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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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여성 예복. 왕비와 세자빈을 비롯해 사대부 여성들까지 색깔과 무늬를 다르게 하여 착용하였으며, 민간의 혼례를 위한 예복으로도 착용하였다.
2. 원삼의 유래
원삼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조선 초기 단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삼이라는 용어는 양성지[1] 가 저술한 《눌재집》에서 처음 보인다. "양반 부녀자들이 원삼이라는 것을 지어 입고 흉배를 달아 입었으며 백주대도를 활보하여도 괴이하다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문장에서 당대 여성들이 원삼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연산군 시기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원삼은 조선 후기와 달리 남성의 옷인 단령과 흡사하게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이때부터 사라 능단의 값이 뛰어올랐으로 조사(朝士)로서 가난하여 살 수 없는 자는 여자의 옷으로 단령(團領)을 만드니, 조하(朝賀)·조참(朝參) 때이면 반 너머가 다 여자의 원삼(圓衫)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1년 6월 13일
3. 원삼의 착용 제도
원삼은 착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색깔과 무늬, 부속품 등이 모두 달랐다. 황후는 황원삼, 왕비는 홍원삼, 비빈은 자적원삼, 공주·옹주·민간의 부녀는 초록원삼을 입어서 구별을 두었다.
또한, 흉배를 달았는데 1681년 《숙종인현후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가 봉황 흉배를 사용한다고 나왔고, 영조 때의 《국조속오례의서례》에는 왕비는 오조룡을, 왕세자빈은 사조룡을 달도록 하였다. 1847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는 수(壽) 흉배를 달았다는 기록이 있다. 초록원삼은 공주와 옹주는 직금 또는 부금으로 만들었고,민간에서 사용할 때는 금박 장식이 없이 소박하였다. 이 밖에 아청색[2] 이나 남색의 원삼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원삼을 착용할 때는 머리에 어염족두리에 어여머리를 하여 가체를 올렸다.
그런데 원삼은 단순히 예복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김장생이 쓴 《사계전서》의 상례비요 편을 보면, "부인은 대수(大袖)를 쓰는데, 대수는 곧 원삼(圓衫)이며, 세속에서는 더러 장옷도 쓴다"고 하였으니 부인이 사망하여 장례를 치를 때는 수의로 원삼을 입히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조선 전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1442년(세종 24) 집현전에 들어가 일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고려사, 세종실록, 예종실록 등에 참여하였다. [2] 아청색은 검은 빛을 띄는 파란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