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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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
1. 개요
우덕순(禹德淳, 1879년[1] ~ 1950년 9월 26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 주역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단운(檀雲)이며, 이명(異名)은 연준(連俊)이다.
2. 생애
충청북도 제천시 출신으로,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썼다.
1908년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慶興)·회령(會寧)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탈출하였다. 1909년 봄, 연추(煙秋, 당시 러시아어 명칭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 보국을 다짐하였으며,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 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했으나, 일본의 감금으로 인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고, 열차는 그대로 하얼빈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았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고, 광복 후 헤이룽장성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우덕순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사망했다. 우덕순이 어떠한 경위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고 다만 두 가지 이견만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 해 9월 26일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2] 또다른 이견은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그 해 9월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950년 11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기반한 것이다.
다만 이 기사에는 이광수, 최린, 박열, 고창일 등의 사례처럼 한국전쟁 이후에 사망했거나 다른 경위로 사망했다고 밝혀진 사람들도 전부 학살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액면 그대로 신뢰하긴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덕순의 유해가 한국에 있는 걸로 근거해 우덕순은 납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서울에서 납치당한 수천 명의 요인에 관하여서는 현재까지 그 행방이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부분적으로 소식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나 그 중 신의주 출신인 류영목(법전 출신 왕년의 축구출신)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9월 3일부터 7일 사이에 평양형무소 감방에서 같이 있던 요인 천여 명이 '''학살'''된 것을 이번 평양 수복 직후에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서울시 정찰부국장 최운하씨 등 다음 제씨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준호, '''우덕순''', 장기덕, 이광수, 최린, 옥선진, 최규동, 김일룡, 박원삼, 박열, 이성근, 고창일, 구자옥.
『조선일보』 1950년 11월 15일자 기사 中[3]
사망 당시 향년 71세였으며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밀정 논란
3.1. KBS 시사기획 창 밀정편에 의한 1920년대 행적 논란
시사기획 창 밀정 1부 - 배신의 기록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 2019년 8월 13일 방송에 따르면 우덕순이 1920~30년대에 하얼빈 조선인민회장 및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간부를 맡았다는, 이미 예전에 학계에서 확인된 내용이 방송에 보도됐다. KBS가 입수한 자료중에는 1925년 우덕순이 일본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에게 보낸 공문서가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외무성의 보조로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예산지원을 요청합니다"라면서 하얼빈 조선인민회의 예산보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일단, 독립운동가였단 사람이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는 단체의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방송에 따르면 이 단체의 성격이 만주의 한인들을 통제 감시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친일 단체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 이 단체의 예산중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소위 첩보비, 밀정비 등의 자금으로 특히 조선인민회가 밀정의 월급으로 지급한 액수는 무려 당시 50원으로 오늘날 가치로 200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당시 신입교사의 초봉이 45원이었고, 일제가 조선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관료들에게 조선어를 익히게 하고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주는 포상금이 50원이었으니# 밀정들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덕순이 하얼빈의 고급호텔인 북만호텔에서 식사를 한 영수증도 발견되었는데 그가 식사를 하는데 쓴 비용만 25엔, 오늘날 가치로 수백만원이다. 더군다나 같이 식사한 사람이 일본의 특무기관원인 것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만주의 찬바람속에서 가난과 고통속에 독립운동을 하는동안 우덕순은 고급호텔에서 일본특무기관원과 수백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민회는 밀정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우덕순은 이런 밀정들을 관리감독한 최고책임자였다는 의견이다.# 실제 일본 외무성 기록에 의하면 우덕순이 이끌던 하얼빈 조선인민회에 대해 외무성은 '''모범적인 민회'''라고 높게 평가했다. 위에서 우덕순을 밀정으로 분석하게 한 자료의 근거는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 행적이다. 시사기획 창은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 행적을 근거하여 우덕순을 밀정으로 확정한 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3.2. 1930~1940년대 행적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934년에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분명히 이런 내용이 있다.
위의 KBS 방송에선 20년대 문서를 근거로 우덕순을 밀정으로 추정하였는데 정작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1934년 문헌에선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있는 인물이라 하며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적고 있다.'''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
우덕순에 대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에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기록한 내용'''[4]
그리고 해당 변절 의혹은 이미 전에 제기된 내용이다. 우덕순이 일본총영사관에서 1925년 4월 30일 6,175엔을 받았다는 기록은 이미 한참 전에 발굴됐고 신운용 박사가 이미 2010년에도 친일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신운용 박사는 일제문헌을 연구하는 도중 그런 의견을 철회하였다.[5]
그리고 당시 언론내용을 보면 '''우덕순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있다'''고 나온다. 또한 만주에서 귀국한 한인들로 구성된 동삼성한인협력회의 회장을 맡았고 이에 대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규탄당한 문헌을 확인할 수 없다.[6]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신운용 박사는 "이는 그가 친일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라고 논문에서 결론을 내렸다.[7]
물론 위의 언론보도가 거짓이란 가설은 가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러니 이에 대해 일제문서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데 정작 KBS 방송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일제내부는 우덕순을 1934년에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기록하며 주의해야할 명단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이후에 대한 자료를 봐야 밀정인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할텐데 이에 대해 관련 방송이나 논문을 확인할 수 없다.
우덕순이 밀정일 수 있다. 하지만 밀정이 아닐 수도 있다. 정확한 증명은 '''밀정을 주장하는 측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KBS 방송이 잘못한 점은 증거로 제시한 일제 내부 문서가 다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이다. 그런데 어째서 1934년의 일제 문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추적하지 않았다.
위에서 근거한 논문들은 신운용 박사의 논문인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운용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으로 안중근 의사 관련 대표적인 전문가이다.
일단 우덕순을 국립현충원에서 빼버려야 할 증거는 부족하거나 없다. 빼고싶으면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하나 증거가 없으면 우덕순을 빼야 할 이유가 없다.
일제강점기 전체도 아니고 겨우 1920년대 일부 행적만 방송에서 본 것 가지고 밀정으로 판단하는 건 상당히 무리가 있다. 전문가의 연구자료를 확인해봐야 한다.'''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고 있고'''...(이후 KBS가 박사의 발언을 편집)[8]
배경한 박사가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News)" 20분에서 김규흥 관련 내용에서 한 답변[9]
민족문제연구소도 우덕순 밀정여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좌진 비서에 대해서는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비서는 밀정이었다”』고 인용하는 것과 다르게 우덕순에 대해서는 『‘안중근 거사 동지’ 우덕순의 이상 행적 포착』 등 "이상 행적"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 우덕순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의 글도 참고해볼만 하다. 이 글도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근거하여 쓴 글이기 때문에 오마이뉴스의 뇌피셜에 근거한 글은 전혀 아니다. 안중근의 동지가 일제의 밀정? KBS 결론 아쉽다
2019년 10월 18일 기준으로 KBS 뉴스 캡쳐 사진은 매우 잘 퍼져나갔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에펨코, 루리웹, 더쿠넷 등에 올라온 자료를 볼 수 있는데 고인드립이 심각하다. 정작 신운용 박사의 견해나 논문에 대한 이야기는 잘 퍼지지 않는다.(...) 안중근평화연구원가 기획한 안중근 자료집 1~3차까지 편역한 사람이 신운용 박사고 안중근 의사 관련 부분에서 대표적 전문가인에도 말이다.
3.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통과기준 미달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친일반민족행위 기준미달이다'''
국회도서관 링크 여기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 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을 해보자. '''다운로드 무료다.'''
보고서 3-4 482-486 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 명 이상인데 이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그 외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된 것이다.[10] )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회장의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은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분류가 아예 다르다.'''
3.4. 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하면 편찬위원회에는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 학자 등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방송에서 우덕순 친일변절설을 주장하고 '''발언'''한 인물은 겨우 김주용, 장신, 반병률 3명이다. '''학계논문심사를 통과한 논문도 아니다.''' 그에 비해 신운용 박사는 논문 심사를 통과한 논문이 있고 학계에서 반론[11][12] 이 없다.
3.5. 방송이후 신운용 박사의 반응
2019년 10월 9일 신운용 박사는 '''기자쪽에서 신운용 박사에게 연락한 일이 전혀 없었다'''며 방송보고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그리고 '''학자는 논문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며 언론에게 찾아가서 발언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3.6. 김규흥 문제 학계 합의 여부
김규흥에 대해서는 방송만 보면 학계정설처럼 보이겠는데 정작 친일인명사전에 참가한 학자 150여명에 비하면 극소수고 그 극소수중에서 배경한 박사가 확정에 반대하고 있다. 인터뷰에서도 '''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고 있고'''[13] 라고 답변했다.
3.7. 민족문제연구소 견해와 일치 여부
KBS의 밀정 2부작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학계가 주도적으로 심사하는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와 임정 초기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희귀자료를 발굴하고 소개"가 이유지 우덕순 부분 때문이 아니다. 그 상이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그간 언설로만 전해져 오던 ‘밀정’의 실체와 죄상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특히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밀정 또는 친일 혐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하는데 혐의자는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봄. 또는 그 가능성."#을 가르키지 사실 그 자체를 가르키지 않는다.
시사기획 창 제작진들의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다르다. 증거가 있다.
시사기획 창 제작진들은 김달하를 밀정이라 확정하고 방송하였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하니 견해가 다르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2017년 김달하에 대해 문의하니 2017-06-07에 "해당 인물이 실제로 어떤 밀정행위를 했는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연구,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 등의 1차 사료 등이 현재로서는 부족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도 <친일인명사전>을 준비하면서 주목했던 인물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점으로 인해 현재까지 확정지을 수 없어 '''보류중'''입니다."라는 답변이 왔으며 '''2019-08-21'''에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님께 메일을 드려 문의하였는데 "2017년 연구소의 어느 연구원님이 회신드린 '''답변에 추가할 내용이 없네요'''."라는 답변이 왔다.
이 내용을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직접 확인해보라. https://www.minjok.or.kr 이곳에선 '열린광장' 클릭하고 문의를 눌러서 직접 이 내용을 문의하면 확인이 가능하다.
임경석 교수는 KBS 보도에 나온 김복 관련 문서를 근거로 김달하를 밀정이 아니라는 의심이 가셨다는 글을 투고하였다. # 그러나 정작 사료를 발굴하고 조사한 배경한 교수의 견해는 다른데 배경한 교수는 그 문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또한 둘다 논문이 아닌 글로 전달했으므로 둘다 학술적으로 제대로 검증된 설명도 아니다.'''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고 있고'''...(이후 KBS가 박사의 발언을 편집)[14]
배경한 박사가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News)" 20분에서 김규흥 관련 내용에서 한 답변[15]
3.8. 기타
만약 우덕순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KBS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가능성이 컸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우덕순의 후손이 있는지 수소문했지만 무소식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우덕순의 후손은 독신이었으며 이미 사망하여 대가 끊겼다.
아래는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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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의 글이 KBS 취재인 것과 별개로 확실히 오류(혹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가 있는데 조선인민회 관련부분이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근거로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친일반민족행위 기준미달이다. 국회도서관 링크 여기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 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을 해 볼 수 있다. 다운로드는 무료이니 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고서 3-4 482-486 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 명 이상인데 이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그 외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된 것이다.[16] )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회장의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한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은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분류가 아예 다르다. 다시 말해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도 아니고 그중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건 극소수이며 그 극소수조차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조선인민회장 관련 내용과 다르게 쓴셈. 물론 위 글도 '조선인민회장 자체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했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선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한다'고도 말하지도 않았므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로 볼 수도 있다. 확실한건 실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으로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극소수만 제외하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되지 않는다.
4. 대중매체에서
- 1959년작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김일해가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나영진이 맡았다.
- 1996년작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맹상훈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