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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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초상화, 신라 중~후기의 단령.
정몽주의 초상화, 고려 말~조선 초의 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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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초상화, 조선 초기 흉배가 달린 단령.
채제공의 초상화, 조선 중~후기 흑단령.
1. 團領
1.1. 개요
1.2. 종류
1.3. 역사
1.4. 국왕의 상복
1.5. 외국의 단령


1. 團領



1.1. 개요


원래는 목 부분의 둥근 깃을 의미하나 단령포, 즉 둥근 깃의 외투를 단령이라고 한다. 몽고, 서역 지방에서 유래한 전통의상의 일종이다. 정확히는 선비족의 복식에서 유래한 호복의 일종으로, 선비족의 문화적 영향이 강했던 수나라, 당나라와 같은 고대의 중국관복에서 시작해 한국에서도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에서도 도입해 입었던 관복이다.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일본이나 베트남 등에서도 귀족이나 관료들의 복식으로도 애용했었고, 북방의 유목민족도 입었다고 하니, 일종의 국제적인 의상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 관리들이 집무를 볼 때 시복(평상복)으로 입었으며 옷의 색상과 가슴과 등에 달린 흉배와 허리에 매는 띠로 품계를 구별하였다. 현재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입는 옷으로 사용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고대~전근대 동아시아 정장이라고 볼 수 있다'''

1.2. 종류


공식 행사 때 착용하는 상복과 집무시 착용하는 시복으로 구분된다.
사극에서는 문무백관이 상시 상복을 착용하고 있으나 이는 고증오류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집무복인 시복 단령은 흉배가 그려지지 않은 모습이고 당상관은 토홍색 내지 분홍색, 당하관은 녹색 내지 적홍색 단령을 입었다.

1.3. 역사


중국의 손기(孫機)는 『中國古輿服論叢』 「南北朝時期我國服制的變化」에서 단령포를 북조시기에 서역의 호복과 선비족의 복식이 융합되어 탄생한 산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중앙아시아의 합임포인 칸디스(kandys)에서 단령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기원전 4세기 알타이 지방의 유적에서 단령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족은 본래 직령 형태의 포를 입었으나, 4세기 들어 서역의 영향으로 단령을 입게 되었고, 그것이 수, 당나라의 관복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4~5세기경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 신라법흥왕 때 관등의 높이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 순으로 공복을 규정했다가 진덕여왕 2년 김춘추당나라에서 중국식 단령을 받아온 것이 처음이며, 고려 때에도 신라의 관복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권 강화에 큰 힘을 쏟은 광종 11년 3월에(960년) 고려식 4색 공복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4색은 자색, 단색, 비색, 녹색이었다.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할 때에는 원나라의 관복인 질손을 입었고, 이후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무제로부터 사모와 함께 하사받아 다시 들여왔고,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관복화되었다. 1900년에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단령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단령은 처음에는 고려 후기 단령과 큰 차이가 없었다가, 상복의 띠 만으로는 상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 단종 2년(1454년) 때부터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리고 소매가 점차 늘어졌고 품 또한 넓어졌다. 백관 상복의 흉배는 사각형으로, 1897년(고종 34년) 기록을 보면 왕족은 기린(麒麟), 문관 당상관(정3품 이상)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이며, 이를 보여주는 실물도 상당수 남아 있다. 초기 흉배의 크기는 상복의 가슴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컸지만, 말기에는 작아졌다.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단삼이라는 이름으로 단령을 입었는데, 사대부 여성들이 대례복으로 입을 시에는 단삼에도 남편의 품계와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형적으로도 서로 차이점이 별로 없어 단삼을 남자의 관복으로 고쳐입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후 단삼은 원삼이라는 이름으로 리폼, 변형되었는데, 원삼 역시 초기에는 이전의 단삼 및 단령과 같이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
조선에선 태조~ 세종 28년 이전까지는 잡색단령을 착용 세종28년부터는 아청색빛의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세조 때 흉배를 처음 보급했는데, 그 때 흉배는 당상관만 달았다. 삼정승과 좌우찬성은 공작, 좌우참찬과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판서, 한성판윤, 대제학, 제학,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한성 좌우윤, 관찰사 등은 운안, 육방승지,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의,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목사, 대도호부사 등은 백한을, 병조, 공조의 판서, 도총관, 병조, 공조의 참판, 부총관, 병마절도사 등은 호표를, 수군절도사, 오위장, 병조, 공조의 참의, 병조참지, 병마절제사 등은 웅비를 달았다. 도통사는 해치 흉배를 달았다. 연산군 때는 모두 달았으며, 이 때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의 흉배를 다 달았다. 그 뒤 명종과 선조 시기에 흉배가 약간 변형 되었으며, 광해군 때는 도통사의 흉배인 사자와 대사헌의 흉배인 해치가 없어지고, 도통사는 호표 흉배로, 대사헌과 대사간은 운안 흉배로 통일했다. 인조 이후에는 통일이 되어 문관 당상관은 운안,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달았다. 그리고 홍,청,녹 3체제에서 흑녹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당상관은 흑녹색 또는 흑보라색 단령을 입었고 당하관은 연한 흑녹색 단령을 입었다. 영조 이후에는 다시 바뀌는데, 문관 당상관은 운학,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달았으며, 색깔도 흑갈색과 흑남색으로 바뀌었다. 고종 때는 서양화의 영향으로 쌍학, 단학, 쌍호, 단호로 통일되었다가 1900년에 군신의 복식을 서양화하면서 단령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동안은 혼용되었다.
인조이후인 조선후기로 들어서는 쑥색빛의 현록색의 흑단령이 상복이 되었고 이는 고종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조선의 당상관들은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 분홍색 단령을 착용한 것이 초상화를 통해서도 확연하게 확인이 되는데, 이는 현재 분홍색이 여자의 전유물로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확연하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도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의 단령은 중국식 그대로 매듭으로 된 맺은단추로만 옷깃을 고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맺은단추는 깃 쪽에만 남고 다른 곳은 일반 한복처럼 옷고름으로 여미게 되었다.
사극에서는 조선 후기에도 홍색 옷과 청색 옷을 입는 것처럼 나오는데 이는 고증오류다. 다만 KBS 사극들에서만큼은 의상 고증을 어느정도 잘했다. SBS 사극 같은 경우에는 홍색, 청색 옷을 조선후기에도 입는 것처럼 나오는데 이는 고증오류이지만 그래도 조선 초기에 흉배가 다른 것은 잘 고증을 했다.
한편, 단령은 혼례의 신랑 예복으로 쓰였는데, 이는 벼슬있는 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자색이나 남색의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단령이 본래 중국 한족 왕조들이 고안한 의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단령은 서역, 혹은 북방 유목민족 의상인 호복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북조시대에 처음 등장하며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한 것이다.

1.4. 국왕의 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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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고려 태조 왕건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소매가 좁고 연한 뽕잎색의 단령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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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 소장된 공민왕의 초상화에서는 흑색 복두를 쓰고 옷깃이 흑색인 붉은 단령을 입고 홀을 든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 윤1월 7일의 기록으로 보면, "홍무 2년(1369)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셨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69년부터는 고려 왕도 곤룡포를 입었고, 이것이 조선 때까지 이어진 듯하다. 태조 이성계 어진이 청색인 것으로 보면 고려 왕들도 청색 곤룡포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1.5. 외국의 단령



1.5.1.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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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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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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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단령과 거란식 의복을 혼용해 입었다. 송사전 요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족 관리들은 단령을, 거란족 관리들은 거란식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벽화 및 당시의 많은 벽화, 석상 유물을 보면 남자는 거란, 여진, 탕구트 등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단령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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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1.5.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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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헤이안 시대 초의 단령으로, 헤이안 중기 이후로부터 형태가 바뀌어 소쿠타이의 기틀이 마련된다.

1.5.3.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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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의 모습을 조선 사신들이 그린 것. 보다시피 조선과 명의 관복과 매우 유사하다.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시기에 입던 관복이다. 베트남의 단령은 베트남의 더운 날씨 때문에 한국, 중국의 단령보다 아랫단이 짧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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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시기 단령 사진. 이전의 후레 왕조 시기와 비교해 보면 관복에 문양을 수놓는 등 굉장히 화려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략해 캄보디아 왕족, 고관들에게 단령을 하사하며 단령 착용을 강요하기도 했다.

1.5.4. 류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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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 17세기 초 류큐 국왕이었던 쇼네이 왕어진. 왕의 곁에 서 있는 관리들의 복식을 보면 역시 중국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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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쇼쿄왕자의 초상화
이를 보면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중국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첫 번째기사에서 언급된 류큐 왕국의 풍속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궁에서는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사모와 단령 일습을 갖추었다고 언급된 것을 보아 조공무역을 통해 명나라에서 다량으로 하사받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로 가는 사신단인 에도노보리(江戸上り)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에서도 적지 않게 보이는 단령 차림의 사신과 무용수의 모습을 보아 명나라 멸망 후에도 예복/무대의상으로 자체적으로 제작해 입었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5.5. 같이보기



2. 천랑열전의 등장인물 단령(천랑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