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image][1]
'''김홍도
金弘道 '''
'''출생'''
1745년
'''사망'''
1806년
'''국적'''
조선 [image]
'''본관'''
김해(金海)
'''자/호'''
사능(士能)/단원(檀園)[2]
'''직업'''
화가
1. 개요
2. 상세
3. 논란
3.1. 도슈사이 샤라쿠?
3.2. 그림에서 보여지는 오류들
4. 창작물에서
5. 기타
6. 관련 항목

'''북한에 전해지고 있는 초상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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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 조선 후기의 화가. 전근대와 현대, 서양동양을 불문하고 한국의 화가 중 현대에 가장 인지도가 높은 화가 중 1명이다. 민중의 삶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식의 그림들을 소화하였다.

2. 상세


강세황천거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 왕세손초상화를 그리면서부터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1781년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 어진화사로 임명되어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9년에는 스승김응환과 함께 일본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떠났는데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혼자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지도는 국가 기밀이었기에 그 정도 임무를 맡을 정도로 정조가 믿고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4]로 지정한 수원 화산[5] 용주사대웅전에 화승들의 불화 작업을 감독했다. <삼세여래후불탱화>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걸작으로 손꼽히는데 과감하게 서양 화법을 도입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들로 1795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사임했다. 1796년 다시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고 1797년 국가에서 발간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 학습 관련 책이나 위인전에서는 김홍도가 1760년생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생몰연도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르다. 그나마 요즘은 1745년생으로 거의 일치화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삼성전자에서 나눠주던 한국화 관련 달력에 나온 김홍도의 그림 설명에서는 1745년에 태어나 1818년에 사망했다는 표기를 한 바 있다. 기록으로는 1805년에 병이 위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때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체적으로 1810년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4학년 미술책에는 1745~1801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김홍도는 영조, 정조 시대에 활동하며 조선의 화풍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청나라를 통해 익힌 것으로 보이는 서양 화법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드러낸 훈염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민중들의 삶을 그려낸 풍속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서당>, <씨름> 등이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 빨래하는 아낙 등을 그렸다. 이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정조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2013년 김홍도의 작품집으로 알려진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은 사실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학계에 나와서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만약 주장이 사실이라면 교과서부터 해서 모든 것을 갈아엎을만한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6]
신윤복과 마찬가지로 춘화도 꽤나 그린 편인데 운우도첩의 경우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춘화도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등 춘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신윤복과 함께 풍속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박 겉핥기식인 평가이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미술, 국사 시간에 스쳐지나가듯 배우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정말로 풍속화만 남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작품은 전무한 반면에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엄청나게 많다.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은 당대부터 엄청난 네임밸류를 쌓아왔다는 증거다.[7]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8], 산수화[9], 인물화[10], 영모화[11]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다.

3. 논란



3.1. 도슈사이 샤라쿠?


그의 일생에 대해 알려진 부분보단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탓에 여러가지 이야기나 루머들이 돌곤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김홍도가 바로 1794년 5월 일본에 갑자기 나타나서 10개월 동안 200여 점의 그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천재 우키요에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였다는 이영희 작가[12]의 주장이다.
이영희 작가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김홍도가 일본 쓰시마 섬에 지도를 그리러 간 시기와 샤라쿠가 나타난 시기가 겹치고, 화풍에 있어서 필체나 여타 등이 유사하며 김홍도나 샤라쿠가 발가락이 6개였으며, 때문에 그들이 그린 그림 중 발가락이 6개인 그림이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홍도가 일본 쓰시마 섬에 지도를 그리러 갔다는 시기는 '''1789년'''이고,# 샤라쿠는 '''1794년 5월'''에 나타나 '''10개월'''간 활동한 화가다. 시기가 안 맞는다.
지도가 그렇게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니므로, 몇년 동안 쓰시마에서 지도 제작을 병행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김홍도는 '''1791년 12월 22일'''부터 '''1795년 1월 7일'''까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했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실록>에는 '''1795년 1월 7일''' 호서 위유사 홍대협#이 연풍 현감 김홍도가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죄를 줘야 된다고 청하는 기록이 나온다.# 샤라쿠의 활동 시기에 김홍도가 조선에 있었다는 '''국가 공식 기록'''이 남은 셈.[13]
덧붙여서 일본에서 진짜 샤라쿠라는 주장이 있는 사람은 '''수십명'''에 이른다.[14] 다만, 일본에서 샤라쿠의 정체에 대한 주장을 정리할 때는 김홍도도 그중 한 명으로 인정하는 모양인데, 이는 '김홍도 = 샤라쿠 설'의 주장자인 이영희 작가가 관련 내용을 일본에서 책으로 출판[15]한 영향이 크다.
덧붙여서 에도 시대에는 기리시탄 탄압을 목적으로 시행된 이웃과 외지인에 대한 감시 정책#이 존재했었다.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바람처럼 나타나 여러가지 일을 벌이고 바람처럼 사라지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3.2. 그림에서 보여지는 오류들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로, 손발의 위치가 어긋나 있거나, 신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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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 예로 김홍도의 대표적인 그림인 "씨름"에서 바닥에 앉아있는 인물의 손이 좌우가 바뀌어 있는걸 볼 수 있다.
이에 혹자는 김홍도가 선천적인 장애[16]를 갖고 있어 그런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며[17], 혹자는 일종의 틀린그림 찾기 놀이의 형태라거나, 혹은 자신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자들과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써 일부로 그렇게 그렸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

4. 창작물에서


  • 영화 미인도에서도 남장 여자 신윤복의 선배로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완전히 찌질이 로리콘으로 나왔다. 김영호가 분했다.
  • 만화 야뇌 백동수에서 등장하며 화가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경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동수의 몸 동작을 보고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 백동수와 우연히 만나서 자신과 아는 사이인 정휘량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정휘량이 동수를 죽이려고 하자 함께 탈출한다.
  • 이산에서 도화사가 주요 배경 중 하나인 만큼 김홍도를 등장시키는 구상도 있었지만 정조의 일대기를 다루는 자칫 드라마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판단으로 백지화 되었다. #

5. 기타


  • 조선의 삼원이라 불리는 명화가 중 필두이다. 삼원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한다. 조선 이전의 실존하는 그림 이라든지, 화가의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전통 화단의 위대한 화가[18]는 대개 조선의 이 세명의 화가를 뽑는 경우가 많다. 단연,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홍도.
  • 시대를 앞서간 지름신 신도였다.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 밥 몇 끼 정도는 굶어주는 저 기상을 보라[19](...). 거기에다가 3000냥이라는 거액을 사례비로 받고[20] 매화를 사는데, 2000냥을 썼다는 일화를 볼 때 가장으로써 능력 자체는 그리 좋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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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상청앵도
    단원도 중 금을 타는 인물
    포의풍류도
    실제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여러 사진(마상청앵도, 포의풍류도, 낙관만 찍힌 사진 등등)을 보면 저 표준 영정과 달리 수염이 적고 갸름한 얼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홍도가 자신을 그린 것이 확실한 것이 단원도인데, 문제는 단원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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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그림이기 때문에, 인물 묘사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거다. 좌측의 김홍도와 중앙의 정난, 최우측의 강희언[21]을 그린 것을 보면 생각보다 이미지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쪽도 표준 영정의 기본이 되기는 좀 어렵다.
  • 흔히 김홍도와 신윤복을 많이 비교하는데, 두 화가 모두, 풍속화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역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서민상은 김홍도, 정적이고 서정, 도회, 귀족 사회가 그려졌다면 신윤복으로 나누기도 한다. 역동과 정적인 화풍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사용되곤 한다.[22]
  • 김홍도의 고향경기도 안산시라는 설과 서울특별시 마포구라는 설이 학자들 사이에서 양립하고 있다. # 안산시에서는 안산이 고향이라는 설을 근거로 김홍도를 빵빵하게 밀어주며 단원인 그의 아호를 따와서 서부 지역 구[23]의 이름을 단원구로 짓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근데 이 명칭은 사실 차선책이었고, 2002년 분구 당시 최초 선정된 명칭은 인근 유적지인 별망성에서 따온 별망구였는데, 할망구가 연상되는 안드로메다급 네이밍 센스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 욕만 있는 대로 먹었고, 그 때문에 안산시에서 차선책으로 내놓은 명칭이 단원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와과는 별개로, 안산 내 지역 중 김홍도와 확실히 관련 있는 곳은 단원구 지역보다는 안산 성포리 갯마을(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노적봉 공원 일대)이다. 특히 김홍도가 처음 사용한 아호가 '서호(西湖)'인데 이는 당시 성포리 앞 바다 이름과 유관하다.[24] '단원'이란 아호 역시 성포리 뒷산 노적봉 기슭에서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이 여주 이씨 문중 사람들과 시회를 했던 박달나무 숲인 '단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김홍도의 출생지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확실히 안산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

6. 관련 항목




[1] 이 그림은 어디까지나 상상화이다. 망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망건은 이마를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 상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를 잡아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위 그림은 고증이 잘못됐다고 볼 수 있다.[2] 안산시 단원구가 여기서 따온 것이다.[3] 이 선비가 김홍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정설.[4] 왕릉 근처에 세운 절.[5]경기도 화성시 화산동.[6] 단원 풍속도의 대중적 지명도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김홍도는 다양한 장르에서 대단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 풍속도첩에 수록된 25점의 풍속도는 김홍도 전체 작품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란의 결과가 어떻든 화가로서 김홍도의 위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는 하다.[7] 현대에 재평가된 작가가 아닌 이상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전해져 온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8]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용주사[9] 금강사군첩 (金剛四郡帖) 一[10] 강세황 초상[11] 송하맹호도 (松下猛虎圖)[12] 언론에서는 이영희를 한일 고대 사학자 혹은 한일 사학자 등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영희는 사학과 출신이 아니라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 작가기자다.#[13] 조선왕조실록 뿐 아니라 일성록에도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파직당하고 의금부로 압송될 뻔하다가 사면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 [14] 심지어 샤라쿠의 정체는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설까지 있다(...) 샤라쿠의 정체에 관한 각종 설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일본 사이트 참조[15] 책 제목은 '또 하나의 샤라쿠'.[16] 거스트만 증후군. 손가락 실인증이라 하여, 선천적으로 손발을 인지하는데에 장애를 가진다.[17] 이점을 더욱 확장하여, 위에서 언급된 일본 출신에 대한 의혹이 나오기도 한다.[18] 물론 취향과 평가의 차이는 존재하며, 네임밸류라고 보면 된다.[19] 그러나 조선 정조 시기 쌀 한 섬 값이 5냥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기준으로 보면 할 것 다해도 가족이 먹고 사는데는 별 지장 없는 돈이었다. 가족 생활비는 두고 지름신을 맞이한 것이다(...).[20] 참고로 당대 물가로는 3000냥이면 노비를 수십명 이상 부려먹고, 한양내 기와집 수십채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오기되었을 가능성을 자처하더라도 가장으로써 능력은 썩 좋지 않다는 얘기.[21] 인왕산도를 그린 인물로, 고사관수도를 그린 조선 초기의 강희안과는 다른 인물이다.[22] 풍속화에 여자가 나오면 신윤복으로 구분하기도 한다.[23] 분구 당시 국회의원 선거구 을구에 해당되었던 곳이다.[24] 당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과도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