 배반하게 할 수는 없다" 같은 어느 작품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대의 명대사도 나온다. 물론, 정사에도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내가 남을 해쳤으면 해쳤지, 먼저 남에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스케일이 확연히 작은 발언이다. 나관중은 이 내용의 스케일을 키움으로서 조조를 감히 천하까지 노리는 최종보스로 만든 것이다. 거기에다가 나관중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꼽히는 관도대전 이후 원소군 포로 생매장도 통으로 삭제했으며[14], 그 밖의 조조의 악행도 통삭제시키거나, 스케일을 줄이거나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묘사해줬다. 여기에 관우를 흠모하는 조조의 우정 묘사도 무시하면 안 되는 게, 그 이전의 작품인 삼국지평화에선 '''그런거 없었다'''. 조조는 관우가 자신을 떠나려하자 분노해서 계략으로 그를 잡으려 하고, 화용도에선 관우의 고뇌같은거 없이 그냥 갑자기 자욱하게 안개가 끼여서 조조가 도망갔다고 나온다. 즉 그 이전의 그냥 잔인한 악당이었던 조조에게 인재를 아끼는 통이 큰 면모를 부여한 것도 나관중이다. 사실 수백 년 지나고도 조조에 대해선 인식이 아주 나빴음을 감안하면 이 정도면 조조를 띄워준 셈이다.[15]
오나라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기손책의 일화를 보고 확인해보자. 추가로, 손책이 진등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갔다가 몇 천의 군대에게 발린 적이 '''2번''' 있는데 이것도 없앴다. 다만, 이것은 진수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확실하지도 않다. 하지만, 나관중이 엄청난 양의 민간설화나 야사들을 참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관중이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수도 있다.
손권의 경우는 간발의 차이로 이득을 본 편인데, 나관중은 연의에서 손권의 아량과 군주로서 도량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많이 추가하여 수성의 군주 이미지를 분명하게 했다. 합비에서의 추태는 실제에 비해 스케일이 작아진 데다가, 그것마저 손권에 대한 손오 무장들의 충성심이 주로 묘사되었고 손권의 대표적인 치부인 이궁의 변이나 손권의 노망도 묘사하지 않아서 이미지 하락을 막아주었다. 다만, 손권의 아버지 손견의 경우 손해를 본 유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화웅을 벤 것이다. 연의에서는 손견군이 벤 화웅을 관우가 베었다고 묘사했지만, 실제 역사에서 관우와 화웅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사실 화웅은 원래 유명한 무장도 아니고 연의에서 관우가 죽였기 때문에 유명해진 무장이어서 이 공을 넘겨 준 걸 가지고 크게 손해 보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또 정사에서 동탁 진영은 손견을 원소, 원술, 유표와 함께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했는데 연의에서는 용맹있는 장수로서만 조명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정사에서 원술의 객장이었던 손견을 당당히 독립세력으로 묘사했기에 오히려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유가 까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히려 중국사 4대 재상에 빠지지 않는 인간인 제갈량과 중국사에서 잠깐 나오는 장수A와 라이벌이라는 것 자체가 나관중이 오빠라는 증거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주유의 공을 제갈량에게 일부 돌린 것을 두고 지적하자면, 애초에 정사에서 적벽대전 묘사를 보면 '주유가 유비를 '''도와''' 조조를 막았다' 급으로 서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관중은 연의에서 적벽대전을 거의 주유 공으로 묘사했다. 한마디로 공 몇 개를 제갈량에게 넘긴 건 큰 문제가 아니다.[16]
허나 개인의 선호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관우를 죽이거나 그를 적대하여 상대적 전적이 좋은 장수들은 말로가 좋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관우를 죽인 마충은 미방에게 잠중에 목이 잘리거나, 강릉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주유, 육항처럼 대도독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주연이 조운에게 죽어 일찍이 퇴장하는 등 푸대접하는 인물들이 있다. 후술할 서황도 아래에 나오듯이 정말 허망한 죽음을 맞았으며, 조인도 정사에 비해 꽤나 너프되었으며, 마충 그리고 주연을 제외하고도 꽤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오나라 장수들이 많다. 방덕, 육손, 장료 정도를 제외하고는 관우와 싸워서 이득을 본게 없다.
이처럼 나관중은 삼국의 비중을 대략 균등하게 맞춰 주었다고 볼 수 있다.[17] 애당초 편향된 서술이라는 지적들은 삼국지연의는 한 개인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남송시대까지 전해오던 삼국시대에 관한 모든 역사, 전설, 민담, 신화들이 집약된 거대한 전집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들이다.

3.2. 전투 규모 논란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를 시작해서 여러 전투 규모를 실제보다 몇 배나 더 부풀렸다고 욕하는 경우가 있는데, 연의는 엄연한 소설이다. 아무래도 재미를 위해서는 스케일 규모를 키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소설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에서도 단위를 뻥튀기하는건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근대까지 비수대전 같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곤 대부분 0하나를 빼야 올바른 병력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왈이 당연시 여기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뻥튀기는 십자군 전쟁 관련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고금동서를 막론하며 즉, 여기만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소리.[18]

4. 여담


  • 아무래도 장수는 전사해야 멋지다고 생각했는지 작중 죽음이 바뀐 장수가 몇 있다. 서황이 가장 잘 알려진 예이고, 태사자도 그렇게 묘사되었으며 장억의 경우도 연의에서의 죽음이 더 비장하다. 단 서황은 맹달 따위에게 허망한 죽음을 맞기도 했기에 비장하게 죽었다고 볼 수도 없다.[19][20] 가장 대표적인 건 학소. 병에 걸려 다 죽어가면서도 병사를 지휘하며 제갈량의 군대를 막다가 사망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비장함 그 자체. 덕분에 삼국지 게임 내에서 능력치가 상승했다.
  • 평요전수호전의 저자로도 추정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호전의 일반적 저자로 취급받는 것은 나관중의 스승설도 있는 시내암인데, 양산박 108명이 모으는 장면(약 70화)까지만 시내암의 창작이고 이후 방납토벌전이나 요나라와의 전쟁은 나관중의 창작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청나라 시대의 평론가 김성탄이 대표적 인물로 수호전이 108명 모이는 것에서 끝난다면 이 판본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시내암 자체를 가상인물 취급하는 입장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전체가 나관중 창작이라고 본 설도 있다.
  • 정사에 없는 에피소드는 흔히 나관중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삼국지평화, 화관색전, 조만전 같은 별로 안 유명한 출전이나 민담들에서 먼저 나온 내용들이 많다. 또한, 배송지주에서 슬며시 언급된 이야기에 살을 붙여 넣거나 한 경우도 많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정말 인지도가 없는 민담이나 책까지 일일이 찾아내서 써먹은 걸 보면 나관중의 삼국지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봐야 한다.
  • 인천 지하철의 화장실에 있는 액자에 "사고팔았던 사이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지만. 주고받았던 사이는 그 주고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가 나관중이 한 말로 나오는데, 이문열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비와 자신의 차이를 고찰하며 독백하는 부분이다. 이문열 창작이다.
  • 코에이에서 만든 게임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 중국 대륙의 재야 장수로 나온다.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를 볼 실력이 없는 나관중의 실정을 반영 해서 정치51/전투26/지모68에 특기가 문화 하나인 수수한 능력치로 등용 하면 그냥 대상 무역을 돌려서 도시 문화를 올리는 정도로만 쓸 만하다.
  • 임용한은 나관중을 두고 "촉빠도 위빠도 아닌 관중빠"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정사를 다루는 영상에서 연의에서의 차이점을 얘기할때는 종종 나관중이 독자들이 읽고 싶은 것이 낭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각색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아예 나관중을 각색의 천재(5분 10초대)라고 극찬할 정도로 높게 평가한다.
  •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와 달리 명나라 때 사람이라 삼국지 관련 게임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레이터 역할로 간혹 등장하는 정도.

5. 같이보기


[1] 이것은 관우나 조운에 활약에 대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띄워준 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에 내용에 대한 민담 외에도 삼국지연의 창작에 대한 민담도 많은데 이런 의문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2] 대표적으로 화웅여포가 있던 호뢰관과 사수관은 실제로는 같은 관문의 다른 이름이며(후한대에는 사수관으로 불렸다) 소설에 나오는 관우의 천리행 행로는 그대로 가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가게 된다. 다만 이와 같은 오류들은 어쩌면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각색일 수도 있다. 가령 호로관과 사수관은 중간보스 화웅과 스테이지 보스 여포를 순차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3] 그러나 당시 낙양은 여덟 개의 관문으로 보호 받던 지역으로(여담으로 사수관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낙양 동쪽에서 낙양으로 진군할 경우 사수관의 서쪽에 선문관이라는 관문이 존재했다. 즉, 낙양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4] 이 사람은 삼국지에 나오는 주유의 후손이라고 한다.[5] 물론 과거시험이라는 게 정신나간 수준으로 어려운 시험이라는 건 감안해야 한다.[6] 심지어 유럽은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카톨릭으로 인해 오랜 기간동안 크게 통일되었던 문화권이었지만, 동북아시아 3국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기엔 각자 이질적인 특색을 띄기도 했다. 이 동북아시아를 모두 관통하는 대표적인 요소가 바로 삼국지연의기도 하다.[7] 그러나 장비가 부하들에게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부하에게 죽은 상관의 매력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긴 하다.[8] 모종강은 관우가 손권 앞에 붙들려왔을리 없다는 배송지의 평가와 달리 손권과 대면하는 장면을 만든다.[9] 가정본 일부에는 관우안량을 참수할 때 묘사도 '''안량이 관우가 이야기하러 오는 줄 알고 방심'''했기 때문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안량 방심 대목은 나관중의 서술이 아닌 후에 추가된 것으로, 모종강은 관우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가볍게 삭제한다.[10] 정말 의도적으로 위선자 컨셉을 잡은 건지, 아니면 근현대에서 이렇게 해석이 된지는 불명. 일단 루쉰도 '위선자 같다'라고 했지 확정짓지는 않았다.[11]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전투에 있어서 기책, 책략 등은 한신과 맞먹을 정도로 과대평가되었으나 정치적인 능력인 내정과 관련된 부분은 과소평가되었다.[12] 사실 모종강도 조조에 대해선 악인이지만 웬만한 위선자들보단 조조가 훨씬 낫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조가 단순한 악한이 아닌 '''대단한 악인'''이라는 식으로 평가한다.[13]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헌제가 이를 보고 만족해하는 장면이 나온다[14] 서주 대학살의 경우 백성을 살육했다고 언급된다.[15] 도리어 나관중 덕분에 한때 유행하던 조조 재평가론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나관중이 조조를 입체적 매력을 가진 빌런으로 묘사해줬으니까 말이다.[16] 연의 내에서 적벽대전 동안 조조군을 신나게 발라버린 건 주유였고 이 신나게 발린 조조군을 다시 한번 발라버린게 제갈량이었다.[17] 물론 그래도 오의 비중이 위와 촉에 비하면 살짝 낮긴 하다.[18] 호왈백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은 오히려 양반이다.[19] 작중 맹달의 성품과 행실을 보면 전형적인 소인배며 무예가 강조된 적도 없다. 그런 맹달의 조준도 안된 화살에 이마를 정통해서 죽었다는건 모욕에 더 까깝다.[20] 다만 장비의 경우 아무래도 부하를 함부로 대하고 술술술거리는 성격을 집어넣었다 보니 어쩌면 "아무리 존나 센 사람도 이런 짓하면 캐망" 이라는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