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글래빈
1. 소개
[image]
미국인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 통산 성적은 22시즌 동안 305승 203패, 3.54 ERA, 4413.1이닝, 2607삼진, 1500볼넷, K/9 5.32, BB/9 3.06, K/BB 1.74, HR/9 0.73, 56완투, 25완봉을 기록했다. 또한 메이저리그를 강타했던 스테로이드, 도핑 논란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선수 중 한 명이다.'''야구에 대한 내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You can't measure heart with a radar gun.)'''[1]
그렉 매덕스, 존 스몰츠와 함께 90년대 애틀랜타 전성기를 이끈 투수 3인방 중 1인으로 유명하다. 매덕스는 컵스에서 FA로 이적해 입단했고, 스몰츠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드래프트된 뒤 마이너 시절 트레이드되어 입단한 것에 비하면, 글래빈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브레이브스에서 시작한 애틀란타의 프렌차이즈 스타다. 매덕스도 2번밖에 기록하지 못 한 20승을 '''무려 5번''' 기록했다.[2]
1990년대 최다이닝 2위(2228이닝), 다승 2위(164승)[3] 를 할 정도로 우수한 선수였다.
타격 성적은 22시즌 .186타율 1645타석 1323타수 246안타 93득점 1홈런 90타점 101볼넷 329삼진 .454OPS를 기록했는데 bWAR이 6.8로 타격 능력이 꽤 괜찮았다.[4]
2. 브레이브스 시절
고등학생 때부터 야구와 아이스하키를 병행했던[5] 글래빈은 1984년 MLB 드래프트 2라운드[6] 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NHL 드래프트에서는 로스앤젤레스 킹스의 지명을 동시에 받게 된다. 결국 글래빈은 야구를 하기로 결정[7][8] 하고 프로에 입문했다. 데뷔 3년차인 1989년부터 그는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 해 14승을 시작으로 애틀랜타를 떠나기 전까지 파업 시즌을 포함하여 매년 10승 이상을 거두는 꾸준한 맹활약을 펼쳤다.
피네스 피쳐의 정점으로 추앙받는 현재에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커리어 초기에는 의외로 강속구 투수였다고 한다. 글래빈을 직접 상대했던 토니 그윈의 증언 1980년대 투수 치고는 꽤나 빠른 93~94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였다고.
1991년에는 8.5로 MLB 전체 투수 bWAR 1위를 하고 246.2이닝 20승 11패 2.55ERA 192K의 성적으로 사이 영 상을 받았다. 이 기세로 글래빈은 1993년까지 3연속 20승을 찍었다. 1991~1993년은 글래빈의 전성기로 이 기간 성적이 103경기 711이닝 20완투/8완봉 62승25패 2.84ERA를 기록하며 매시즌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사이 영 상 3위 안에 들고 MVP표도 받았다.
거기다가 그렉 매덕스와 존 스몰츠까지 더해지면서[9] 브레이브스는 역사상 유례없는 황금기를 맞이한다. 글래빈이 있는 동안 5번이나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을 정도. 글래빈은 그 중 우승을 차지한 95년도의 월드시리즈 MVP로 선정되며 빅게임 피쳐로서의 명성 또한 얻게 되었다.
1998년에는 20승 6패, 2.47ERA로 다시 사이영상을 수상하는 좋은 활약을 했다.
2000년 3.40ERA[10] , 21승 9패를 거두며 MLB 다승 1위를 했다.
2002년까지 글래빈이 브레이브스에서 올린 성적은 242승 143패 평균자책점 3.37로 5번의 20승과 52번의 완투와 22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초년차의 부진한 기록을 합치더라도 그는 연평균 15승에 200이닝을 보장하는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이었다.
3. 메츠 시절과 그 이후
[image]
메츠에서 달성한 300승의 대기록
2002-03 오프시즌, FA가 된 매덕스의 에이전트가 브레이브스 측의 연봉조정을 받아들이며 브레이브스는 같이 FA가 된 글래빈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글래빈은 결국 정든 브레이브스를 떠나 라이벌 뉴욕 메츠로 이적(4년 $42.5M FA 계약)하였다.
그의 이적에 슬퍼한 팬들의 심정만큼 글래빈의 커리어도 덩달아 살짝 비틀거리는데, 첫 시즌 2003년에는 8월 15일에 통산 250승을 달성했지만,[11] 1989년부터 이어져온 10승 행진이 9승에 그치며 멈추고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루홈런을 얻어맞기도 했고 2004년에는 사이 영 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는 설레발이 나올 정도로 순항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성적이 주저앉게 되었다. 2005년 이후 바깥바깥바깥 피칭에 몸쪽 공략을 섞어보라는 릭 패터슨 투수코치의 조언을 따라 볼넷 비율을 줄이는데 성공하며 부활한다. 그리고 2007년 재계약하여 리글리 필드 시카고 컵스 원정에서 대망의 통산 300승[12] 에 성공한다. 하지만 2007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어메이징'''[13] 해지면서 메츠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에 기여한다.(...)
그리고 2007년 구단 측과 서로 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신사협정을 맺은 뒤 메츠 구단의 예상을 뒤엎으며(...)[14] 친정팀 브레이브스로 1년 $8M 계약으로 복귀하여 한 시즌을 뛰었다.[15] 2009년에도 $1M+$3.5M 인센티브라는 계약을 맺지만 마이너에서 재활 도중 방출된다.[16] 그리고 2010년에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014 명예의 전당 투표에 91.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그렉 매덕스,프랭크 토마스와 가볍게 1차 투표에서 입성에 성공했다. 명예의 전당에 쓰고 들어간 모자는 전성기를 보냈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tarting Pitcher (30th)
5. 피칭 스타일
랜디 존슨과 함께 좌완투수 유형의 양극단을 대표하는 투수이다. [17] 빅유닛이 강력한 패스트볼 구위와 브레이킹볼로 타자 몰아붙이면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전형적인 파워피처라면, 이쪽은 그와는 정 반대의 스타일로 정상에 올랐다. 스몰츠가 전형적인 파워피처, 매덕스가 춤추는 투심과 정교한 체인지업을 무기로 하는 변형 파워피처라면 글래빈은 왼손 기교파 투수(영어로는 soft tosser lefty)의 대표격이다. 속구 구속이 140km를 잘 넘기지 못하는가 하면 낙차 큰 커브나 슬라이더를 가지지도 못했으며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지도 못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305승 203패, 4413.1이닝, 통산 평균자책 3.54를 기록한 위대한 기교파 투수. 그러나 통산 볼넷도 1500개로 꽤 많으며, 통산 WHIP이 1.314로 평균자책에 비해 꽤 높다. (그렉 매덕스는 5008.1이닝 동안 999볼넷, 통산 WHIP 1.143)
기록만 보면 이 투수가 어떻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났나 싶겠지만 사실은 느린 속구와 더 느린 체인지업을 볼 하나~반 개 차이로 컨트롤할 수 있는 '''컨트롤 아티스트'''이자 존 바깥쪽만 활용하면서도 타자를 쉽게 잡아냈던 최고의 '''두뇌파 피처'''다. 주무기가 체인지업인지라 '''체인지업의 귀재'''라는 별명도 있다.
결정구를 체인지업으로 삼은 계기가 재미있는데, 글래빈이 마이너리거였을 때 결정구는 포크볼이었다. 1986년 하루는 글래빈이 포크볼로 많은 삼진을 잡은 경기가 있었는데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이자 당시 마이너리그 피칭 인스트럭터였던 네드 요스트가 글래빈에게 본인의 포크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글래빈은 제대로된 구종이라며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런데 요스트 曰 '''마이너리그라면 몰라도 그런 조잡한 구종을 가지고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면 탈탈 털릴걸?''' 하지만 글래빈은 여전히 포크볼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고 몇주후 암 보 잭슨을 상대하게 되었다. 한달 전쯤 글래빈의 포크볼에 여러 번 삼진을 당했던 잭슨은 그날 경기에서 기다렸다는듯 포크볼을 담장밖으로 날려버렸고, 글래빈은 마이너리그 타자가 불과 한달만에 타격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고 그런 타구를 날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 그는 요스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고, 체인지업을 연마하기로 결심하게 된다.체인지업과 사이영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지만 그렇게 얻은 체인지업도 요한 산타나의 스톱마구나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UFO 같이 절륜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그런 똥볼들을 바깥쪽에다 줄창 집어넣을 수 있는 집요함과 제구력, 배짱이었을 것이다. 톰 글래빈은 '''조바깥 따윈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집요하고 극단적인 바깥쪽 승부를 가져가는 투수이다.''' 상대 우타 좌타 가릴것 없이 타자와의 바깥쪽 승부를 집요하게 구사하기로 유명한데, 이를 위해 첫 1회 동안은 계속 존 바깥쪽에 볼을 살짝살짝 집어넣으면서 '''심판을 테스트'''한다. 각 심판 특유의 존 입력이 끝난 이후 다음 이닝부터는 그 존을 넘나들면서 속구와 체인지업의 구속차를 이용, 거의 70~80% 이상의 볼을 타자의 바깥쪽에 집어넣으면서도 예술적으로 타자를 잡아낸다. 존이 짜서 볼넷을 주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죽어라 바깥쪽으로 던지는 집요함까지 갖춘지라 더욱 피곤하다. 이렇게 끈질기게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반개정도를 빼며 유혹하다보면 심판도 속아서 자기 스트라이트존이 넓어지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타자만이 아니라 심판까지 속인 것.. 애초 이 양반의 별명은 '''여우'''다.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았다. 맨날 바깥바깥바깥 승부를 가져가며 1회부터 심판을 자기 존에 맞추는 스타일이다보니 그런 게 통하지 않는, 경기전 심판 길들이기 상황[18] 인 '''통산 1회 평균자책이 4.58, SO/BB가 389/334'''에 달했다.(...) 선발투수중 적지 않은 투수가 1회때 존 설정이나 몸풀림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는 있어도 BB/K가 심각하게 망가지는 케이스는 드문데 그런 점에서 글래빈의 될때까지 밀어붙이는 나름 고집센 스타일을 볼 수 있는 단면, 그래서 2회는 2.83에 452/188이라는 우리가 아는 명예의 전당 투수로 돌아온다. 1회를 제외하고 가장 성적이 안 좋은 7회 기록이 3.91에 203/94. 그야말로 경기마다 첫 이닝만 빼면 완벽하게 상대 타자와 오늘 주심을 요리하는 선수로, 평범한 기교파 투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위대한 투수라는 것. 하지만 이런 스타일 때문에 보는 재미가 떨어지는 투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재미의 문제는 상대적이지만 랜디 존슨과 톰 글래빈 중 누가 더 화려한 맛이 나겠는가? 타이밍이 승부인 투수라 인터벌도 긴 편이고 삼진을 멋지게 잡는 투수도 아니며 정말 집요하리만치 바깥쪽만 노리는 타입의 선수라..
이 덕분에 선수 시절에는 리그 차원에서의 스트라이크 존 변화를 시행할때마다 글래빈은 한해 동안을 해매다가 다시 성적을 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2003년 뉴욕 메츠때 MLB에서 시범 도입했던 심판정보시스템 '퀘스텍'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글래빈의 메츠 시절 셰이 스타디움에 퀘스텍이 설치됐는데, 이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4점대 방어율을 찍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99년 시즌이다. 전 해 20승 6패 2.47의 눈부신 성적으로 사이 영 상을 따냈던 글래빈은 그 다음해 스트라이크 존이 변화하면서 14승 11패 4.12에 무려 '''259피안타'''를 허용하는 치욕을 맛봤다. 다행히도 변화한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한 2000년에는 21승 9패 3.40으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다. 하지만 사이영상은 랜디 존슨의 차지.
이런 유형의 투수들이 그렇듯 존 편파 논란, 봐주기 논란 등에 자주 시달리던 투수였는데[19] , 메츠 이적 이후 투구추적장비 '퀘스텍'으로 심판의 고과를 측정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자 공교롭게도 직전 해 2.94의 평균자책점을 찍던 글래빈의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폭등하였고 안티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 때 글래빈은 언론의 공세에 지친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보란듯이 3년 연속 3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었고, 이후 글래빈의 존 논란은 쏙 들어갔다.
글래빈의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최고의 제구력을 가진 투수였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볼넷 출루를 기꺼이 활용하던 투수였다는 것이다. 1루 베이스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글래빈은 피출루율이 4할이 넘고 볼넷 비율이 폭등하지만, 1루 베이스를 채우면 다시 칼같은 제구력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볼넷 억제력이 뛰어난 투수의 볼넷은 실점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막과 함께 영상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집요한 바깥쪽 승부와 체인지업이 주무기였지만 빠른 공의 완급조절에도 능했다. 사실 빠른 공의 완급조절은 빅리그 에이스급 투수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5.1. 세이버메트릭스적 재평가 논란?
2000년대를 넘어서며 점점 세이버메트릭스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특히 당시 투수 세이머메트릭스의 총아로 여겨졌던 FIP의 등장 이후 이런 저런 논란이 되었던 투수. FIP 의 골자는 BABIP에 대해 알고 난 뒤 이해를 해야 하는데, 한 마디로 투수들의 '던진 공이 타자의 방망이에 맞았을 때 안타가 될 확률'은 일정하다는 이야기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같은 레전드 투수나 리그의 그저 그런 투수나 공이 방망이에 맞고 난 후의 피안타율은 별 차이가 없다고 알려졌던 것.
바꿔 말하면, 결국 '피안타는 투수의 능력을 나타나는 데에 적당한 스탯이 아니니 피안타를 제외한 삼진, 볼넷, 홈런으로 투수의 능력을 측정하자' 가 FIP의 골자다. 그런데 글래빈은 삼진을 산처럼 쌓지도 못했고(통산 K/9 5.32)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에 꼽히는 제구력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볼넷도 꽤 많은 편(통산 BB/9 3.06)이기 때문에 그의 통산 FIP은 3.95으로 탑클레스급이라고 보기는 힘든 기록이다. 피홈런이 적은게(통산 HR/9 0.73) 그나마 장점이지만.
그런데 평균 자책점은 또 좋다. 통산 평균 자책점은 3.54로 FIP와는 0.4 점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적게 차이가 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으나 동시대 레전드 투수들의 경우 이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 같은 애틀란타 3인방 존 스몰츠의 경우 ERA 가 3.33, FIP가 3.24 이며 그렉 매덕스는 3.16, 3.26 이며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2.93, 2.91 이고 랜디 존슨은 3.29, 3.19 이며 커트 실링은 3.46, 3.23 이다. 글래빈 정도의 경력을 가진 투수치고 이 정도 차이가 나는 건 꽤 큰 차이다.
이 때문에 원래 FIP가 기존의 시각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스탯인데, 글래빈은 FIP를 공격하는 주요 증거 중 하나로 선택되는 경우가 잦다. 기존 세이버 스탯에서 기교파 투수가 저평가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가장 주요한 반례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당시 FIP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반론했다.
- 글래빈은 아웃라이어다. 확실히 통계에서 벗어나는 투수이며, FIP 로만 잴 수 없으며 BABIP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투수였다.[20] 하지만 글래빈을 비롯한 소수의 예외가 있다 해서 더 많은 투수들에게 확실히 적용 가능한 FIP 가 존재 가치를 잃는 스탯은 아니다. 애초에 모든 선수의 능력을 공정히 잴 수 있는 완벽한 스탯은 아직 없다.
- 당시 통계의 미비 때문에 글래빈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 다른 수치들이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브레이브스 구장은 투수친화적인 구장이었으며, 당시 수비진의 수비 실력은 역대급 중견수 수비를 보여준 앤드루 존스 등 수비 능력이 뛰어났고 무엇보다 글래빈 본인이 뛰어난 수비 실력을 가진 투수였다. 글래빈은 이런 수비와 구장의 이득을 본 경우이며 FIP 에 딱히 문제가 있지는 않다.
- 애초에 FIP 와 ERA 는 다른 스탯이다. FIP 의 ERA 예측력이 뛰어나긴 하나 투수의 능력을 잴 수 있는 다른 바로미터로써 FIP 를 만든 것인데 기존의 바로미터인 ERA 와 어긋난다고 해서 그걸 굳이 ERA에 갖다 맞추려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래빈은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집요하게 구석을 물고 늘어지고,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마저 살짝살짝 넓혀가는 희대의 변칙적인 투구법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원래 볼이 선언될 공이 스트라이크로 선언되니 타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볼,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 구석으로 들어가는 공에 컨택을 해야 했고 이것이 글래빈의 BABIP 을 떨어뜨린 것이다. 또 같은 이유로 글래빈은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볼 상황에서 일반적인 투수라면 볼4를 두려워해서 스트라이크를 던지게 되지만, 글래빈은 볼을 각오하고 그냥 바깥쪽을 파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볼인 공을 던지더라도, 볼이 선언될 확률에 더해서 심판이 착오로 스트라이크 콜을 할 수도 있고, 상대 타자가 볼이 될 투구를 타격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글래빈의 통산 볼넷이 늘어난 이유이다.
사실 이 논쟁은 스탯을 수박 겉핥기로 알고 그 내막은 알려 하지 않던 한국의 자칭 메트리션들의 촌극에 가깝다. [21] 지금이야 FIP와 실점 기반 스탯을 둘 다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지만 당시 MLB 커뮤니티에는 유독 ERA와 FIP를 무슨 여당, 야당처럼 갈라놓고 한 쪽 선택을 강요하던 분위기가 강했다. 한편 한국에서 ERA와 FIP를 두고 이른바 글래빈 예송논쟁(?)이 벌어질 때, 이미 현지 세이버 사이트에서는 BABIP의 책임 분배, BABIP를 낮추는 피칭 유형, FIP의 대안 스탯 등등 수많은 칼럼들과 발전적인 논의들이 나온 지 오래였다. 국내 MLB 커뮤니티들은 이러한 정보에는 전혀 관심없이 그저 FIP라는 도그마에만 과도하게 사로잡혀 '아웃라이어일 뿐이다', 'FIP는 문제 없다' 같은 주장을 하며 글래빈을 유일무이한 예외 사례로 몰아가기 바빴다. 이처럼 어설픈 땜질을 시도하니 반박하는 논리도 영 이상해졌다.[22]
우선 글래빈이 앤드루 존스와 함께 한 시즌은 7시즌 뿐이며 그 중 하나는 존스가 19살에 31경기 나온 쌩 신인 시절이다. 심지어 첫 사이영은 팀 수비가 최악이던 시즌에 수상했다. 물론 그 시즌에도 글래빈의 ERA는 FIP보다 낮았다. 메츠 시절에는 오히려 팀 수비권이 하위권에 가까웠다. 그리고 투수 본인의 수비 기여를 반영 못 하는 것은 FIP의 명백한 단점인데, 이를 'FIP는 원래 수비 반영 안하니 문제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23] [24]
그리고 글래빈이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투수는 맞지만, MLB 역사에 글래빈처럼 FIP와 맞지 않는 유형이 딱히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다. 나무위키에도 문서가 있는 유명 투수들만 따져도 화이티 포드. 짐 파머, 캣피쉬 헌터, 워렌 스판 등이 있다. 피네스 피처로 롱런하며 2할 중반대의 낮은 BABIP, 큰 FIP-ERA 격차를 커리어 통산으로 기록한 선수들이다.[25] 현 시대에도 카일 헨드릭스라는, 통산 BABIP. 280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비슷한 유형의 선수가 존재한다.
6. 이모저모
- 통산 포스트시즌 성적은 14승 16패, 평균자책 3.30으로 나쁘지는 않지만 브레이브스-메츠가 포스트시즌에 그리 강한 팀이 아니라서 월드시리즈 우승은 1995년 한 번밖에 하지 못했다. 이 때에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사이 영 상도 두 번(1991, 1998)이나 타긴 했지만, 팀동료 그렉 매덕스는 워낙 다른 경쟁자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성적을 올렸고, 존 스몰츠는 포스트 시즌에 강한[26] '강철 심장'으로 유명해서 애틀랜타의 에이스 3인방 중에서는 화려하기 보다는 꾸준하다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27]
- 앤디 페티트, 숀 그린과 함께 메이저리그의 3대 포커페이스로 통했다. 경기에서는 절대로 웃는 법이 없을 정도로 냉철하게 게임을 이끌어서 그랬기도 했지만, 경기 외적으로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대변인으로도 활동한 바가 있어 더더욱 냉철한 이미지의 선수로 인식되곤 했다. 단순히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성격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침착한 성격으로 매덕스나 스몰츠와는 대조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 노조활동으로 인해 1994년 시즌이 파업으로 중단되고 월드시리즈까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28] 1995년 재개된 시즌에 원정에서는 물론이고 '야구가 중단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한 애틀란타 홈 관중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개막 지연 이후 사무국과 노조간에 시즌 개막 시점 및 급여 합의가 계속 교착상태인걸 보고 협상에 실패하면 무조건 선수들이 욕먹고 불리해진다며 어느정도 타협을 권유하기도 했다. 다만, 선수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백번 이해한다며 한편으론 선수 노조측을 이해해 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 前 마이애미 말린스 감독이던 마이크 레드먼드는 현역시절엔 수비만 좀 하는 듣보잡 백업포수였지만 글래빈을 엄청나게 괴롭힌 글래빈 킬러다. 글래빈 상대면 무조건 주전으로 나와서 48타수 21안타 2홈런 7타점 타/출/장 .438/.471/.604을 기록했다.
- MLB 맥팔레인 피규어로는 3인방 가운데 가장 늦게 나왔다. 글래빈이 메츠로 이적한 뒤에 메츠 피규어가 나오더니, 이후 애틀랜타 체이스 버전 피규어도 발매된 것. 당시 국내거래가는 5만원 정도 였는데 글래빈이 통산 300승을 돌파하면서 시세가 급등, 현재는 평균 1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매덕스나 스몰츠가 3~4만원 선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싼 편.
- 동생 마이크 글래빈도 야구선수였다. 하지만 빅리그에서 뛸 재능은 없었는지 2003년에 뉴욕 메츠 소속으로 7타석 선 것이 고작이다. 사실 톰 글래빈이라는 형을 두지 못했다면 영원히 메이저리그 타석에 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로 톰 글래빈의 투수 타석 대타로 출전하다가 다시 마이너리그행. 그래도 대학 시절에는 꽤 날렸는지 노스이스턴 대학교에서는 레전드 대접을 해준다. 2006년 노스이스턴 대학교 자체 명예의 전당에 들었고 2007년부터 대학 코치로 재직 중.
7. 연도별 주요 성적
[1] 한국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미국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글래빈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 발언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글래빈 본인의 독창적인 발언인지, 원래 있는 말을 인용한 건지는 불명[2] 대신 매덕스는 17년 연속 15승이상을 기록했다. [3] 2부문 다 매덕스가 1위[4] 1996년은 타자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22안타 .675OPS를 찍으며 타자 bWAR 1을 기록했다.[5] 이 때문인지 글래빈은 다른 투수들에 비해 타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며 실버슬러거를 4번이나 받았고, 선발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날은 대타로 출전하는 일도 있었다.[6] 그렉 매덕스와 같은 라운드 출신이다. 매덕스는 전체 31번픽, 글래빈은 전체 47번픽.[7] ESPN과의 인터뷰에서 글래빈은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 스포츠를 다 겪어본 후에 각각의 스포츠의 장/단점을 생각해봤죠. 근데 내게는 둘다 거의 비슷했습니다. 두가지 모두 다 좋아했구요. 근데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내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키보다 야구를 할 때 더 큰 이점을 가져다 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완투수를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알았기에 야구를 선택할 수 있었죠."[8] 글래빈이 아이스하키를 선택했다면 MLB와 NHL의 역사는 달라졌을것이다.[9] 1991년부터 1998년까지 97년만 빼놓고 셋이서 사이영상을 싹슬이했다. 그 97년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의 주인공은 외계인.[10] 별로 안 좋아보이지만 MLB에서 9위였고 AL ERA 2위인 로저 클레멘스가 3.70이었다.[11] 250승을 달성한 톰 글래빈은 애틀란타에서 열리는 원정경기를 앞두고 애틀란타에 있는 자택에서 팀 동료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였지만 백인 선수들만 참석하였고, 그 파티에 참석한 유일한 유색인종 선수는 서재응 뿐이었다. #[12] 역대 좌완 중 5번째이다. 앞선 인물들은 에디 플랭크, 레프티 그로브, 워렌 스판, 스티브 칼튼. 글래빈 다음에는 랜디 존슨이 달성.[13]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88승 73패로 동률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경기에서 아웃카운트 딱 하나 잡는동안 5피안타 2볼넷을 내주며 7실점하였다. 그야말로 '''탈탈''' 털린 것.[14] 구단 측에서는 글래빈이 그대로 은퇴할 것이라 예상했다고.[15] 이 시즌 초에 선수로서 처음 부상자 명단에 오르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16] 존 스몰츠는 이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실패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브레이브스 구단을 상대로 일갈을 날렸다.[17] 이들은 여러번 상대투수로 붙었다.[18] 동시에 톰 글래빈 본인이 영점을 잡는 과정이기도 하다.[19] 이른바 슈퍼스타 콜. 종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논란이 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XX존 00존 하는 용어들[20] 글래빈의 통산 BABIP를 보면 커리어 내내 꾸준하게 리그 평균보다 낮은 BABIP를 기록하고 있다.[21] FIP는 대전제부터 틀린 이론이기에 단기 표본의 설명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옛말이다. 당장 MLB 중계에서도 요즘에는 FIP이 거의 나오지 않으며, 이걸 기반으로 사이 영 상 투표를 했다는 기자도 잠깐 있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만큼 현 시점 FIP는 거의 힘을 잃은 스탯이다.[22] 오히려 글래빈이라는 사례는 리키 놀라스코, 제레미 헬릭슨 등과 함께,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FIP 시스템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머지 둘의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ERA-FIP 격차가 꽤 크게 난 선수들이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FIP 관점의 서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FIP가 의미를 상당히 잃은 현 시점에는 의미없는 서술들이 되어 버렸다.[23] 투수 본인의 수비를 반영하지 않아서 FIP가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투수로 놀란 라이언이 있다.[24] 투수의 BABIP는 보통 탈삼진 능력이 뛰어난 파워피쳐, 불펜 투수, 플라이볼 피쳐, 너클볼러일 경우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0.280 이하의 BABIP를 기록한 투수들이 드물지는 않으나, 그들 중 글래빈만큼 BABIP 낮추기 좋은 조건에 죄다 어긋나는(...) 투수는 많지 않다.[25] 단 스판은 커리어 초기에 파워 피처였다.[26] 정작 애틀란타로 이전 이후 브레이브스의 유일한 월드 시리즈 MVP는 글래빈이고(...), 셋 중 월드 시리즈 승리 확률 기여도가 가장 높은 선수도 스몰츠가 아닌 글래빈이다.[27] 한국프로야구에 대입하자면 해태의 전성기 시절 선동열이 매덕스, 조계현은 스몰츠, 이강철은 글래빈에 해당하는 이미지라고 할수 있다.[28] 당시 글래빈은 선수노조에서 강경파에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