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

 

[image]
대표적인 우키요에 중 하나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바다의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
1. 개요
2. 주요 작품
3. 평가와 영향
4. 일본 국외에의 영향


1. 개요


浮世絵
에도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유행한 판화. 초기엔 육필화에서 시작됐으나 다색 판화 기법인 니시키에참고가 출현한 뒤로는 거의 판화 기법으로 제작됐다.
상업자본의 발달에 따라 늘어난 대도시의 대중을 상대로 출현한 예술작품이다. 다루는 소재도 당대의 가부키 배우나 유곽의 유녀, 스모선수를 비롯한 인물들과 도카이도나 후지산 같은 유명한 풍경 등 대중에게 쉽게 수용되는 소재를 주로 다루었다. 21세기 시점에서 보면 인기 연예인들이나 걸그룹들의 화보나 직캠과 비슷한 성격의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가장 잘 팔린 장르는 춘화였다. 요즘으로 치면 AV포르노 사진. 가격은 한 장당 당시 소바 한 그릇 가격으로 현재 400엔이나 500엔 정도였다. 이런지라 당시에는 별 가치도 없어서 현대에 잡지를 뜯어 완충제로 집어넣거나 둘둘 싸듯 우키요에를 포장지로 널리 써 먹었다. 물론 귀한 재료들이나 종이로 찍어낸 우키요에나 육필화로 그린 우키요에는 귀하게 다뤄졌으며 정부는 종종 이런 사치스러운 우키요에를 찍어내는 업체들을 감시하는 한편[1] 어느정도 타협해 눈감고 봐주기도 했다.
다색 판화로 용이하게 찍어내기 위해서 색이 강렬하고 평면으로 되어 있는 구성이 높이 평가받아 19세기 후반에 유럽의 일본풍 유행을 이끌었다. 우키요에 화첩이 도자기 등 상품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된 것이 도자기 수출로 유럽쪽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큰 인상을 받은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에 크게 영향받은 것. 자포네스크의 원조격 되시겠다. 다만 얼굴을 너무 이상하게 그려서 인기가 없었다는 이유로[2] 다수가 포장지로 쓰여져 유럽에 다수 넘어가게 되어 강렬한 인상을 유럽인들에게 끼쳐 본의 아니게 일본 회화의 대표격으로 유명하게 된 도슈사이 샤라쿠 인물화의 표정이 지금으로 볼때는 꽤 얼굴개그스러운지라[3] 일본 문화 지식이 없거나 매우 얕은 외국 사람들은 이 샤라쿠의 우키요에의 이미지가 매우 강해서 대부분 일본 전통화 = 우키요에로 잘못 받아들이기 쉬운 편.
우키요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동해서 만들었는데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에시', 밑그림을 목판에 붙여 칼로 파내던 사람을 '호리시', 파낸 목판에 물감을 묻혀 찍어내던 사람을 '스리시'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감독및 총책임을 지던 사람을 '한모토'라고 불렀다. 한모토로 가장 유명했던 이가 바로 츠타야 주자부로(蔦屋重三郎)로 도슈라이 샤라쿠와 기타가와 우타마로를 발굴해낸 장본인이다.[4]
유명한 화가로는 뒤돌아보는 미인으로 유명한 히사카와 모로노부, 우키요에 화가들중 유일하게 육필화로 그려왔다는 가이게쓰도 안도[5], '후카쿠 36경'[6], 제국폭포순례를 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 니시키에의 시초이자 메이와의 3미인을 탄생시킨[7]스즈키 하루노부, 10개월가량만 활동했다가 사라져 한때 김홍도가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다는 설이 나돌았던 도슈사이 샤라쿠, 인물화로 유명한 기타가와 우타마로, 풍경화로 유명한 안도 히로시게 등이 있다.

2. 주요 작품


[image]
도슈사이 샤라쿠의 3대 오타니 오니지

이 작품은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의 1992년도종이 노선도 표지에 수록되어있다. 인물의 손에는 영단 지하철 9000계 전동차[8]의 시제차량 선두차를 들고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매우 부자연스럽다 못해 살짝 해괴하게 보이기도 한다. 2018년에는 피그마로 입체화되기도 하였다.
[image]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미인도.[9]
[image]
안도 히로시게 / 우타카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역참 중 16경 '간바라[蒲原]' (현재의 시즈오카현 중부 간바라쵸)
이곳은 원래 눈이 안내리는 지역이다.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 / 우타카와 히로시게[歌川 広重](1797~1858)는 이전 그림까지는 직접 본 풍경을 그렸는데, 인기를 끌자 연작 시리즈에서 의도적으로 그림을 사주는 사람들이 싫증나지 않도록 설경을 상상으로 그렸다고는 하나, 그린 연대와 작가의 활동시기와 겹쳐, 소빙하기(1340~1850)의 증거로 거론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1810~1830년대, 인도네시아탐보라 화산이 폭발하여 1816~1817년, 북반구에 봄, 여름이 없던 시기가 있었다.

3. 평가와 영향


[image]
[image]
안도 히로시게의 원작과 오른쪽은 고흐의 모사
메이지 시대 이후 우키요에는 해외에서 높게 평가된 다량의 작품들이 일본 국외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회화 작품으로써 우키요에 연구에 있어서는 정당하고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개별 수집가와 연구자에 의해 연구 결과 다른 주장이 부분적 · 간헐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또한 기타가와 우타마로 등의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작품의 가짜가 에도 시대 당시부터 유통되고 있다.
우키요에는 구미권 인상파의 거장들에게 발견되어 그 작품에 영향을주고, 고흐 등으로 유화에 의한 모사도 되어있다. 구미의 유명한 박물관 20관 이상에 20만 점 이상을 소장한 듯하다. 그 이외에는 개인 컬렉션으로도 외국 미술품이 이만큼 수집되는 것은 우키요에뿐이다. 보스턴 미술관에는 5만 점, 푸쉬킨 박물관에는 3만 점 등 1만 점 이상 소장한 곳도 적지 않다.
화려한 종이 회화, 정밀한 조각이 이루어진 판화군은 세계에서 우키요에 뿐이며, 서양 미술에도 이 분야는 없는 것이 높은 평가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시대의 문헌에 따르면, 무명 화가 를 포함하면 2천 명에 가까운 화가가 그 당시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판화의 경우 한 작품에 100에서 200개는 찍을 수 있었고 많은 우키요에가 시중에 나돌고 있었지만, 현재는 오래된 우키요에는 동일한 작품이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대량의 유실로 남아 있는 작품 중에는 우타마로를 비롯한 비교적 간결한 구도가 많은 반면 복잡한 구도의 채색 우키요에는 적다. 많은 수집과 높은 평가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막부 말기 메이지 시절의 수집 방침 및 평가가 현재까지 영향을주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는 일본 국외 유출분의 몇 배 이상은 남아 옛집의 창고나 장롱 속에서 나오는 것도 있고, 총 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라 추정되고 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예술작품들이므로 서양의 평가에만 얽매이지 않는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일본 국외에의 영향


1865년, 프랑스 화가가 일본에서 수입한 도자기의 포장지에 사용되고 있던 「호쿠사이 만화」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다녔던 것으로 미술가 사이에서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서민의 오락이며, 싼값에 거래되고 있던 우키요에는 유럽에서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고가로 거래되었다. 그 후 다양한 작품이 정식으로 일본에서 건너가게 되어, 인상파의 작풍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고흐가 '탕기 할아버지'라는 작품의 배경으로 우키요에를 그리거나 히로시게의 그림을 유화로 모사하고,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그 외에 에드가 드가, 메리 카사트, 피에르 보나르, 에드와르 부에야루,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고갱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자포니즘의 영향과 일본 미술을 취급하던 빙에 의해 아르누보에게서 우키요처럼 평면적인 디자인이 보인다.
클로드 드뷔시가 호쿠사이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 를 작곡하는 등 (1905 년 에 간행 된 점수의 표지가 있거나 서재에 장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은 클래식 음악까지 이르렀다.

[1] 예시로 기타가와 우타마로는 50일동안 수갑을 차고 생활했고 츠타야 주자부로는 전재산의 절반을 빼앗기기도 했다.[2] 이는 샤라쿠 뿐만 아니라 우키요에 소비 시장의 특징이기도 했다. 우키요에는 상업미술, 즉 대중문화의 유행을 그려내는 판화였기 때문에 유행과 시간이 도태되기 일쑤였고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그 화가들 또한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우키요에의 그림들 대부분이 작가미상이거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있다.[3] 당대 일본 인물화가 이런 기괴한 풍은 아니였고, 최대한 정적으로 그린 그림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가부키 배우들이 자신을 그린 샤라쿠의 그림이 너무 기괴하다며 대놓고 불쾌해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샤라쿠의 인물화는 당대에 아주 박한 평가를 받았고, 그런 평가로 그림이 안팔리자 버티질 못하고 그림 그리는 걸 포기하고 잠적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걸 보면 이 사람만 시대에 맞지 않게 독특한 것 뿐인데 어쩌다보니 대표 아이콘이 되어버린 기괴한 케이스이다.[4] 현재 일본 최대 서점이자 DVD 대여업체로 유명한 TSUTAYA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5] 생몰년도 불명. 성은 오카자와(岡澤) 또는 오카사키(岡崎)이고 데와야 겐시치(出羽屋源七)라고 불리웠다. 호는 간운시(翰運子). 에도시대에 안도는「야스노리」「야스노부」라고 불린 것으로 보인다.우키요에 공방을 주재하며 밝은 색채에 호화로운 복장을 특징으로 한 육필 미인도를 대량으로 제작해 18세기초 유행시켰다. 1714년 에시마(繪島) 사건에 연루돼 섬으로 유배됐으며 이후 풀려나 에도로 돌아왔다.[6] 36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46점이었다고 한다.[7] 메이와 시대에 3명의 미인이라고 해서 야나카에에 있던 신사 가시모리이나리에서 일하던 오센,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아사쿠사간논 경내에 있던 화장품 가게인 야나가야에서 일하던 오후지, 같은 아사쿠사 간논 경내의 찻집 츠타야에서 일하던 오요시를 이르는 말. 오요시를 빼고 가부키에서 여자 역을 맡던 남자배우, 즉 온나가타인 세카와 기쿠노조를 넣기도 한다. 이들 세명은 각각 가게의 이름을 따 '가시모리 오센', '야나가야 오후지', '츠타야 오요시'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중에서 오센의 인기가 무척 높아 그녀를 모티브로 한 가부키, 교켄이 만들어졌고 가시모리이나리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늘었을 뿐 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이 담긴 수건이나 쌍륙 등 오늘날로 따지면 그녀의 모습이 담긴 굿즈 등도 팔렸다고. 하지만 인기 절정이던 메이와 7년에 돌연 그녀가 사라지고 그녀를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자 그녀가 주전자로 둔갑해버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 사실은 막부 하타모토 고쇼인 카사모리 이나리(笠森 稲)의 지주이기도 한 쿠라치 마사노스케(倉地政之助)의 슬하에 시집갔기 때문. 9명의 자식을 낳아 장수했다고 한다. 분세이 10년 1월 29일 향년 77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그녀의 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8]도쿄메트로 9000계 전동차[9] 그림속의 여자는 당시 미인으로 유명했던 나니와야라는 찻집에서 일하던 오키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