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흥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규흥
金奎興'''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2년 6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문정리
<color=#fff> '''사망'''
1936년 8월 16일
중국 텐진시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본관'''
청풍 김씨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국권회복운동
2.3. 신해혁명에 가담하다
2.4.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사건
2.5. 독립군 양성 운동
2.6. 말년
3. 변절 논란
3.1.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와 편지
3.2. 정말로 변절했는가?
3.3. 김규흥 변절 논란 진행 상황
3.4. KBS의 2019년 8월 20일 방송 '시사기획 창'의 신뢰성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규흥은 1872년 6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문정리에서 부친 김명성(金命性)과 모친 연일 정씨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기현(起賢), 호는 범재(凡齋)이며, 이명은 김복(金復)이다. 그의 선조는 본래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으나 6대조인 김술노(金述魯)가 무주부사를 지낼 때 옥천의 풍경을 흠모하여 옥천에서 이주할 마음을 먹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자식들이 그의 뜻에 따라 옥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조부인 김동교(金東敎)로부터 한학을 교육받았고, 20세 때 경서를 통달했다고 한다. 특히 육도삼략을 관심있게 봤다고 한다. 그리고 1901년 이전에 상경하여 중교의숙(中橋義塾)의 교원을 지냈다. 김현구(金鉉九)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규흥은 윤하영(尹夏榮)과 함께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을 공유했다고 한다. 또한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흥은 의병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삼종형인 김규철(金奎喆)이 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을 보호해주거나 숨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현구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규흥은 전우를 왕권주의자라고 평가하며 그의 이신촌(李臣村)[1] 생활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렇듯 초년기엔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을 따르던 그였지만, 서울로 올라온 후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1902년 김현구에게 동국통감, 고려사,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를 선물하면서 신식학문을 공부하도록 조언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량치차오의 <응빙실문집(飮氷室文集)>, <만국사>, <자서조동(自西組東)> 등의 서적을 선물했다. 한편 김규흥은 김현규에게 남규홍, 심의성, 유근, 원영의 등 대한자강회 회원 인사들을 소개했으며, 자신과 절친한 관계인 조봉식의 집에 김현구가 하숙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06년경, 김규홍은 조 진사라는 인물을 김현구에게 소개하고 그와 함께 역사와 과학, 시국 상황에 대해 가르쳤으며, 량치차오의 응빌실문집에 대해 토론했다. 김현구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규흥은 입법, 사법, 행정권의 삼권분립을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영국의 대헌장, 미국의 권리장전처럼 정당 정치의 시행을 강조했고, 헌법을 바탕에 두는 정치를 추구했다. 그리고 어떠한 정치 형태이든 폭정을 단언코 반대했다. 다만 조 진사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주장한 데 반해, 김규흥은 사회주의를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봤으며, 노동자 독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는 사회주의를 통한 한 번의 혁명을 강조했다. 그가 단 한 번의 혁명을 강조한 것은 혁명으로 인한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현대의 민주주의가 정치 개선에 집중하여 경제 개선은 소홀히 한다고 평가하였고,경제 개선을 위해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김규흥은 민주주의가 빈부의 차이를 파괴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하면서,이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속제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옥천에서 유명한 거부였으며, 특히 논산에 있는 강경평야 일대 전역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1866년 10월 1일과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김규흥의 조부 김동교가 경복궁 중건 공사를 지원하기 위해 원납전 1만 냥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황성신문 1901년 11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김규흥은 와가(瓦家) 85칸 반, 초가(草家) 12칸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옥구항보첩(沃溝港報牒)>의 옥구감리 정항조에 따르면, 김규흥은 1904년 김원식(金元植)이라는 사람에게 은진군 강경포 중촌(현재 논산시 강경읍 중앙리)에 소재한 집 20칸을 팔았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탄탄한 재정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다.

2.2. 국권회복운동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 1905년 숭릉 참봉(崇陵 參奉)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순탄하게 이어가던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한제국관보> 궁중녹사(宮廷錄事) 1906년 1월 21일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후에 다시 6등의 품계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1906년 4월 14일 황성신문 기사에 그가 전 참봉으로 소개된 걸 보면, 그는 이 또한 곧 사임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8월, 김규흥은 옥천에 세워진 진명학교(進明學校)에 100원의 보조금을 기부했다. 이후 옥천에 창명학교(彰明學校)를 설립했으며, 1906년에 창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가 대한자강회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던 1907년 7월, 김규흥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한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종이상인이나 인삼상인으로 변장하여 일제 당국의 감시를 회피하며 중국의 부호, 군벌 등에게서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 중에는 첸정밍(陳炯明)과 탕사오이가 있었고, 영국과 독일의 장관급 인사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김규흥은 이경직(李耕稙)과 부인 연일 정씨, 조민희, 민경호, 강홍대의 주선으로 고종을 알현했다. 이경직의 부인 연일 정씨는 왕실의 인물이었다고 하며, 김현구의 어머니와 6촌 사이였다고 한다. 또한 강홍대는 궁중에서 어의로 생활하며 궁궐에 자주 드나들었고, 김규흥에게 고종의 밀명을 전달한 이도 바로 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규흥은 고종에게서 상당량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일제기밀문서는 그가 3만엔을 받았다고 기록했고, 김현구의 자서전에는 4,000만원 가량의 왕실 차관을 국권회복의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민보>는 김규흥이 아청은행의 9,000만원 정도의 차관을 이용해 상하이에 무관학교를 세우고자 하였다고 전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공문서로서 정확성이 요구되는 일제 기밀문서 쪽이 사실과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3만엔은 쌀 2700석 정도의 가치로 상당한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하기 전에 일제 헌병대에게 발각되었다. 인천에서 헌병대에게 체포된 김규흥은 100일간 감금되었고, 이후에도 1년간 감시를 받았다. 이 시기 그는 통감부 고등관으로 인도되어 포상과 관직을 제안받았고, 중국에 있는 황실 차관을 받아와서 일본에게 넘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규흥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1년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중국으로 망명했다.

2.3. 신해혁명에 가담하다


1908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인 블룬칠리가 146호에 잠복했다. 그러다 1909년 5월 11일 그곳에서 도주하여 행적이 묘연해졌다. 일제는 그가 익성루라는 여관에서 투숙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밀정을 보내 조사했지만, 실제로는 익성루라는 여관은 존재하지 않고 지부의 다른 여관에서 투숙하는 인물 중에 그의 이름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일제의 추적을 따돌린 그는 1909년 5월 무렵에 광동으로 이동했고, 1910년 3월 13일 광동의 나부산(羅浮山)을 유람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사진 뒷면에 나부산에 대한 시를 썼다.
이무렵, 그는 중국 혁명파에 가담했다. 추로(鄒魯)의 회고에 따르면, 광둥에서 혁명운동을 종사하던 때 조선인 '김범재(金凡齋)'라는 인물이 함께 했는데, 그는 성실하여 비밀문서를 보관하거나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또한 김범재는 전통 한복과 갓을 착용해서 그를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나유산(羅幼山) 등은 이러한 김규흥을 신임했고, 그가 추구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한국인들의 동북지역 이주를 논의했으며, 사람을 동삼성으로 보내 황무지를 조사하게 하기도 했다.
기록은 현존하지 않지만, 그는 이 시기에 중국 동맹회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는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광둥성에서 열성적으로 활약했고, 그 결과 1912년 총유정처(總綏靖處) 참의(參議), 1913년 1월 고문원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혁명정부가 장악한 지역의 주요 관직들은 원칙적으로 동맹회 회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 직책에 오른 그가 동맹회 회원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신해혁명 이후, 김규흥은 중국 혁명 세력과 함께 공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헌법을 무시하고 독재 정치를 펼치자, 그는 토원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913년 10월 홍콩으로 이동했다. 그해 12월 20일, 그는 박은식과 함께 <향강잡지(香江雜誌)>를 창간했다. <향강잡지>는 중화민국의 공화제가 수립된 것을 축하하고 공명정대와 자립정신을 창간 배경으로서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한국을 부활시키는 기회로 삼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향강잡지는 발행 3호 또는 4호 만에 위안스카이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이에 김규흥은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2.4.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사건


김규흥은 1916년 7월 하순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이때 그는 소위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사건'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이 '음모'는 조선인이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러시아의 활동을 방해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포로를 구출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이 계획은 북방의 조선인과 연락하여 시베리아철도를 파괴하고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연락을 단절시켜 단독강화를 촉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구상한 이는 당시 상하이에서 상업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인 셸러 킨들러(Shaller Kindler)와 독일인 쉬어스(Schirs)였다. 그들은 이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조선인을 포섭하려 했다. 이때 중국에서 철도 기사로 근무하던 그리스인 라베르도스(Laverdos)가 이들에게 김규흥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김규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규흥은 자신이 베이징으로 가서 이우영(李宇榮)과 협의하고 준비하겠다고 밝힌 뒤 구체적인 보수 등에 대해 협의했다.
킨들러와 쉬어스가 이러한 계획을 추진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의 식민지였던 청도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파괴해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연락을 단절시키고 일본을 고립시키려 했다. 김규흥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꼈다. 그는 독일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하면, 한국의 독립으로 직결될 거라고 봤다. 그는 쉬어스와 킨들러에게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줄 것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계획이 성공하면 충분한 사례를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킨들러가 독일 선박에 감금되면서 이 계획이 들통나고 말았다. 당시 킨들러는 김규흥과 이우영을 이용하여 독일총영사관으로부터 총 2,000원의 자금을 확보했는데, 그 중 1,500원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이에 분노한 쉬어스가 그를 독일 선박에 감금해버렸고, 이로 인해 그동안 세웠던 계획이 일본과 러시아에 노출되어 버렸다. 결국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5. 독립군 양성 운동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 김규흥은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새로운 계획을 준비했다. 일제 기밀문서에 따르면, 그는 장기인 문필로서 중국의 신문과 중국의 남방파[2]를 이용해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한편 김규흥의 후손들은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을 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과 함께 간 김복(金復)이 김규홍의 이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김규흥이 파리에 파견된 이유는 제형인 김규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복'이라는 인물은 김규흥과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여운홍이 저술한 <몽양 여운형>에 따르면, 그는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했을 때 김탕(金湯)이라는 인물이 김규식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운홍이 김복과 김탕을 헷갈렸을 수도 있지만, 그는 김탕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면서 '청년'이라고 표현했다. 1919년 당시 여운홍은 29세였고 김규흥은 48세였다. 만약 김규흥이 김복이라고 칭하면서 파리에 파견되었다면, 여운홍이 자신보다 19살이나 나이 많은 사람을 청년이라고 기억할 리 없다.
아무튼 베이징에서 중국의 여러 인사들과 교제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꾀하던 그는 1920년 첸정밍의 지원을 받아 아나키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5월 2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성히 유포되는 한중러 관계의 여러 설'에는 아나키즘을 주창하는 김규흥의 발언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그는 박용만이 이끄는 대한인국민회에 편지를 보내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할 것을 호소했다.
이 시기 안창호는 자신이 겸임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김규흥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김규흥은 스스로 적격이 아니라며 사양했다. 이후 그는 안창호와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했다. 1920년 7월 9일 안창호를 만난 그는 레닌 정부에 요구하여 시베리아에 한국의 군영을 조직하고 6개의 사단을 양성하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사단을 양성한 뒤엔 만주의 중국군과 연합하여 베이징의 군벌을 타도하고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자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안창호에게 시베리아에 세워질 6개 사단의 총지휘를 맡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서 김규흥의 계획을 반대했다.

1. 우리 겨례는 기전성(耆戰性)이 없고, 더욱이 타국 혁명을 위하여 전투에 참가할 가능성이 없다.

2. 아가격파(俄過激派: 러시아 과격파)와 중국 남방 진파(陳派) 모두 실력이 공허하니 6사단 양성은 공상 뿐이지 실현될 수 없다.

3. 한인의 몇 사단 군인이 시베리아에 모집한다 하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이니 근거지를 유지하기 힘들다.

4. 우리 겨례의 성격이 서로 복종치 아니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5. 우리가 과격파와 연락하다 일이 잘못되면 세계의 동정을 잃게 될 것이다.

안창호는 그러면서도 김규흥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유동설(柳東說)과 상의하게 했다. 그러나 김규흥은 안창호가 독립군 기지 건설에 소극적이라고 여겼는지 이후로 다시는 안창호와 만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1922년 봄 베이지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 박용만과 뜻을 함께 했다. 그는 북경군사통일회의 간사직을 '김복'이라는 이름으로 맡았다. 북경군사통일회는 경제적인 기반을 구축하여 국내와 중국·러시아 각지에서 통일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북만주 방면에 둔전병의 조직을 시도하는 한편,소련 정부로부터 조선독립군의 기간병과 무기를 지원받으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선 1919년 11월 15일, 김규흥은 흥국실업은행을 창립했다. 흥국실업은행은 표면적으로 한중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실업 제휴에 뜻을 두었고, 중국 흑룡강, 길림, 텐진 등의 농간사업(農墾事業)을 진흥시키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군사 통일과 둔전제 실시를 위한 군자금의 모집에 있었다. 흥국실업은행은 한국 측에서 김규흥·김무규(金貿奎)·김남한(金南獻)·이유필(李裕弼)이 참여하였고, 중국 측에서 왕정팅(王正廷)·사원한(謝遠涵)·첸지밍 등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김일강(金一江)·쑨원·장건(張謇)·우정방(伍廷芳)·이열균(李烈鈞)·후한민·고일청(高一淸) 등 한중 양국의 유력인사들이 후원하였다. 흥국실업은행의 창립은 <독립신문>에서 독립선언 이후 한중합작 사업의 효시라고 하였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흥국실업은행은 자본금 총액을 2백원으로 하고 수납금을 총액의 1/4로 하여 주식을 공모했다. 이후 명칭을 흥화실업은행으로 개칭하면서 약 1만엔의 투자금을 모았다. 이 금액은 예정 투자금 10만엔의 1/10이었다. 또한 김규흥은 최윤동과 연락하여 국내에서 주권을 모집하도록 했고, 전덕윤(全德元)의 사자(使者) 장세빈(張世彬)을 통해 어느정도 자금을 얻어냈다. 또한 그는 1921년에 일시 귀국하여 고향인 옥천군으로 가서 집안의 재산을 처분하여 주권을 모집하는 데 사용했다.
김규흥은 이렇게 해서 모은 자금을 가지고 가서 북경군사통일회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군사통일회가 둔전병을 양성하기 위해 추진한 석경산농장 경영을 지원했다. 박용만은 김규흥이 총감독하고 있는 흥화실업은행에서 2,500원을 빌려서 석경산 농장의 경영비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규홍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흥화실업은행은 예정된 출자금을 모집하는데 실패하였다. 흥화실업은행은 한중합작으로 주식을 모집하여 1∼2만엔의 출자금을 모았지만, 이는 예정된 총금액 10만엔의 1/10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또한 국내 선전의 성과로 1∼2명에게 투자를 받은 것이어서 중국 측 주주의 신뢰는 추락했다.
이 시기 김규흥은 아들 김진원에게 국내에 있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중국으로 보내도록 했다. 그래서 김진원은 죽향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가문의 토지와 선산을 매매하여 김규흥에게 보냈는데, 김규흥과 함께 활동 중인 요원이 그돈을 받아서 갔다고 한다. 그러나 1924년 2월, 북경 경찰청은 김규흥을 포함한 발기인들에게 은행의 정산 결정까지 엄중하게 감시하겠다고 권고하였고, 김규흥은 김태석과 함께 잠시 몸을 숨겨야 했다. 이후 흥화실업은행은 폐쇄되었다. 뒤이어 석경산농장 경영도 좌절되었다. 농장에 대한 임차료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면서 박용만이 지주에게 고소당했기 때문이다.

2.6. 말년


모든 활동이 실패한 뒤, 김규흥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에서 체류했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김규흥은 1926년에 펑위샹의 군사 고문이 되었으며 1929년 장학량의 휘하에서 재적 한인 귀화 조사회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규흥이 펑위샹과 장학량 휘하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김현구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규흥은 박용만과 함께 한국인의 중국 귀화와 내몽고에서의 군사훈련을 계획하였고, 펑위샹이 이들의 계획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펑위샹과 장학량은 한국의 독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그와 연대를 함께 해온 박용만이 1928년 같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李海鳴)에게 피살당했다.이에 깊은 상실감을 느낀 그는 베이징을 떠나 조카인 김진영과 함께 톈진에서 생활했다. 당시 톈진은 천진조선인친목회(天津朝鮮人親睦會) 등의 부일단체가 기승을 부렸기에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텐진에 있는 부일단체를 이용해 한국인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암담한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던 그는 1936년경 이질이 발병했고,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 김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규흥은 1936년 8월 16일 이질과 치료제 중독으로 텐진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국내로 들어와 고향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김규흥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변절 논란



3.1.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와 편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의 일기 1919년 5월 9일자 기사에는 “이번의 첩보를 위해 상하이에서 일을 시킬 야마토 세이후(大和正夫)를 불러 만났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세이후가 상하이로 돌아갈 때, 다로는 그에게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선인으로, 망명지 상하이에서 덴노를 위해 일하고 있는 김상설(金相卨)에게 100엔의 활동비를 지급하라고 전달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9월 6일, 다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역상 시부카와 쿠모다케(渋川雲岳)가 찾아왔다. 그는 형사 처벌을 피해 상하이로 도망와있던 김상설이 배일거두(排日巨頭) 김규흥을 유치하여 자신의 구죄(舊罪)를 탕감 받으려는 요량으로 자신과 함께 큐슈로 와서 숨어있다고 전했다."

이로 볼 때 5월 중순경 세이후로부터 활동비를 전달받은 김상설은 김규흥과 접촉한 뒤 그와 함께 8월 말에 상하이를 떠났고, 중간에 규슈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후 두 사람은 동행인 일본인 브로커 시부카와(渋川)를 다로에게 먼저 보내 최종 의견을 타진한 뒤, 9월 말이나 10월 초 경성에 도착하여 10월 2일 다로와 대면했다.
김상설은 대한제국의 군관으로, 일찍이 1895년 도쿄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유학하였고, 1899년에는 일본육사에 입학하여 견습생이 되었으며, 1902년 이후 귀국하여 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경무청에서 근무하다가 1910년부터는 중국으로 가 일본어교사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그가 김규흥에 대한 유치에 노력한 것은 당시 개인적인 범죄로 인해 수배를 받아 상하이로 피신했다가 다로와의 교섭으로 범죄 혐의를 무마받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다만 김상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김상설은 김규흥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서 다로와 대면한 뒤 수배 해제 조치를 받았고, 이어 총독부의 촉탁으로 임명되어 국내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1919년 10월 2일 처음으로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를 만난 김규흥은 이후 다섯 차례(10월 2일, 4일, 9일, 16일, 19일)에 걸쳐 그와 면담했고, 그 중간에 다로의 권유에 따라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과 면담한 뒤 10월 28일 상하이로 돌아갔다.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에 따르면, 10월 2일 다로를 처음 만난 김규흥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한다.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희망이 없는 독립운동은 더욱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이다.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면 차선을 선택하여 동포를 구해야 하는데 미국(과 같은 유럽 열강)에 의지하는 것은 일본에 의지하는 것보다 매우 나쁜 선택이다. 이점은 베트남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오늘날동아시아의 전체 형세를 위해서는 일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외부인의 원조를 받아들이라는 선동에 빠진다면 결국 그들의 꾀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요컨대 유럽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고, 그런 점에서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로는 자신의 주장을 정리한 <우언(危言)>의 요지를 거론하며 일본, 조선, 중국 사이의 협력과 제휴의 필요성을 분리와 연합, 강국과 약국의 원리를 들어 설명한 다음, 일차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지사들이 마음을 합하여 동양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 손병희이승만이든 기회가 되는 대로 만나 마음을 열고 의논할 뜻이 있다고 덧붙였다.
10월 4일 두번째 면담에서, 다로는 김규흥으로부터 망명 이후 10여년 만에 고향의 노모를 뵙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노모를 찾아갈 때 쓰도록 100엔을 주었다. 이어 10월 9일자 일기에는 고향에서 돌아온 김규흥이 김상설과 함께 다로를 방문하여 노모에게 드리라고 한 100엔의 사용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부 돈으로 선물을 사서 노모에게 드렸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드렸는데, 노모는 그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규흥은 노모가 직접 따서 말린 곶감과 대추를 가지고 와서 다로에게 사의를 표했다. 이에 다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동아를 위해 함께 일하자는 나의 격려에 대하여 결심하는 얼굴빛으로 실행을 답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게 손에 들어온 기분이다."

또 김규흥이 상하이로 돌아간 다음인 1920년 2월 7일에는 김상설의 안내로 김규흥의 조카 김진홍(金鎭弘)이 다로를 찾아와 다로가 김규흥의 노모에게 보낸 “연말(歲暮)”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후 다로와 김규흥은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다로는 1919년 10월 27일자 일기에 "돈을 요구하는 김복(金復)의 편지가 왔다"고 적었고, 11월 30일에 이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고 기술했다. 또 1920년 1월 4일자 일기에서는 김규흥으로부터 온 편지의 번역문을 언급하고 있으며, 1월 31일자 일기에서는 상하이로부터 온 사쓰카와(渋川)가 김상설과 함께 방문해 왔기에 김규흥에게 전할 편지를 맡겼다고 기술되었다. 이로 볼때 두 사람은 적어도 2차례 이상 편지나 전갈을 서로 오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쓰노미야 다로 관계자료 연구회가 보관하고 있는 5천 통의 편지 중 김규흥이 다로에게 보낸 편지는 2통 확인되었다. 한 통은 1919년 11월 21일자로 다로에게 보낸 것으로, 11월 27일에 다로에게 전달되었으며, 김규흥이 직접 쓴 4페이지 분량의 한문 원문이다. 다른 한 통은 12월 20일에 보낸 편지로서 한문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19페이지 분량의 일본어 역문만 남아 있는데, 11월 30일 다로가 김상설을 시켜 김규흥에게 보내도록 한 편지에 대한 회답이다.
김규흥은 이 두 통의 편지에서 일본 중심의 동아 민족 융화를 통하여 백인의 침탈로부터 동아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또 조선인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는 등 조선인에 의한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김달하(金達河)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또한 김규흥은 다로와 면담하고 상하이로 귀환한 후 자치 주장을 가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 이동휘, 이시영의 동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임시정부 요인들을 대상으로 회유공작을 벌이고 있음을 편지를 통해 다로에게 전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김규흥의 말대로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김규흥의 회유 공작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한 규명이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분명한 관련 증거자료를 찾을 수 없다. 다만 1922년 10월 12일 <독립신문>에 “김복(金復)이라는 자가 적 총독부(敵總督府)의 앞잡이(倀鬼輩)의 괴수가 되어 북경에 거점을 정하고 북경, 천진, 상해, 홍콩, 광동 등지에 산재한 동류배를 지휘한다고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에 대해 김규흥의 조카 김자중(金自重)과 다른 측근 인물들이 사실무근이라는 해명을 해왔다는 기사가 1922년 10월 30일자 <독립신문>에 뒤이어 실린 점으로 본다면, 김규흥 측에서도 상당한 신경을 쓸 정도로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는 김규흥이 다로를 만나고 상하이로 돌아온 지 2년 뒤에 실렸다. 김규흥이 다로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여 일본 중심의 민족융화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했고 이에 대한 한인사회 내의 논란이 있었다면, 그것이 2년 뒤에야 보도되었다는 점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다. 다만 김달하의 친일에 대한 혐의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것이 1922년 무렵부터라고 본다면 김달하와 관련해서 그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김규흥에 대한 논란이 함께 제기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편으로 두 통의 편지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공작 자금 요청과 관련된 내용이다. 첫 번째 편지에서, 김규흥은 상해지역 단원 200여명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가 60여명이고 그 가운데 최근 20여명이 귀국하게 되어 나머지 40여명을 대상으로 회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경비가 20-30만원이라고 말하였다. 김규흥은 이 가운데 당장 필요한 액수가 북경지역 3만원, 상해지역 2만원 정도로 즉시 지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두 번째 편지에서, 김규흥은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김달하에 대한 지원을 즉각 추진하여 “큰일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각 단체의 해산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배외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조선과 내지로 불러들여 적당한 지위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다음 북경, 상해, 노령 등에 선전기관을 설치하여 인심을 안무하면서 그 후에 만주은행을 만들어 유랑한인들을 모아 농업 개간, 목축 등에 종사하게 한다면 배외한인에 대한 근본적인 감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은행 설립을 위한 자금 요청에 대해 다로는 매우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의 일기에는 앞서 김규흥과 처음 만난 뒤 김상설로부터 김규흥이 은행을 설립할 뜻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밤늦게 총독관저를 방문하여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논의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와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김규흥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조선에 대한 자치권 부여 정도를 요구하기로 했고, 이런 자치권 확보 주장을 가지고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비롯한 상해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는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며, 또 그런 활동을 위하여 조선군사령부 측의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김규흥이 변절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3.2. 정말로 변절했는가?


그러나 김규흥이 실제로 보인 행적을 보면 그가 정말 변절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우선 그는 1919년 11월 15일 흥국실업은행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했고, 흥국실업은행이 개설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 되자 1922년 5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흥화실업은행은 필요한 자금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조기에 폐쇄되고 말았다. 폐업 이후 2년 정도 뒤인 1925년 3월에 조선총독부 정보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흥화실업은행은 10만 엔의 출자금을 모으려고 계획했으나 실제로 모인 자금이 1만 엔에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규흥이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 것은 당시 박용만이 추진하던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을 후원하기 위함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이 은행을 설립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둔전병 제도 실시를 위한 농장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일제 비밀정보기록에는 그가 박용만이 주도하는 군사통일회에 간사를 역임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등, 그와 박용만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규흥은 상하이로 돌아온 지 5개월 후인 1920년 3월 장저우 회의(漳州會議)에 참여한 여운형의 요청에 따라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중국 측 대표인 첸정밍(陳炯明)과 오랜 인연이 있는 점을 활용하여 러시아와 중국 측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데에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서 안창호에게 시베리아에서 한인들로 구성된 6개 사단을 양성한 뒤 베이징의 군벌을 타도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결전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그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둔전병 양성 계획의 실현을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 아래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김규흥이 정말로 독립운동의 뜻을 저버리고 부일 활동으로 전향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후에 김규흥의 요청대로 자금(회유공작비와 은행 설립 자금)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첫 번째 편지에서 김규흥은 극렬분자를 회유하지 못하면 제2, 제3의 임시정부가 생기게 될 것이고, 국외에 임시정부가 있는 한 일본과 한국(內鮮) 간에 안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들을 회유하는 데에 20-30만원이 필요한데 당장 급한 대로 상해 2만원, 북경 3만원이 필요하니 이번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이 편지를 받는 대로 전신환으로 부쳐줄 것을 반복해서 부탁했다.
또 두 번째 편지에서 김규흥은 김달하에게 지급토록 부탁한 3만원과 자신에게 지급토록 부탁한 2만원이 모두 지급되지 못하여 자신이 독립지사들 사이에서 신용을 잃어버려 곤란한 지경에 있다고 하면서, 가부 간의 명확한 대답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 총독부에서 상해에 파견한 정보원으로 보이는 오다 린(尾田倫)의 상해 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자신에 대한 조사를 언급하면서, 조사만 하느라 공작금 지급이 늦어지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다로로부터 자금을 얻어내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 측의 부정적인 판단으로 자금 지급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11월 27일, 다로는 김상설을 통하여 총독부의 ‘재미없는 처사’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이후 그는 김규흥의 자금 지원 요구를 보류하고 김상설로 하여금 상해에 가보도록 권했다. 이는 아마도 실상을 확인하거나 김규흥과 협상해보려는 것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12월 중순 다로가 도쿄의 육군대신에게 “재외한인에 대한 회유 공작 자금을 총독에게 급히 보내줄 필요가 있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육군성 차관은 12월 24일 다로에게 전보를 보내 “총독에게 필요한 자금은 정무총감이 알고 있으므로 육군성 쪽에서는 송금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이는 사실상 거부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두 번째 편지가 온 1919년 12월 말 이후 다로는 김상설을 통하여 김규흥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보이지만, 1920년 2월 이후에 가서는 양자 사이에 왕래 자체가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 가운데 김규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김상설과의 면담 기록 가운데에 서도 김규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규흥과 다로 간의 왕래가 단절된 배경에는, 같은 시기 다로가 위암에 걸려 1920년 7월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본국으로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다로와 김규흥과의 ‘거래’는 유야무야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일기와 2차례 편지에서 언급되고 있는 김규흥의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회유 공작의 실제 정황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김규흥이 회유에 성공했다고 언급한 이동휘나 이시영 쪽에서 김규흥으로부터 회유 공작을 받았다거나 그로 인하여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김규흥을 친일분자로 비판한 자료 또한 현재로서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1920년 7월 초 김규흥을 면담한 안창호는, 당일의 일기에서 박은식과 함께 김규흥을 초대하여 오찬을 함께 했는데, 이때 김규흥이 자신과 내왕이 있는 철혈단 멤버 김덕(金德)이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자신에게 알려주었다고 적었다. 그 직전에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역시 이와 비슷한 정보를 안창호에게 전달한 걸 보면, 그는 임시정부를 파괴하긴 커녕 오히려 도와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22년 10월 22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김규흥이 변절했음을 암시하는 기사가 올라오긴 했지만, 독립신문은 곧바로 김규흥의 측근들의 정정 요청을 받고 “애매”하다는 정정 보도를 냈다. 또한 1922년 당시 김규흥은 흥화실업은행 창설과 운영에 동부서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그가 정말로 독립의 뜻을 저버리고 일제에 빌붙으려 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진다.
어쩌면 그가 다로와 면담하여 그를 기쁘게 할 입장을 밝히고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겠다고 제의를 한 것은, 다로를 속여서 독립운동가 회유 목적으로 거액의 돈을 받아낸 뒤 그 돈을 독립군 기지 건설 및 둔전병 양성으로 빼돌리려 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경우 조선주둔군 측 혹은 총독부 측에서 정보기구나 정보원들을 동원하여 ‘친일 제안’을 지키지 않은 김규흥에게 보복을 가할 위험이 도사렸을 것이다. 물론 김규흥이 정말로 그런 의도를 품고 다로에게 접근한 것이었는지는 현재까지 불명확하다.

3.3. 김규흥 변절 논란 진행 상황


2016년 10월 15일 옥천에서 열린 〈제1회 김규흥기념학술대회〉에서 충북대 박걸순 교수가 “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란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박 교수는 우쓰노미야 타로 일기를 소개하며, 일기에 등장하는 김복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독립운동가로서 김규흥을 전면 재평가해야한다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박걸순 교수는 2017년 8월16일 옥천신문과 인터뷰를 한다. 옥천신문은 “김규흥 관련 자료 참담하고, 충격적이었다”라고 헤드라인으로 인터뷰를 실었다. 박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2016년 학술대회 발표 내용보다 더 구체적으로 김복의 일제밀정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김규흥 밀정설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토론회 혹은 세미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옥천향토사연구회 주관, 옥천군·옥천문화원 주최 〈제2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가 2017년 11월 16일 개최됐다. 주 발표자로 박걸순 교수와 김규흥 관련 최초의 서적인 『범재 김규흥과 3·1운동』의 공동저자이며 『김규흥 평전』을 집필하고 있던 김상구, 두 사람의 참석을 추진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세미나 참여를 거부했고, 참관을 하지 않았다.
세미나 종료 후 옥천신문은 “조선군사령관 일기만 갖고 ‘밀정’ 확정 안돼” “김규흥 밀정? 확실한 밀정 흔적, 어디에도 없다” 등의 기사를 통해 김규흥 밀정설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2018년 12월 21일 개최된 〈제3회 김규흥 선생의 대한독립운동 학술세미나〉에서도 김복 밀정설이 언급되었지만, 옥천신문은 “김규흥 밀정 논란, 선생이 조선총독부 요구 응했다는 근거 없어”라는 기사로 세미나의 결론을 보도했다
이후 잠잠해진 김규흥 변절설은 2019년 8월 20일 KBS가 '시사기획 창'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밀정 2부작 중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를 방송하면서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이 방송에서는 김규흥이 밀정으로서 친일 행각을 했다고 하면서, '우쓰노미야 다로 일기'와 편지 2통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김규흥 기념사업회는 <김규흥 밀정설 보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자유게시판에 게재했다.# 김규흥 기념사업회는 김규흥이 밀정 노릇을 했다는 방송을 정면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사과방송을 원합니다.

둘째, 이미 방영된 2편의 방송, 계속보기 차단을 원합니다.

셋째, 이미 방영된 2편의 방송 중 최소한 김복 관련 부분의 삭제를 원합니다.

넷째, 우리가 제기한 문제점에 대하여 의혹을 풀어주지 않을 경우, 귀사 및 관련자를 형법 제308조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고발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이렇듯 김규흥이 일제를 위해 밀정 노릇을 했는지의 여부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으나, 현재까지 이렇다할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3.4. KBS의 2019년 8월 20일 방송 '시사기획 창'의 신뢰성


사실 학계의 주장과 무관한 방송이다. KBS측은 방송의 정체가 사실 "학계의 연구와 토론이 좀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학계의 토론과는 별개로 '대중적 관점'에서 분명한 사실"이 존재하며 "​역사학계의 진지한 토론과 국가보훈처의 면밀한 서훈 심사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와 별도로 언론의 문제 제기"라고 밝히며 문제제기일 뿐이라며 정당화했다.[3]
[1] 이씨의 신하를 자처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는 행위[2] 중국동맹회 출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재석 이세중 강민아, 2020,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198~199쪽. 이들은 KBS 취재진 당사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