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위 리즈

 

'''피 위 리즈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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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55'''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피 위 리즈'''
헌액 연도
1984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추천


<colbgcolor=#005a9c>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1'''
'''해럴드 피터 헨리 "피 위" 리즈
(Harold Peter Henry "Pee Wee" Reese)
'''
'''생년월일'''
1918년 7월 23일
'''사망'''
1999년 8월 14일 '''(향년 81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켄터키 주 에크론
'''포지션'''
유격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38년 자유계약 (PIT)
'''소속구단'''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0~1958)'''[1]
'''수상'''
'''10회 올스타 선정 (1942, 1946~1954)'''
'''월드시리즈 우승 (1955)'''
NL 도루왕 (1952)
1. 소개
2. 생애
2.1. 케이블 전기 기사, 메이저리거가 되다
2.2.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가 되다
2.3. 선수 은퇴 후
3. 연도별 성적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재키 로빈슨과의 포옹
5.1. 상세
5.2. 사실이 아니다?
6. 기타


1. 소개


피 위는 나의 어린시절 꿈이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월드시리즈에서 뛰는 것을 실현시켜주었다. 피 위가 재키 로빈슨에게 어깨동무한 순간 모든 니그로리그의 선수들은 웃으며 처음으로 백인우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내가 브루클린에 왔을때 나는 피 위에게 가서 말했다.

'''"흑인들은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재키에게 다가갔을때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 것이다. 당신의 유니폼에 있는 No, 1은 우리 마음속의 No, 1이다."'''[2]

1999년, 그의 장례식장에서 흑인 메이저리거 였던 조 블랙(Joe Black)[3]

의 헌정사.


'''"You can hate a man for many reasons. Color is not one of them."'''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피부색은 그 이유에 포함될 수는 없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前) 야구선수. 본명은 Harold Henry Reese이지만 Pee Wee Reese라는 이름으로 훨씬 유명하다.[4] 늦깎이로 야구를 시작해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린 선수이며, 훗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선수로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뤘지만 메이저리그의 흑인 차별을 철폐하는 데에 노력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2. 생애



2.1. 케이블 전기 기사, 메이저리거가 되다


1918년 미국 켄터키 주 에크론(Ekron)에서 태어났다. 그는 8살이 되던 해에 루이빌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인종차별주의가 극에 달했던 동네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인종차별이 나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인물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 그는 듀폰 메뉴얼 고등학교(duPont Manual High School)에 재학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때 비로소 야구를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내내 몸무게는 불과 54kg에 불과할 정도로 빈약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선수시절 6경기를 2루수로 출전했던 것을 제외하면 출전 기회가 거의 없었다. 1937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루이빌 전화회사(Louisville phone company)에 케이블 기사로 일을 했고 쉬는 날에는 교회팀들이 주축인 리그에서 사회인 야구를 즐겼다.
교회 리그에서 뛰던 시절, 리그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후, 마이너리그팀인 루이빌 커널스(Louisville Colonels)[5]와 맞붙었는데 이날 경기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했고 리즈의 활약을 지켜본 루이빌 커널스의 구단주인 캡 닐이 영입 제안을 해왔고 계약금 200달러에 루이빌 커널스에 입단했다.

루이빌 커널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피 위 리즈
1938년, 루이빌 커널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마이너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기 시작했던 피 위 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빌리 에반스가 당시 레드삭스의 주전 유격수였던 조 크로닌(Joe Cronin)을 위해 1939년 7월 18일, 당시 루이빌 커널스의 메이저 팀이었던 브루클린 다저스에게 35,000달러와 피 위 리즈를 포함한 4명의 선수를 보내고 투수 한명을 받아 왔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손꼽힌다.

2.2.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가 되다


[image]
1940년,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시즌 첫해 뒷꿈치 부상으로 84경기만 출장했지만 .272 5홈런 15도루를 기록하며 데뷔 첫해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이듬해인 1941년부터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200의 타율, 4경기 3실책이라는 안습한 성적으로 결국 준우승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7년, 1949년에는 각각 12홈런 104타점, 16홈런 116타점을 올리며 뜨거운 방망이를 가동하기도 했고 타율도 꾸준히 2할 6푼 이상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스탯을 보였다.
무려 '''47에러'''를 기록한 시즌도 있긴 하지만 통산 레인지팩터가 4.94에 이르는 좋은 '''유격수'''였다. 컨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통산 타율은 .269에 그치나 대신 뛰어난 선구안으로 통산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타자였다. 게다가 16시즌을 뛰면서 올스타전 명단에 10번이나 뽑힌 적이 있었으며, 그가 뛰었던 1940년~1958년까지 피 위 리즈보다 많은 안타를 기록한 타자는 단 4명뿐이었고 볼넷을 많이 얻은 타자는 3명 뿐이며 도루를 많이 한 선수는 1명뿐인 것만 보더라도 그가 당대 최고의 유격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스탯만으로 따졌을 때 통산 타율 .269에 2000안타(정확히는 2170)를 겨우 때려낸 성적만 보자면 유격수라는 점을 감안해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고, 실제로 기자단 투표로는 가지 못했다. 대신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1984년 들어갈 수 있었다. 어쨌든 명전 입성 자체가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1984년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축사를 하는 피 위 리즈
다만 클래식 스탯이 아닌 세이버 스탯으로 따질 경우에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피 위 리즈의 통산 WAR는 68.2(bWAR)[6]/61.3(fWAR)으로 야구 외적인 요소와 전혀 상관없이 성적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유격수 루 보드로의 통산 WAR 63.0이나 어니 뱅크스의 통산 WAR 67.6, 루이스 아파리시오의 통산 WAR 55.7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수치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이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피 위 리즈는 인성이나 재키 로빈슨과의 에피소드 같은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따져봐도 명전에 입성할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그의 연 평균 WAR은 4.2(bWAR)/3.8(fWAR)로, 대략 지터와 비슷한 수준이다.[7]
피 위 리즈의 WAR이 이렇게 높은 것은 16년간 유격수 외길(마지막 두 해는 3루수로도 좀 나왔지만)을 걸은데다가 선구안이 역대급으로 좋은 선수[8]였기 때문에 출루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발도 빠른 편이라 30도루로 도루왕도 먹은 적 있고 20+도루도 여러번 기록한 적 있으므로 이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아무튼 타율때문에 본인도 자기 성적이 저평가 되는게 좀 불만이었던지 "만약 다시 선수 생활을 한다면 좀 더 배트를 휘두르겠다. 내가 얻은 1200개의 볼넷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If I had my career to play over, one thing I'd do differently is swing more. Those 1,200 walks I got, nobody remembers them.)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출루율을 타율보다도 중시여기는 2010년대 이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당연히 명예의 전당 직행일 것이다.
또한 피 위 리즈는 2차대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선수로서의 전성기 3년을 그냥 보냈다.[9] 만약 이 시절에도 선수로 뛰었다면 80에 근접 혹은 넘어서는 통산 WAR에 2500+ 안타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10] 후대의 선수들과 통산성적으로 비교할 때는 이러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11]
선수시절 7번의 월드시리즈 진출로 비양키즈 소속 선수 중에서 월드시리즈를 가장 많이 경험한 선수다. 7번 모두 양키스와 붙어서 '''6번의 준우승(!!!...)'''의[12] 아픔을 겪어야 했다.

2.3. 선수 은퇴 후


[image]
코치 시절
1958년을 끝으로 선수를 은퇴한후, 1959년에 코치로 전향했다.
여담으로 1959년,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로이 캄파넬라(Roy Campanella)[13]를 위해 구단측에서 준비한 "로이 캄파넬라의 밤" 행사에서 그의 휠체어를 끌고 그라운드로 데리고 나온 이도 당시 코치였던 피 위 리즈였다. 김형준 칼럼 참조
[image]
당시 사진
[image]
당시 모습을 본따 만든 피규어
이후 방송에서 야구 해설을 중계했고, 루이빌에서 작은 야구업체를 운영했다. 그러다 전립선 암과 폐암을 앓게 되었고 1999년 8월 14일, 메이저리그와 미국에 커다란 경종을 울린 작은 영웅이 그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현재 그의 묘소는 루이빌에 있는 REST HAVEN 기념 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image]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격수 겸 주장 1940 - 1957'''
SHORTSTOP & CAPTAIN OF BROOKLYN DODGERS 1940 - 1957
'''미합중국 해군 1943 - 1945'''
U.S. NAVY 1943 - 1945
'''이 주의 TV 중계 경기(해설자) 1960 - 1971'''
ANNOUNCED TV GAME OF THE WEEK 1960 - 1971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 1984'''
ELECTED BASEBALL HALL OF FAME 1984
'''그의 리더쉽은 다저스가 이뤄낸 7번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14]에 기여했고,'''
HIS LEADERSHIP HELPED WIN 7 DODGERS PENNANTS
'''그는 메이저리그가 첫 흑인 야구선수를 받아 들이는데 동의한 인물이었다.'''
HE EASED THE ACCEPTANCE OF BASEBALL'S FIRST BLACK PLAYER INTO THE MAJOR LEAGUE.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온화한 사람이었다.'''
HE WAS A LOVED AND GENTLE MAN
HAROLD "Pee Wee"
JULY 23.1918
AUG 14. 1999


3.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1940
BRO
-
LAD

84
361
85
8
4
5
58
28
15
45
42
.272
.366
.372
.738
2.3
2.1
1941
152
674
136
23
5
2
76
46
10
68
56
.229
.311
.294
.605
2.1
2.4
1942
151
656
144
24
5
3
87
53
15
82
55
.255
.350
.332
.681
5.5
6.1
1943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군복무)
1944
1945
1946
152
644
154
16
10
5
79
60
10
87
71
.281
.384
.378
.762
5.6
6.0
1947
142
590
135
24
4
12
81
73
7
'''104'''
67
.284
.414
.426
.841
6.2
5.8
1948
151
655
155
31
4
9
96
75
25
79
63
.274
.363
.390
.753
4.4
5.2
1949
155
'''743'''
172
27
3
16
'''132'''
73
26
116
59
.279
.396
.410
.806
6.8
7.4
1950
141
633
138
21
5
11
97
52
17
91
62
.260
.369
.380
.750
3.6
4.1
1951
154
711
176
20
8
10
94
84
20
81
57
.286
.371
.393
.763
4.3
5.1
1952
149
660
152
18
8
6
94
58
'''30'''
86
59
.272
.369
.365
.734
4.5
5.2
1953
140
625
142
25
7
13
108
61
22
82
61
.271
.374
.420
.794
4.4
5.2
1954
141
661
171
35
8
10
98
69
8
90
62
.309
.404
.455
.859
5.8
6.2
1955
145
652
156
29
4
10
99
61
8
78
60
.282
.371
.403
.774
4.0
4.2
1956
147
648
147
19
2
9
85
46
13
56
69
.257
.322
.344
.667
1.6
2.6
1957
103
378
74
3
1
1
33
29
5
39
32
.224
.306
.248
.555
0.3
0.5
1958
59
181
33
7
2
4
21
17
1
26
15
.224
.337
.381
.718
-0.1
0.2
<color=#373a3c> '''MLB 통산'''
(16시즌)
2166
9472
2170
330
80
126
1338
885
231
1210
890
.269
.366
.377
.743
61.3
68.2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피 위 리즈
7
102
100
39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Shortstop (17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피 위 리즈
66.4
41.0
53.7
유격수 HOF 입성자 평균
66.7
42.8
54.8

5. 재키 로빈슨과의 포옹



5.1. 상세


[image]
군 복무 시절 휴 케이시(Hugh Casey)와 피 위 리즈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했고 피 위리즈는 당시 군 복무 중[15]에 그 소식을 들었는데 재키 로빈슨에 대한 질문은 "니그로리그에서 얼마만큼 활약을 했나? 나와 같은 포지션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흑인이라는 것엔 신경도 안쓰고, 자신의 경쟁상대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었다. 물론, 니그로 리그에서 유격수로 뛴 재키 로빈슨은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그와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
1947년 5월 14일, 브루클린 다저스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경기를 위해 경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인 선수가 나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16] 극도로 분노해서 협박편지들을 구단과 재키 로빈슨에게 보냈다. 그 협박 편지들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만약 네가 경기를 하러 크로슬리 필드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우린 널 죽여버릴 거야." 그리고 경기 시작 전, 경기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살벌해졌다.
[image]
1940년대 크로슬리 필드
그리고 당시 레즈의 홈구장인 크로슬리 필드를 찾은 6,688명의 관중은 재키 로빈슨이 필드에 나서는 순간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고, 곧이어 '''니그로'''[17]라는 말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상대 팀인 신시내티 레즈 선수들마저 재키 로빈슨에 대한 폭언을 퍼부으며 경기를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image]
재키 로빈슨의 전기영화 42에서의 장면
경기장 내부의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무렵 당 경기에 유격수로 출전한 피 위 리즈[18]가 자기 자리를 떠나 1루수 재키 로빈슨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는 글러브를 벗더니 경기장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았다. 둘은 가볍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야만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크로슬리 필드는 한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19]
경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속개되었고, 재키 로빈슨은 4타수 2안타, 피 위 리즈는 2타수 1안타 1볼넷의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다저스는 레즈의 이웰 블랙웰에게 0:2로 완봉패당했다.

"''필드에서 재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알테고, 그러면 재키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어.''"

로저 칸(Roger Kahn)[20]

과의 인터뷰 중 왜 그런 행위를 했냐는 질문에.


그 용기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리즈는 그 이후, 고향[21]

으로 돌아가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칼 얼스킨(Carl Erskine)[22]

그러나 이날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미국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인 피 위 리즈가 흑인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은 이 사건은 미국 전체에 대단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피 위 리즈는 당시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켄터키주의 중심도시 루이빌 출신이었고 나중에 고향에서 이 행동 때문에 많은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는 재키 로빈슨을 야구계 전체가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수많은 흑인선수들이 야구계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흑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색인종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계기도 마련해줬다.
그의 이런 행동은 순간적인 쇼가 아닌, 평소에 늘 지고 있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로빈슨 입단 시 "그가 내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훌륭하다면 그건 별로 달갑지 않지만,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럴 자격은 있다."라고 말한 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실력이 우선한다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상관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의식과 행동이 이후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image]
피 위 리즈는 죽을 때까지 서재에 자신과 재키 로빈슨이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뒀다고 한다.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살벌한 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영웅답다.
[image]
Keyspan park에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image]
2013년에 개봉하는 재키 로빈슨 전기영화인 '42'의 홍보 포스터 중 하나도 위 일화를 소재로 제작되었다.
참고로 NBA는 1950년 데뷔한 얼 로드가 최초의 흑인 선수이다. 하지만 실제로 흑인 선수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건 1970년대 이후. 대학농구 NCAA도 마찬가지로 60년대 초반까지 흑인이 출전하면 상대 팀이 경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흑인이 농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사상 최초로 주전 전원을 흑인으로 세운 텍사스 주립대학이 1966년 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다. 이 실화를 다룬 영화가 2006년 작 글로리 로드(Glory Road).

5.2. 사실이 아니다?


2013년 ESPN에서는, 이것이 1947년에 일어난 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여러모로 확실하지 않다는 내용의 칼럼을 싣기도 했다. 해당 칼럼
그리고 2016년에 방영된 미국 PBS의 다큐멘터리 'Jackie Robinson'에 등장한, 재키 로빈슨의 미망인인 레이첼 로빈슨이 이 일화는 꾸며진 이야기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레이첼 로빈슨은 당시 재키 로빈슨의 경기는 거의 다 관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목도한 바가 없으며, 또한 당시 신문기사 등을 보더라도 관련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고로 이는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동상 제작의 경우, 제작 주최측에서 레이첼 로빈슨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고.
상술한 내용 중 피 위 리즈의 인터뷰[23]도 있는 만큼,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과는 상관 없이, 이미 피 위 리즈는 로빈슨 입단 당시 다저스 선수들이 제안한 보이콧에 불참하는 한편, 동일 포지션의 경쟁자기까지 했던 로빈슨을 차별의식 없이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는 것 자체만으로[24] 충분히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였고 이 때문에 이런 미담도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기타


  • 재키 로빈슨이 인종차별로 고통 받을 때 "우리 팀 모두, 등번호 42를 달고 나가자."라고[25] 격려를 했다. 당시 재키 로빈슨 등번호 42만 보면 야유를 퍼붓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야유를 받으려면 다 같이 받자는 의도로 이야기했으며 이는 재키 로빈슨에게 "넌 혼자가 아니다. 우린 한팀이다."라는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한 발언이라고 한다. 그리고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60여 년 뒤에 4월 15일만 되면 모든 선수가 42번을 입고 경기에 나서게 됐다. 단 재키 로빈슨 데이의 공식적인 기원은 재키 로빈슨이 '다음 경기에도 42번이 나오면, 42번을 총으로 쏴버린다.'는 협박을 받자, 다저스의 외야수 진 허만스키(Gene Hermanski)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르겠지?'라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 그의 고향 루이빌에 있는 신시내티 레즈 산하 트리플A 팀인 루이빌 배츠(Louisville Bats)의 홈구장인 슬러거 필드(Slugger Field)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 다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군입대로 빠졌다.[2] "Pee Wee helped make my boyhood dream come true to play in the majors, the World Series. When Pee Wee reached out to Jackie, all of us in the Negro League smiled and said it was the first time that a white guy had accepted us. When I finally got up to Brooklyn, I went to Pee Wee and said, 'Black people love you. When you touched Jackie, you touched all of us.' With Pee Wee, it was No. 1 on his uniform and No. 1 in our hearts."[3] 1924~2002. 볼티모어 엘리트 자이언츠라는 니그로리그 팀에서 뛰었으며 재키 로빈슨이 인종의 벽을 깨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자, 1952년 5월 1일에 브루클린에 입단한 흑인 투수. 이후 신시네티 레즈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잠깐 활약한후 1958년에 은퇴했다.[4] Pee Wee는 "땅꼬마"라는 애칭으로, 그가 어렸을 때 몸집이 왜소했던 것때문에 붙여졌던 별명이다. 한국식으로 부르면 대략 땅꼬마 리즈라는 식으로 불린 것.[5] 1901년~1962년, 1968년 ~ 1972년까지 존속했던 팀으로, 1945년까지는 더블 A소속, 이후 1946년부터 해체될때까지 트리플 A소속으로 뛴 팀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제휴기간이 가장 길었던 팀이었다.(1939년~1955년, 1968년~1972년)[6] 참고로 2020년 기준 다저스 구단 통산 WAR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클레이튼 커쇼의 69.6.[7] 정확히는 피 위 리즈의 근소 우위. 지터는 20시즌을 뛰면서 71.8(bWAR)/71.7(fWAR)을 기록했으므로 연평균으로 따지면 약 3.6 정도이다. 양쪽 모두 40세 시즌이 마지막이고 선수로 활동한 기간도 지터가 20년, 피 위 리즈가 19년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커리어 평균 WAR을 비교하는 데 있어 적어도 나이 면에서는 그런대로 비등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8] 그가 얻은 1210개의 볼넷은 메이저리그 역대 57위(2016기준)인데 볼넷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홈런을 수십씩 때리는 거포들이라 고의사구로 얻어낸 볼넷도 적지 않은 반면에, 피 위 리즈는 장타력이 없는 선수라 순전히 눈야구로만 얻어낸 결과다. 비슷하게 교타자로서 선구안이 좋은 선수는 웨이드 보그스 정도.(볼넷 1412개. 단 피 위 리즈 보다 선수생활이 2년 길었다.)[9] 그것도 선수생활 전성기의 시작인 24살부터 26살까지. 참전 직전 해에도 올스타에 뽑혔고, 전역한 직후에도 올스타에 뽑혔으니 그야말로 선수 인생의 황금기를 터트리고도 남았을 시절이다.[10] 피 위 리즈가 참전 직전 시즌에 5.5, 전역 직후 시즌에 5.6 fWAR을 기록했으므로 참전 기간 동안 연평균 5.6 fWAR 정도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가정하면 그는 커리어 통산 78.1 fWAR을 기록할 수 있다. bWAR로 따진다면 참전 직전 시즌에 5.7, 전역 직후 시즌에 6.0 bWAR을 기록했으므로 참전 기간 동안 연평균 5.9 bWAR 정도를 기록했으리라 가정하고 계산했을때 83.9 bWAR이 나온다. 안타의 경우에도 피 위 리즈가 첫 해와 마지막 2시즌을 제외하고는 13년동안 항상 136개 이상의 안타를 쳐줬으므로 만약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선수로 뛰었다면 아무리 박하게 잡아도 안타를 408개 이상은 칠 수 있었을 것이다.[11] 밥 펠러, 테드 윌리엄스 등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다른 선수들도 피 위 리즈와 마찬가지로 통산기록에서 크게 손해를 봤다.[12] 1955년에 첫 우승을 겪을때까지 5번이나 양키스에게 우승을 헌납[13] 1921년~1993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번째 흑인포수였으며, 3차례 리그 MVP를 수상한 당대 최고의 포수이기도 했다. 1958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1월 28일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전신마비가 되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사고를 당한 후 이를 악문 재활훈련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는 35년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남긴후 1993년 세상을 떠났다.[14] 1941년, 1947년, 1949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6년.[15] 당시 전역을 앞둔 말년병장이었다. 1947시즌이 시작되기 전 전역해서 곧바로 팀에 합류했다.[16] 물론 당시만 해도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어서 브루클린 다저스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17] 현재의 Negro는 '검둥이' 정도의 경멸적인 표현이지만 당시 1940년대의 니그로는 어느정도는 학술적 용어로서 중립적인 뜻으로 쓰이는 단어였다. 니그로리그라는 이름을 정식 명칭으로 썼기에 모욕적인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현재의 욕설로 굳어진 것은 1960년대 이후. 물론 사람의 인종을 가지고 합창하는건 인종차별적 언사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조센징을 멸칭으로 사용한 것과 같다. 즉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흑인, 흑인"이라고 외친 거다.[18] 재키 로빈슨의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해당 경기에선 1루수로 출전했다. 경기 전 벌어졌거나, 타임이 불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나 보다. 경기 도중 유격수가 1루수 옆에 갈 일은 거의 없으니까. 재키 로빈슨의 전기영화 42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야유가 쏟아져, 캐치볼을 하던 도중에 어깨동무를 하는 것으로 표현했다.그리고 42에서는 키스톤 콤비에 피 위 리즈와 에디 스탠키라는 확고부동한 주전들이 있는 반면 1루수는 무주공산이였기에 입단시부터 쭉 1루수로 전향하여 선걸로 나온다. 실제 기록에서도 입단 첫해는 1루수로 뛰고 그 다음해부터 2루수를 차지한걸로 나온다. 영화에서도 어깨가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2루수로 원래는 쓰려고 했다가 1루수 상황이 워낙 안좋아서 전향한 것로 뜬다.[19] 영화 42에서는 실제 일화와는 반대로 관중들이 '''더''' 야유한다. 심지어는 피위보고 '''배신자'''라고 하는 관중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고 관중석을 바라보면서 친하게 대화하는 두 흑인과 백인을 보던 관중들은 점점 침묵하다가 마지막에는 박수를 보낸다. 특히 한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를 따라 피 위 리즈를 칭찬하다가 재키 로빈슨이 경기장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욕을 하자 그것도 따라하다가 위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참으로 묘한 표정을 짖는 것이 인상 깊다. [20] 소설가. 1972년에 여름의 소년들이라는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으며 이후 재키 로빈슨 전기소설도 저술했다.[21] 루이빌(Louisville)을 말한다.[22] 브루클린 다저스, LA 다저스에서 1948년 ~ 1959년까지 뛴 투수. 195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에이스로 평가받는다.[23] 재키 로빈슨과 동료로 보이기 위해 말을 걸었다는 내용.[24] 위에 실린 어깨동무 흑백 사진처럼 말이다.[25] 전기영화인 42에서는 피위 리즈가 "아마 내일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