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 스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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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볼 시대 가장 많은 승수를 기록한 투수이자 메이저리그 '''역대 좌완 최다승'''의 주인공이다. 아울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의 '''전설적인 에이스''' 계보[2] 의 시초.'''라이브볼 시대 최다승 투수'''
'''타격은 타이밍이다.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Hitting is timing. Pitching is upsetting timing.)'''
통산 성적은 21시즌 동안 363승 245패, 3.09 ERA, 5243.2이닝, 2583K, K/9 4.43, BB/9 2.46, HR/9 0.74, K/BB 1.8, 382완투 62완봉을 기록했다. 조금 이색적인 기록으론, 명전 투수 중 유일하게 '''승수와 타석에서의 통산 안타 수가 같은(...)''' 기록도 있다.
투수 중에는 나름 타격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2할에 조금 못미치는 통산 .194 타율[3] 을 기록했으며, '''37세의 나이에 타자로서 .333 타율에 .843 OPS 36안타 2홈런 15타점 bWAR 1.9를 기록'''하며 선수 시절 최고의 타격 성적을 선보였다.
선수 시절 성적
2. 선수 생활
마이너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첫 메이저리그 시즌이었던 1942년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시범경기서 당시 타자였던 피 위 리즈에게 빈볼을 던지는 것을 거부했다가 감독에게 찍히면서 마이너리그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4] 이 감독이 졸장이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훗날 뉴욕 양키스를 월드시리즈 5년 연속 우승으로 이끈 명장, 케이시 스텡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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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때문에 시즌을 날린 후에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벌지 전투를 비롯해 전선을 누비며 훈장을 받았지만, 본격적인 데뷔는 1946년에서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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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데뷔한 이후로는 무서운 질주를 이어갔다. 20대에 86승, 30대에는 202승, 40대에도 75승을 거두면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것. 원래는 빠른 공을 주무기로 하는 파워 피처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제구력과 상대의 타이밍을 뺏는 것을 주무기로 삼았다. 그가 한 투구에 관한 유명한 명언인 피칭은 타이밍을 뺏는 것이라는 말을 온 몸으로 실천한 선수.
특히 두뇌가 명석해서 당대에 야구 지능이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가 높았다. 그 때문에 타자들은 종잡을 수 없는 스판의 변화구와 타이밍 뺏기에 상대하다가 진력이 났었다고.[5] 무엇보다 내구성이 빼어났고 항상 '''20승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던 투수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내구성과 꾸준함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롱런할 수 있었다.[6]
통산 5243.2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6년 연속 20승과 통산 13번의 20승을 거두었으며 1947년부터 1963년까지 '''17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하고 '''24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3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 만 25세에 본격적인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 선수의 성적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록들이다(...). 정말 군복무만 아니었어도 400승이 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스판이 야구 자체를 좋아하면서 계약 보다는 더 많이 뛸 수 있는 것을 희망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철저한 몸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동시대 최고의 강타자인 스탠 뮤지얼은 그를 두고 "영원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없는 선수."라고 평했는데, 이는 그가 '''은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꾸준한 선수 생활과 구위를 바탕으로 그가 이룬 성적은 위에 설명한 것처럼 통산 363승 245패 평균자책 3.09 2,583탈삼진[7] 이었다.
초창기 명가였다가 흔들렸던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에게 다시금 영광을 안겨주었는데, 밀워키 브레이브스 소속이었던 1957년 마침내 오랜 암흑기를 끝내고 팀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고, 자신은 그 당시 막 제정된 사이 영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8] 그리고 이듬해에도 다시 팀을 내셔널리그 정상에 올려 놓는 등, 팀을 위해서도 많은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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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브레이브스가 암울했던 1940년대 후반, 자니 세인과 함께 원투펀치로 공헌했는데, 이 둘만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온 말이 '''스판-세인-비-비-비'''다. 1948년 보스턴포스트에 제럴드 헌(Gerald Hern)이라는 기자가 쓴 시로 유명해진 말인데, 시의 전문 및 번역은 다음과 같다.
First we'll use Spahn
첫날에는 스판을 등판시키고
then we'll use Sain
다음날엔 세인을 등판시키자.
Then an off day
다음엔 하루 쉬고
followed by rain
다음날엔 비가 온다.
Back will come Spahn
그 다음날엔 다시 스판,
followed by Sain
그 다음 세인,
And followed
we hope
by two days of rain
그 다음엔,
원하건데,
이틀간 비가 내리기를.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tarting Pitcher (13th)
4. 은퇴 이후
마지막까지도 선수 생활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만 39세 이후에 노히트 게임을 두 번 달성할 정도였지만, 결국 42세 시즌에 마지막으로 23승을 기록한 후 노쇠화가 시작되며 불펜으로 강등되더니 브레이브스를 떠나 새로 창단된 뉴욕 메츠와 뉴욕 자이언츠를 전전하다 독립리그, 심지어 멕시칸리그까지 다니면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이후 MLB 좌완 에이스의 계보는 스티브 칼튼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의 전설이었기 때문에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 21번은 당연히 영구결번. 그리고 이 당시만 해도 들어가기가 까다로웠던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도 1973년에 단 한 번에 통과했다.
은퇴 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마이너 팀, 일본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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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클라호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고향인 버펄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조성되었고,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브레이브스 구단의 현재 홈구장인 애틀랜타의 터너 필드에는 그의 동상이 조성되었다.[9]
그가 사망하기 4년 전부터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매년 가장 뛰어난 왼손 투수 한 명에게 워렌 스판 상을 수여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왼손 투수에 대한 최고의 예우인 셈.
5. 바깥고리
최훈 MLB 카툰 2007시즌 < '최고의 두뇌파 좌완 투수' 워렌 스판>
6. 관련 문서
[1] 1953년에 밀워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2]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의 역대 에이스군은 워렌 스판-필 니크로-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존 스몰츠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3] 메이저리그의 현역 에이스들 중 가장 타격에 일가견이 있다고 평가받는 잭 그레인키, 매디슨 범가너의 2016년까지의 통산 타율이 각각 .219와 .183이다. 그러나 두 투수는 내셔널리그에서 뛴 통산 시즌이 아직 10년도 안 되었다.[4] 아예 시즌을 공친건 아니고 시즌 막판에 올라와 4경기 등판했다.[5] 상대한 선수의 말에 의하면 상대할 때마다 자신의 머릿속을 난도질 하는 수준으로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6] 나중에 이 브레이브스의 커맨드피쳐 계보는 밥 먹듯이 15승을 했던 그렉 매덕스가 잇는다.[7] 언뜻 봐서는 탈삼진이 적고 볼넷이 많아보이지만, 시대 상황이 삼진보다는 맞춰잡기가 유행했던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FIP으로 보면 3.44로 준수한 편이다. [8] 이 당시에는 양 리그 통틀어서 한 명만 줬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 높다.[9] 하지만 그는 브레이브스 시절 현재의 연고지인 애틀랜타에서 선수생활을 한 일이 없다. 스판이 퇴단한 지 2년 뒤인 1966년 브레이브스가 밀워키에서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옮겼기 때문. 정작 그가 전성기를 누렸던 밀워키의 현재 연고 구단인 브루어스의 홈구장 밀러 파크에는 그의 동상이 없다. 이렇다 보니 그의 동상이 왜 애틀랜타에 설치되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밀워키 시민들도 적지 않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