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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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교주를 다스린 인물. 자는 위언(威彦). 뒤에 베트남의 쩐 왕조(陳朝)는 사섭을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연의에는 언급조차 없고, 정사에만 등장한다. 묘하게도 반삼국지에는 등장한다.
2. 생애
교주(交州) 창오군(蒼梧郡) 광신현(廣信縣) 사람. 교주#s-4라는 중국 최남단 지방(현재의 광둥 성, 광시 지구, 베트남 북부하고 중부) 주자사였다. 사실 한나라가 베트남을 제대로 지배한 시기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교지는 복파장군 마원이 쯩 자매(쯩짝[1] , 쯩니)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한에 속하게 되었지만 항상 베트남은 저항적이었고, 결국 유능한 인물 한 두명에 의존하는 형태로 반발을 눌러왔는데 사섭 역시 그 중의 한 명이다.
본디 사섭의 집안은 노국(魯國) 문양(汶陽)[2] 현이 본관이었으나 6대 전에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가 세워지는 혼란기를 피해 교주로 이사온 것. 그의 아버지 사사(士賜, Sĩ Tứ, 시 트)는 일남[3] 태수를 지냈다. 이러한 배경이 사섭 특유의 베트남 통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즉, 이전의 남월 지방에 세워진 군현을 다스리는 지방관들은 대개 교주 밖에서 왔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어둡고 통치하려는 의욕도 없어 수탈하고 빨리 중앙으로 진출하기에 여념이 없던 반면, 교주에서 6대를 살아오고 또 아버지가 교주 최남단인 일남군의 태수를 지낸 배경으로 말미암아 사섭은 이 지방의 사정을 잘 알았고, 또 이곳을 떠나 중앙으로 진출하기보다는 눌러앉아서 안정된 통치를 할 유인이 있었던 것이다.
사섭은 젊어서 경사에 유학해 좌씨춘추를 익혔으며, 아버지의 상을 치른 후에 교지(交沚)태수가 되었다. 사섭이 교지태수를 지내다가 196년에 당시 교주자사였던 주부(朱符)가 이민족에게 살해당해 교주가 혼란에 빠지는데 사섭이 표를 올려 각 형제들을 태수로 임명했다.[4] 사일은 합포태수, 사유는 구진태수, 사무는 남해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사씨 일가는 교주 전체를 차지하였고 사실상 독립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사실 주부가 죽은 직후에는 조정의 영향력은 그때까지도 어느정도는 남아있었다. 장진(張津)을 파견하여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장진은 이후에 또 그의 부장 구경(區景)에게 살해되었다.[5][6] 조정에서는 사섭을 교지태수를 겸하면서 수남중랑장에 봉하고 교주의 7개군(교지, 남해, 창오, 울림, 합포, 구진, 일남)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중원의 혼란을 피해 교지로 도망쳐 온 망명객들을 우대하여 교지 일대의 문물을 개방했으며, 이 과정에서 베트남에 한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서 그 지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등 번영을 누리게 된다.
사섭은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경학자이기도 했으며, 특히 춘추에 능해 주해를 달기도 했으며 원휘와 순욱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베트남 통치에서는 유교를 위시한 중국 문화를 이식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고 이즈음 남방을 통해 들어온 불교 등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이는 이후 베트남사가 중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201년부터 죽을 때까지 손권에게 종속하여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진상품을 매년 빠짐없이 보내며 충성을 다 바치며 살았다. 손권은 210년 보즐을 교주 자사로 보내 사섭에게 모시게 하면서도, 동시에 사섭을 좌장군에 임명했다.
사섭은 옹개가 일으킨 남만 반란의 실질적인 배후세력이었다. 반란을 유도한 공로로 손권에게 상까지 받았으며 아마도 재정 지원을 해준 듯하다.[7] 삼국지 시리즈에서 교지와 남만이 연결되는 건 여기에서 연유하는 듯. 실제로 삼국지의 남만은 사천성 남부부터 운남성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교주와는 바로 옆에 붙어있다. 실제로 이 길은 몽골군이 베트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운영했던 루트이며, 당나라 시기에는 운남성에 세워진 남조(南詔)가 교주 지역을 공격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참고로 남조는 후에 김용의 무협으로 유명한 대리국의 전신이다.
226년 '''무려''' 9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실 137년 출생이면 조조, 원소, 손견, 유비보다도 한 세대 앞선 동탁, 왕윤, 도겸, 채옹, 황보숭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4명의 군웅이 다 죽었을 때도 살아 있었고 '''그보다도 한 세대 뒤이자 자기보다 50년이나 연하인''' 조비랑 같은 해에 죽었으니 무진장 장수한 셈.
유경숙(劉敬叔)의《이원(異苑)》 권7에 따르면 창오왕(蒼梧王) 사섭(士燮)은 한말에 교지(交趾)에서 죽었는데, 남쪽 변경에 장사지냈다. 무덤에는 항상 짙은 안개가 끼었고, 신령스럽고 이상한 기운이 불항(不恒)하여 누차 난리를 피하니 (아무도) 다시는 (무덤을) 파내지 않았다. 진나라 흥녕(興寧) 연간에 태원(太原) 사람 온방(溫放)이 자사가 되었는데, 기병들을 대동하여 무덤을 파보게 하였다. (무덤을 파고) 돌아와서, 말들이 죽었다.
3. 사후
사섭이 죽자 오나라에서는 교주를 교주와 광주로 분할하는데 문제는 이 교주자사와 광주자사를 사씨 일족과 관계없는 인물들을 임명한 것. 사섭의 아들인 사휘를 안원장군으로 임명하기는 했지만 숨은 의도[8] 가 대놓고 보였기에 당연히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광주자사로 임명된 여대[9] 에게 설득(!!)당해 사휘 포함 사섭의 여섯 아들은 다시 투항하게 된다. 물론 죄목이 반란인 이상에야 용서는 없었지만, 문제가 되는 건 여대가 군수의 자리만 해임하고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권했다는 점이다. 여대는 이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조서를 읽어주고 처형해버린다. 이 때문에 위씨춘추를 쓴 손성은 여대가 사섭의 아들들을 거짓으로 투항시켜놓고 모두 죽게 한 것은 신의가 없으니, 여씨 가문의 봉록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신랄하게 깠다.[10]
손권이 사섭 사후 사씨 일족을 몰아내려 한 이유는 교주의 지형적 특징과 연관이 있는데, 교주는 남부의 산물인 물소뿔, 진주, 비취, 상아, 루비 등의 산지였으며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국가와의 교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중요한 집결지였다. 때문에 여기에서 나오는 이권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한나라 시절 그렇게 많은 반란이 거듭되고, 최후에는 준 독립세력에 가까운 형태의 통치도 묵인할 정도로 여기서 나오는 이권은 막대했다. 그러나 매년 진상품을 보내며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는 상대를 공격할 명분이 없었거니와 교지를 직접 다스리는 것은 기존 한제국도 포기한 형태였으므로, 사섭이 노환으로 죽자마자 그 빈틈을 노려 교주를 접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며 결과를 내는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또한 이후에는 6대째 자리잡고 살던 사씨 일족이 몰살당하는 것과 함께 교주 일대의 치안이 급격하게 나빠져 248년에는 대규모 반란까지 일어났다. 마지막 베트남 고유 세력의 반발이자 최후의 여성 지도자였던 조씨정의 반란이었다. 게다가 반란은 이거 하나로 끝난 게 아니라서 손권 사후 다시 한 번 폭발한다. 거기다 교역에서 나오는 이권도 호족연합체인 오나라 특성상 밑에서 다 갈라먹어 버려 정작 일을 벌였던 중앙의 손권에게 들어간 건 얼마 없었다. 결국 얌전히 조공을 바치던 사씨 일족을 몰살함으로써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은 셈.
4. 평가
월남 지방(현재 하노이 인근의 북베트남)의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이유로 베트남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며, 사왕(士王)이라 불리우며 칭송받는다고도 한다. 이 시기의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한제국에 저항하는 경향을 보이면서도 유능한 지배자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했다. 왕 소리 듣는 인물은 복파장군 마원, 왕망의 신나라 시기에 한나라의 문물을 전파한 석광, 후한 초기 농사 기술과 철제 농기구를 전파한 임정, 그리고 사섭이 여기에 포함된다. 사섭은 전후한 포함해서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중국 출신 지도자였던 것이다. 한국사와 비교해 보면 중국인 출신 지배자이지만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고조선을 계승해 괜찮은 취급을 받는 위만과 위상이 비슷하다.
사섭은 남월을 지키며 마음대로 하고 생을 마쳤지만, 그 아들에 이르러서는 신중하지 못하여 스스로 화를 초래했다. 아마도 평범한 재능으로 부귀함을 즐기고 험한 지세를 부지한 것이 그로 하여금 이 결과가 되게 했을 것이다. - 진수
사섭이 지배한 영역이 지금의 베트남 북부와 광서장족자치구, 그리고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광동성 전역이니 땅의 크기와 산물 및 중요도를 따져봐도, 그리고 이렇게 넓은 지역을 90세가 될 때까지 순조롭게 다스린 것을 보면 본좌급이 맞다. 게다가 사섭은 한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베트남사 파트)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아래에 나오는 시 히엡(니엡)이 바로 사섭.우리나라가 시서(詩書)가 통하고 예악(禮樂)을 익히며, 문헌(文獻)의 나라가 된 것은 사왕(士王)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공덕은 어찌 (사섭의) 당대에 특별하게 베풀어져, 멀리 후대에까지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자식의 불초함은 곧 자식의 죄이다. - 대월사기전서 오사련
중국사 파트에서 삼국시대 자체를 짧게만 언급하고 바로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로 넘어가는 것에 비하면(...) 사실 삼국지라는 소설 덕분에 삼국시대가 대중적으로는 상당한 인기가 있지만 사실 역사학적으로는 중국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기인데[11] , 삼국시대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후대에 끼친 영향이 구품중정제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사섭은 베트남사에서는 필수요소나 다름없으니, 일반적인 인지도와 달리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
5. 가족 관계
6. 미디어 믹스
6.1. 삼국지 시리즈
이처럼 연의에선 아예 안 보일 뿐더러 정사에서도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13] 코에이사의 게임에서는 삼국지 6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14] 평범한 얼굴그래픽에 평범한 능력치, 평범한 인생약력에다가 인기조차도 엄백호나 한복, 맹획 같은 하드코어 진영에게 밀리는 그냥 평범한 인기다. 물론 나름대로 위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 좋아하는 팬이 있기는 하다. 동북의 공손씨, 서북의 마씨와 함께 변방본좌.
삼국지 6에서는 사섭은 그냥 평범 그 자체다. 능력치도 평균 70대 정도고 역시 그 정도의 능력치를 가진 동생과 아들들이 4명 있다. 가장 남쪽인 교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뒷치기를 당할 우려가 적고 사씨 일족 뿐이기는 하지만 장수진도 그냥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라서 난이도는 중급이다. 다만 인재 풀이나 군사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확장을 시도해야 하고 삼국지 6에서는 남만족같은 이민족을 조심해야 한다. 본거지인 교지가 남만에 맞닿아있고 바로 옆 공백지인 남해는 산월에 맞닿아있기 때문에 남해로 확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같은 달에 남만과 산월이 양쪽에서 공격해 오면 멸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형남 4개 도시(무릉, 영릉, 계양, 장사)가 비었다면 교지를 버리고 그리로 이사해서 본거지를 구축하면 초반을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다. 장수도 돈도 없는 초반부에 이민족과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기 때문.
삼국지 DS(삼국지 3을 NDS로 리메이크)에서는 황건적 시나리오에 등장. 원래 삼국지 3에는 황건적 시나리오가 없지만 DS 오리지널로 첨가.
삼국지 7에도 등장. 삼국지 8과 삼국지 9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10에서 통솔 53/ 무력 31/ 지력 76/ 정치 80/ 매력 86으로 의외로 괜찮은 문관의 능력치를 가진 군주로 복귀했다. 정치와 매력이 높아서 군주로서 적절한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상업, 기술 특기가 있어 내정쪽으론 괜찮다. 특기 보유수는 10개로(상업, 기술, 일제, 고무, 반목, 항변, 반박, 논파, 명사, 제독) 설전 특기도 3개나 있고 명사 특기도 있어 여러모로 쓸만한 수준의 능력을 보유한 군주. 특기만 갖고 보자면 유비보다 여건이 좋다. 다만 부하 중에 쓸 만한 인물은 정치력 70대인 동생 사일 정도뿐이며, 나머지 사씨 일족의 능력치는 50~60대 정도로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수준이다. 사씨 일족은 한데 뭉쳐다니니 포박했을 때 원수 걱정 없이 죽이면 되지만 사섭은 그나마 능력치가 괜찮기 때문에 플레이어를 망설이게 한다. 역사대로 226년 90살로 사망하도록 책정되어 있다보니 정말 안 죽는다. 여기에 수명 연장약을 붙이면 정말 막판급인 236년까지 개길 수 있다. 다만 교지의 위치가 매우 구석진 것이 사섭에게는 양날의 칼인데, 중심지에서 워낙 멀다보니 중앙진출이 힘들고 아무리 장수제라지만 인재 구하는 게 다른 군주에 비해서 힘들다. 반대로 주변이 무주공산이라 다른 군주들이 서로 투닥거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여유롭게 세력을 확장해나가면 된다는 점에서는 의외로 난이도가 높지 않은 군주.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그나마 주변에 적들이 기어들어와 있는 상태라 역사 시나리오들보다는 난이도가 올라갔는데, 주변 적이라고 해봤자 형주 4군의 안습 군주 및 왕랑, 맹획밖에 없는데, 이 중 맹획 외에는 위험이 될 만한 존재는 없다. 사실상 그 주변 군주들 중 난이도가 제일 낮지 않을까 싶다. 과연 변방본좌.
삼국지 11과 삼국지 12에서는 또 다시 짤렸다가 삼국지 13에서 재등장했는데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3/31/76/80. 중신특성은 없고 전법은 화공계이고 병과적성은 창C/기B/병C 이다. 특기는 상업 2, 농업 3, 문화 7, 설파 6, 수영 1이고 전수특기는 학문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했던 점 덕분에 문화다. 일러스트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적벽대전(208년) 시나리오까지 꾸준히 군주로 나온다. 휘하 무장으로 사일, 사무, 사휘, 사광, 사지 등 일족들만 등장하는데 모두 주군인 사섭을 제외하고는 모두 C급, D급 무장이다. 전작과 같이 변방에 위치해 있어 초반 시나리오에서는 여유로운 세력 확장이 가능하나 인재가 고달프니 형주 남부로 진출해 형주계 인재들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도록 하자. PK에서 추가된 사이육국 시나리오에서는 손씨를 흡수하여 역대 최강의 사섭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사이육국은 이민족들이 깽판부리는데 사섭은 이민족들과 거리가 좀 멀다. 하기야 그 시나리오가 이민족들이 군주로 나오지만 실상은 그냥 군주만 바뀌었을 뿐인 세력들이 나오는 비정상적인 시나리오니 이해하자.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3, 무력 31, 지력 78, 정치 90, 매력 89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2, 정치력이 10 상승했다. 개성은 명경, 명성, 진흥, 교화, 인맥, 주의는 할거, 정책은 선종외시 Lv 3, 진형은 방원, 학익, 투석, 전법은 고무, 치료, 투석, 구축, 시람, 친애무장은 허정,[15] 정병, 혐오무장은 없다. 이 시리즈부터 장남인 사흠#s-1과 부하인 환린#s-2이 추가되어서 전작에 비해 쓸만해졌다. 그리고 영웅집결에서는 교지의 군주로 나오며 부하로는 사광#s-2, 사무#s-2.1, 사일#s-1.2, 사지, 사휘#s-2, 사흠#s-1, 환린#s-2까지 총 7명을 두고 있다. 소속 도시의 재야 무장으로는 삼국지 시대의 실존 여전사인 조씨정 1명만 출연한다. 인재가 부족한 데다 전투력마저 약한 사섭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등용해야 할 무장.
DLC로 등장한 성씨패란에서는 복양의 군주로 나오며 부하로는 사광#s-2, 사무#s-2.1, 사일#s-1.2, 사지, 사휘#s-2, 사흠#s-1까지 총 6명을 두고 있다. 소속 도시의 재야 무장으로는 구건#s-2, 복양흥#s-2, 설란#s-5.1, 설제#s-1.1, 악진, 악침#s-4, 양호, 양휘유#s-3, 우금, 윤례#s-4, 이적, 중장통#s-2, 창희#s-2, 포도, 포신#s-2.4.1, 포훈#s-1 총 16명이 있는데 이들을 모두 등용하면 난이도가 급하락한다. 다만 처음부터 군사가 없어서 지력 70 이상의 무장들인 복양흥, 양호, 양휘유, 우금, 이적, 포신, 포훈 중 1명이라도 먼저 등용되면 반드시 군사로 임명한 다음에 전력을 쌓도록 하자.
14PK에서는 전용전법 도남지익(図南之翼)을 얻었다. 범위 내 아군의 부상병을 회복시키고 적의 공성을 저하시키는 지력 의존 전법
6.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도 등장. 브리타이 크리다닉으로 패러디되었는데, 두번째 컷을 보면 데컬쳐라 적혀 있다.
6.3. 토탈 워: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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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겸, 엄백호에 이은 3번째 FLC 추가 세력으로, 네 번째 DLC 흉폭한 야생에서 추가된다. 타입은 모사. 군웅할거,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플레이가 가능하다.
추가가 확정되기 이전에는 논플레이어블 마이너 군벌 세력으로 등장했는데, 군웅할거 캠페인 외에도 천명 캠페인과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사섭 세력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고유 일러는 없고 클론 군주였다. 황제가 되면 나라 이름은 '파(巴)' 국이 되었었다.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가, 주목 세력임에도 칭제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있어서인지 무주공산인 익주 남부 ~ 교주 일대를 근거로 칭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16]
거의 모든 플레이어블 팩션들이 다 강북에서 시작하고 유일하게 강남에서 시작하는 손견도 강북 지역과 강을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어 마냥 빈 땅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 AI 사섭은 맵 남서쪽 끝, 성도에서 내려가고 운남에서도 더 내려간(...) 교지 지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인근 몇 개 군을 통틀어 견제 세력이 아예 없다. 미개발지역이라 빈 땅부터 하나씩 시작해야 하지만 향신료 시장도 있고 무역항도 있어 시간만 조금 소모하면[17] 혼자서 빈 땅이랑 한나라 땅 느긋하게 일궈가며 배 두드리며 살 수 있다. 덕분에 플레이어가 강북 지역에서 피터지는 싸움을 하며 평정 한 뒤 황제를 선포하면 손견의 오나라와 함께 사섭이 파 제국을 선포하며 같이 황제가 되는 꼴을 왕왕 볼 수 있다. 사실 캠페인을 하다보면 두 판 중에 한 판은 황제 사섭을 구경할 수 있다.
FLC로 추가돼서 플레이어블 세력이 되고부턴 황제가 된 후의 나라 이름이 구진(九眞)으로 바뀌었고 고유 일러스트 등이 추가되었고, 고유 자원으로 가족을 관직에 앉히면 얻게 되는 '위엄'이라는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대신 남만 세력이 추가돼서 전쟁과 외교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하도록 바뀌었다. 자세한것은 문서 참조.
7. 둘러보기
[1] 대항해시대 4에서 동남아시아 패자의 증표인 츈차크의 왕관의 츈차크가 바로 이 쯩짝이다.[2] 예주(豫州) 지역으로서, 지금의 산동(山東) 연주부(兖州府) 영양현(甯陽縣)이다. 동북쪽이다.[3] 지금의 베트남 녓남성 일대 당시로선 한나라의 최남단지역이었다.[4] 196년은 조조가 허현으로 천도한 해이다. 이 시기에 표를 올렸다는 말은 실제로 중앙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임명하고 명분상 흉내를 내었다는 뜻이다. 원소, 공손찬, 유표 등 많은 군벌이 비슷한 행동을 했으며, 조조가 연주목이 된 연유도 원소가 중앙 정부에 표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정작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진짜 연주목 금상은 조조에게 공격받아 쫓겨났다.[5] 배송지주의 『이주춘추(二州春秋)』에 따르면 장진은 건안 6년(201년) 교주목이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직후 얼마되지 않아 살해 된 것으로 보인다.[6] 사섭전에 따르면, 장진이 죽자, 형주의 유표는 영릉의 뇌공(賴恭)을 보내 장진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때 창오태수 사황(史璜)이 죽었으므로, 유표는 또 오거(吳巨)를 보내 그를 대신하여 뇌공과 함께 가도록 했다. 하지만 뇌공은 오거에게 살해당했다. 오거는 나중에 손권에 의해 봉해진 보즐에게 불복종을 이유로 유인되어 살해되었다.[7] 자신이 죽은 후 오나라가 교주를 탈취할 것이라 예상, 남만까지 아울러 오나라에서 독립을 하려 했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8] 교주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사씨 일족을 배제하고 싶다는 의도.[9] 여담으로 사섭을 능가하는 삼국시대 장수의 끝판왕 중 1명. 유비랑 동갑이면서 그 손자뻘인 사마사보다도 나중에 죽었다. 향년 '''96세'''.[10] 여씨 가문도 사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후손 한 명 남기지 못했다는 뜻이다.[11] 그나마 오나라는 장강 이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첫 시작이 된 나라라서, 중국의 경제사를 논할 때 꽤 중요하게 다뤄진다.[12] 사섭의 동생인 사일의 아들이다.[13] 물론 중국사 기준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며, 베트남사에서는 윗 문단에도 나오듯이 중요한 인물이다.[14] 원래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정사 전용 인물들을 홀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의쪽을 중심으로 게임을 제작하는 것이 훨씬 대중들의 정서에도 맞고 편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연의에 등장하지도 않고 실제 역사상으로도 별 활약도 없는 이 사섭이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도에 세력을 채울 필요성과 더불어 사실상 하나의 국가인 베트남을 포함하여 세계관을 확장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추가한 이유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5] 허저의 형인 허정이 아닌 촉나라 태부인 허정이다.[16] 특히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는 마등, 유장과 함께 칭제가 불가능한 주목임에도 칭제해버리는 경우가 많다.[17] 말이 미개발지역이지 기반은 다 갖춰져있어 식량이고 수입이고 여유롭고 오른쪽 남해는 논밭에 축사에 교역항까지 갖춰져있어 풍요롭기로는 장안과 낙양이 부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