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당
[clearfix]
1. 1948년에 창당된 정당
[clearfix]
1948년 11월 13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심으로 신익희, 윤치영 등에 의해 창당된 보수주의 성향의 정당.
광복 이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우익진영은 재정렬이 이뤄졌는데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놓고서 협력을 중도하는 중도파 진영 및 김구의 한국독립당 진영과 결별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총리지명, 농지개혁 문제 등을 계기로 협력관계였던 한국민주당과 완전히 결별했다.[1]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한민당 및 소장파 무소속 진영에 맞서 자신을 지지해 줄 여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내에서 독촉을 정당으로 전환시키려는 독촉 내 중견 간부들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창당 작업을 진행시켰고, 독촉은 정당 조직에 관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신당 조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촉을 중심으로 결성되는 신당 결성에 관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 결성에 대해 미온적인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자신을 옹호할 신당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국적인 규모와 조직을 가지고 있는 독촉을 그대로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태도는 이후 독촉의 정당 결성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결국 독촉은 정당 결성에 관한 태도에 따라 정당추진파, 순수독촉파 또는 정치위원회, 목요회, 그리고 독촉존속파 등으로 분열되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독촉 내 중견이라 할 수 있는 신익희 등이 이승만과의 합의에 의해 정당 결성 추진 운동에 참여하자 정당으로의 전환 운동은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48년 10월 목요회를 중심으로 대한국민당 발기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신익희, 배은희, 강기덕, 박승호 등 85명이 발기위원으로 선정되어 준비부서를 결정하였다. 이에 독촉은 다시 대한국민당 참여파와 비참여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비참여파들은 종전대로 독촉의 민족진영 중앙기구체로의 지향을 주장하였고,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정당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다. 독촉의 정치위원회는 독촉과 국민당은 별개의 단체이며 독촉은 기존과 같이 국민운동단체로 존속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런 발표는 독촉의 정당으로의 전환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1948년 11월 13일 신익희, 윤치영 등에 의해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이어 임영신 등의 여자국민당, 지청천의 대동청년단을 흡수했다. 그러나 최고위원 중 한사람인 신익희가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결성에 참여하게 되면서 대한국민당은 명목만 남게 된다. 이승만은 정당운동 초기에는 신익희, 이활, 배은희 등을 통해 여당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신익희와 지청천이 한민당과 합세하여 독촉을 떠나자 태도를 180도로 바꾸어 정당 자체를 파당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정당과는 무관한 초국민적 지도자로 규정하고자 했다.[2][3]
2. 1949년에 재창당된 보수정당
[clearfix]
1949년 11월 당시 대한민국 국회 원내에서 다수를 차지한 민주국민당이 반 이승만운동을 전개하고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제로 바꾸기 위한 개헌안을 제출,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에 11월 12일 명목만 남아있던 대한국민당을 중심으로 신정회(新政會),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등의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하였다. 재창당한 대한국민당은 71석을 확보함으로써 국회 내의 제1당이 되었다. 당시 조직은 최고위원 윤치영(尹致暎)·이인(李仁), 고문 이규갑(李奎甲)·이범승(李範昇)·임영신(任永信), 총무부장 신상학(辛相學), 조직부장 김훈(金薰), 훈련부장 권박영(權博英), 기획부장 정영삼(鄭永參), 선전부장 최운교(崔雲敎), 재정부장 이우세(李友世), 조사부장 양철호(梁鐵鎬), 노동부장 유홍렬(柳鴻烈), 청년부장 남윤상(南潤商) 등이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4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소속 의원들이 이후 자유당 등으로 이탈하여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겨우 3석을 얻었으며 자유당의 존재에 따라 처음의 친여 성향과 달리 점차 친야 성향으로 변하였다. 이후 명목만 남아있다가 1958년 7월 해산하였다. 이후 전진한이 창당한 노농당 등으로 이적한다.
2.1. 역사
2.2. 역대 선거결과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24/210 9.7%
- 1951년 제2대 부통령 선거 이갑성 73/151 낙선
- 1952년 지방선거
- 시의원 2/378
- 읍의원 0/1,115
- 면의원 16/16,051
- 도의원 0/306
-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무공천
- 부통령 무공천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2/203 1.0%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무공천
- 부통령 윤치영 2.8%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