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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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 중 어여머리를 한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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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가가의 가체
加髢
동양권 국가에서 여성들이 치장을 위해 가발을 머리 위에 얹은 것으로,[1] 다리 혹은 다래라고도 한다. 가체가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가체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조선 성종 때에는 30cm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들어서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한것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을 두채에서 수채 정도는 구입가능하고 노비를 수십명씩 구할수있는 금액이었다'''. 현대로 치면 최소 수십억원에 달하는 사치품이었던 것.[3] 그리고 여간 무거운 게 아니라서 어린 여성이 가체 때문에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4][5] 또한 가체가 필수 혼수용품으로 자리잡다보니 비싼 가체를 혼수품으로 마련하느냐고 가산을 탕진하거나 집이 너무도 가난하다보니 가체를 마련하지 못해서 딸을 시집못보내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 처럼 가격이 비싸져서 가계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고 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는데다가 무게가 무거운 가체는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로 안전성에 있어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으로 자리매김 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56년에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기본 쪽머리와 족두리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번에는 족두리에 별의 별 보석으로 장식하여 사치스럽게 만드는 족두리가 유행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하였고 결국 7년만에 가체를 다시 허용했다.
이후 1788년 정조 때 다시 강력히 단속했지만 이는 '''왕실 한정'''. 실질적으로 머리에 얹는 형태의 가체는 순조 때에나 가서야 대례식 한정으로 착용하게 된다. 이후 쪽머리가 유행하면서 본인의 땋은 머리를 가체와 함께 이어 크게 쪽을 지고 뒷꽂이 등과 비녀로 장식했다.
왕실 여인들은 생일 연회와 대례식 이외의 일상이나 소례때는 첩지를 두르고, 그 첩지 위에 화관이나 칠보족두리를 썼으며, 궁녀들은 민족두리를 썼다. 양반가 여인들 역시 얹는 가체 대신 이어붙이는 가체로 쪽을 지고, 비녀와 뒷꽂이로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이를 대체했다.
위에서도 서술되었듯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역사상으로도 목뼈 골절 및 사망한 사례가 있었을 정도라,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출연진들이 심한 고통을 호소하거나 목디스크를 겪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 가체의 3분의 1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인조 가체로 대체하거나[6] 기생 역을 제외하면 고증 오류 지적을 감수하더라도 출연진들의 건강을 위하여 없애버리기도 한다.[7] 중화권 사극으로 치면 전족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안 나오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정장은 가체로 완성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머리에 얹고 나갔다. 드라마에서 주모나 기생이 항상 머리에 가체를 얹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가체는 대부분 남자 머리카락이었다고 한다. 진짜 진짜 급한 일이 아닌 한 여자들이 목숨만큼 귀한 자기 머리를 잘라 파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남자들이 머리를 잘라 팔았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나 그렇게 한 게 아니고 특정 지역 남자들이 몇 년 간 잘 관리하며 길렀다가 팔았는데 그래야만 품질이 좋은 가체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남자들이야 상투를 틀 때 사사로이 배코를 냈으니....
가체가 이리도 비싼 건 재료부터도 장난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재료인 머리카락부터도 몇년을 자연적으로 기른 머리카락이니 공급도 적지만 넣은 재료만 봐도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진사, 주사, 마사, 홍향사, 연지, 소금, 참기름 등을 썼으며 이처럼 다양한 성분 분말로 만든 용액에 수거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탈색했다. 당연히 이것도 며칠이 걸린다. 저 머리칼은 곱슬머리와 직모, 갈색과 검은색 등 모질과 색이 제각각이었기에 따로따로 검정색으로 탈색해야 했다.
당주홍만 해도 중국에서 전량 수입해온 광물과 수은(?!)을 섞어 만든 재료인데 광해군일기에서는 너무 비싸다고 나올 정도였다. 조선에서 당주홍은 1근당 5냥으로 일반 서민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거기에 역시 중국에서 들어온 주사와 진사, 마사같은 광물도 제법 비쌌으며 홍합사와 황밀같은 한약성분에서 여러 모로 만들고 넣고 하는 시간과 노력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화장품으로 많이 쓰던 연지와 홍향사도 준비하자면 까다로왔다. 조선 후기 이덕무가 편찬한 『청장관전서』에서 연지의 사용방법이 확인된다. “연지벌레를 물에 넣어 잠깐 동안 담갔다가 두 개의 붓대로 마치 염색할 때 베를 쥐어짜듯 진한 즙을 짜내어서 푹 말려 둔 것인데, 미지근한 물에 개어서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같은 책의 내용 가운데 “육홍색肉紅色은 분粉을 주료主料로 연지를 넣어 조제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연지가 단청색채가운데 육색肉色을 조채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연지는 그래도 싼 편으로 1근에 5전~8전 정도했다고 한다.
물론 저것들은 최고급 가체 재료들이고 싸구려 가체는 대체할 싼 재료를 썼다. 여기선 번주홍이라고 하는 당주홍 대체품을 넣었는데 번주홍은 조선에서 캐낸 광물을 갈아 만든 것이라 1근에 30전 정도로 당주홍보다 몇 십배나 쌌다. 재료비부터도 결코 싼 돈이 아니며 가체 하나에도 여러 남자 머리칼을 쓰니 무게도 그만큼 늘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체장이라고 불리우는 장인들이 만드는데 워낙 비싸고 재료비부터도 비싸기에 비싼 가체를 만들자면 30년 이상 경력를 인정받은 고수 장인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천일야사에서 묘사된 가체장의 삶과 여인들의 가체 경쟁. 고급 가체를 얹어야지만 남자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대사를 통해서 당시 시대상과 가체장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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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세자빈이 대례때 쓰던 가체로, 병자호란으로 명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된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새 왕과 왕비가 즉위할 때 마다 명나라에서 하사한 적관(翟冠), 특히 친왕비(親王妃)의 '''칠적관(七翟冠)'''을 썼으나 명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면서 칠적관을 받아올 수도 없고 익선관과는 달리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국의 예제로 격상하면서 황후와 황태자비의 수식(首飾)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황후의 구봉관(九鳳冠)을 쓰는 것으로 <대한예전>에 명시하고 이를 삽화로도 남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대수를 얹었다. 구봉관 또한 칠적관처럼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명나라가 멸망한지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한족식 황실 의상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실전되기도 했으니 말이다.[9]
'''현대의 미디어매체나 행사에서처럼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턱밑에 끈을 묶어 고정하는 것이 아니며, 영친왕비의 적의 사진과 이건의 부인 마츠다이라 요시코의 명복원삼 사진, 그리고 의친왕비의 명복원삼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머리 위에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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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준으로, 가르마를 타 쪽을 진 머리에 솜족두리를 얹고, 그 위에 땋은 가체를 둘러 동그랗게 얹은 머리로, 내명부와 사대부 여인들이 착용한다. 눈과 같은 높이의 양 옆에 떨잠을 꽂고, 족두리 위에는 보통 나비잠을 단다. 다른 비녀나 장신구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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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머리라고도 하는 가체모양의 나무틀을 어여머리 위에 올리고, 틀을 머리에 고정시키는 떠구지라는 비녀를 꽂았다. 본래 큰머리는 어여머리와 같이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지만, 1779년 사치를 막기위해 내린 정조의 명령으로 인해 왕실 여인들의 것을 제외한 상궁과 궁녀들의 것은 나무로 만들어지게 된다.
시대 불문하고 왕비, 대비 ,세자빈의 떠구지는 가체로 만들었다.
떠구지가 나무틀이 아닌 비녀라는 사실은 밝혀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책을 보면 다른 정보가 있을 수 있다.
헌종과 경빈 김씨의 가례에 관한 책인 정미가례시일기(丁未嘉禮時日記)에서 언급된 머리. 첩지를 올리고, 머리를 좌우 두갈래로 가체와 함께 땋아 양옆으로 둥글게 붙여 칠보와 댕기로 치장했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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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머리라고도 하며 보통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살만한 서민들이나 기생들[12] 이 주로 했던 머리로, 가체를 진짜 머리카락과 함께 하나로 연결해 땋아 내린것을 머리위에 틀어 올리거나 가체 한단을 두르고 더 굵은걸 위에 얹어 댕기로 고정시켰다.
가체 중 어여머리를 한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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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가가의 가체
1. 개요
加髢
동양권 국가에서 여성들이 치장을 위해 가발을 머리 위에 얹은 것으로,[1] 다리 혹은 다래라고도 한다. 가체가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2. 상세
가체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조선 성종 때에는 30cm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들어서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한것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을 두채에서 수채 정도는 구입가능하고 노비를 수십명씩 구할수있는 금액이었다'''. 현대로 치면 최소 수십억원에 달하는 사치품이었던 것.[3] 그리고 여간 무거운 게 아니라서 어린 여성이 가체 때문에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4][5] 또한 가체가 필수 혼수용품으로 자리잡다보니 비싼 가체를 혼수품으로 마련하느냐고 가산을 탕진하거나 집이 너무도 가난하다보니 가체를 마련하지 못해서 딸을 시집못보내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 처럼 가격이 비싸져서 가계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고 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는데다가 무게가 무거운 가체는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로 안전성에 있어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으로 자리매김 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56년에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기본 쪽머리와 족두리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번에는 족두리에 별의 별 보석으로 장식하여 사치스럽게 만드는 족두리가 유행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하였고 결국 7년만에 가체를 다시 허용했다.
이후 1788년 정조 때 다시 강력히 단속했지만 이는 '''왕실 한정'''. 실질적으로 머리에 얹는 형태의 가체는 순조 때에나 가서야 대례식 한정으로 착용하게 된다. 이후 쪽머리가 유행하면서 본인의 땋은 머리를 가체와 함께 이어 크게 쪽을 지고 뒷꽂이 등과 비녀로 장식했다.
왕실 여인들은 생일 연회와 대례식 이외의 일상이나 소례때는 첩지를 두르고, 그 첩지 위에 화관이나 칠보족두리를 썼으며, 궁녀들은 민족두리를 썼다. 양반가 여인들 역시 얹는 가체 대신 이어붙이는 가체로 쪽을 지고, 비녀와 뒷꽂이로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이를 대체했다.
위에서도 서술되었듯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역사상으로도 목뼈 골절 및 사망한 사례가 있었을 정도라,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출연진들이 심한 고통을 호소하거나 목디스크를 겪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 가체의 3분의 1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인조 가체로 대체하거나[6] 기생 역을 제외하면 고증 오류 지적을 감수하더라도 출연진들의 건강을 위하여 없애버리기도 한다.[7] 중화권 사극으로 치면 전족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안 나오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정장은 가체로 완성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머리에 얹고 나갔다. 드라마에서 주모나 기생이 항상 머리에 가체를 얹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가체는 대부분 남자 머리카락이었다고 한다. 진짜 진짜 급한 일이 아닌 한 여자들이 목숨만큼 귀한 자기 머리를 잘라 파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남자들이 머리를 잘라 팔았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나 그렇게 한 게 아니고 특정 지역 남자들이 몇 년 간 잘 관리하며 길렀다가 팔았는데 그래야만 품질이 좋은 가체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남자들이야 상투를 틀 때 사사로이 배코를 냈으니....
가체가 이리도 비싼 건 재료부터도 장난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재료인 머리카락부터도 몇년을 자연적으로 기른 머리카락이니 공급도 적지만 넣은 재료만 봐도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진사, 주사, 마사, 홍향사, 연지, 소금, 참기름 등을 썼으며 이처럼 다양한 성분 분말로 만든 용액에 수거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탈색했다. 당연히 이것도 며칠이 걸린다. 저 머리칼은 곱슬머리와 직모, 갈색과 검은색 등 모질과 색이 제각각이었기에 따로따로 검정색으로 탈색해야 했다.
당주홍만 해도 중국에서 전량 수입해온 광물과 수은(?!)을 섞어 만든 재료인데 광해군일기에서는 너무 비싸다고 나올 정도였다. 조선에서 당주홍은 1근당 5냥으로 일반 서민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거기에 역시 중국에서 들어온 주사와 진사, 마사같은 광물도 제법 비쌌으며 홍합사와 황밀같은 한약성분에서 여러 모로 만들고 넣고 하는 시간과 노력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화장품으로 많이 쓰던 연지와 홍향사도 준비하자면 까다로왔다. 조선 후기 이덕무가 편찬한 『청장관전서』에서 연지의 사용방법이 확인된다. “연지벌레를 물에 넣어 잠깐 동안 담갔다가 두 개의 붓대로 마치 염색할 때 베를 쥐어짜듯 진한 즙을 짜내어서 푹 말려 둔 것인데, 미지근한 물에 개어서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같은 책의 내용 가운데 “육홍색肉紅色은 분粉을 주료主料로 연지를 넣어 조제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연지가 단청색채가운데 육색肉色을 조채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연지는 그래도 싼 편으로 1근에 5전~8전 정도했다고 한다.
물론 저것들은 최고급 가체 재료들이고 싸구려 가체는 대체할 싼 재료를 썼다. 여기선 번주홍이라고 하는 당주홍 대체품을 넣었는데 번주홍은 조선에서 캐낸 광물을 갈아 만든 것이라 1근에 30전 정도로 당주홍보다 몇 십배나 쌌다. 재료비부터도 결코 싼 돈이 아니며 가체 하나에도 여러 남자 머리칼을 쓰니 무게도 그만큼 늘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체장이라고 불리우는 장인들이 만드는데 워낙 비싸고 재료비부터도 비싸기에 비싼 가체를 만들자면 30년 이상 경력를 인정받은 고수 장인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천일야사에서 묘사된 가체장의 삶과 여인들의 가체 경쟁. 고급 가체를 얹어야지만 남자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대사를 통해서 당시 시대상과 가체장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3. 종류
3.1.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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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왕비와 세자빈이 대례때 쓰던 가체로, 병자호란으로 명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된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새 왕과 왕비가 즉위할 때 마다 명나라에서 하사한 적관(翟冠), 특히 친왕비(親王妃)의 '''칠적관(七翟冠)'''을 썼으나 명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면서 칠적관을 받아올 수도 없고 익선관과는 달리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국의 예제로 격상하면서 황후와 황태자비의 수식(首飾)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황후의 구봉관(九鳳冠)을 쓰는 것으로 <대한예전>에 명시하고 이를 삽화로도 남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대수를 얹었다. 구봉관 또한 칠적관처럼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명나라가 멸망한지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한족식 황실 의상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실전되기도 했으니 말이다.[9]
'''현대의 미디어매체나 행사에서처럼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턱밑에 끈을 묶어 고정하는 것이 아니며, 영친왕비의 적의 사진과 이건의 부인 마츠다이라 요시코의 명복원삼 사진, 그리고 의친왕비의 명복원삼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머리 위에 얹었다'''.
3.2. 어여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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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선 후기 기준으로, 가르마를 타 쪽을 진 머리에 솜족두리를 얹고, 그 위에 땋은 가체를 둘러 동그랗게 얹은 머리로, 내명부와 사대부 여인들이 착용한다. 눈과 같은 높이의 양 옆에 떨잠을 꽂고, 족두리 위에는 보통 나비잠을 단다. 다른 비녀나 장신구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3.3. 떠구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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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큰머리라고도 하는 가체모양의 나무틀을 어여머리 위에 올리고, 틀을 머리에 고정시키는 떠구지라는 비녀를 꽂았다. 본래 큰머리는 어여머리와 같이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지만, 1779년 사치를 막기위해 내린 정조의 명령으로 인해 왕실 여인들의 것을 제외한 상궁과 궁녀들의 것은 나무로 만들어지게 된다.
시대 불문하고 왕비, 대비 ,세자빈의 떠구지는 가체로 만들었다.
떠구지가 나무틀이 아닌 비녀라는 사실은 밝혀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책을 보면 다른 정보가 있을 수 있다.
3.4. 가래머리
헌종과 경빈 김씨의 가례에 관한 책인 정미가례시일기(丁未嘉禮時日記)에서 언급된 머리. 첩지를 올리고, 머리를 좌우 두갈래로 가체와 함께 땋아 양옆으로 둥글게 붙여 칠보와 댕기로 치장했다.출처
3.5. 얹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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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머리라고도 하며 보통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살만한 서민들이나 기생들[12] 이 주로 했던 머리로, 가체를 진짜 머리카락과 함께 하나로 연결해 땋아 내린것을 머리위에 틀어 올리거나 가체 한단을 두르고 더 굵은걸 위에 얹어 댕기로 고정시켰다.
[1] 보통 옆머리 라인을 기준선으로 해서 옆으로 둥그렇게 감싸는 식이다.[2] 당나라도 이런 가체와 여러 장신구를 이용해 화려하게 머리를 꾸미는게 유행했다.[3] 네이버 웹툰 중 조선홍보대행사 조대박 에피소드 중에 비싼 가체 없인 결혼 못 간다고 벼르던 아가씨들의 일화에서 이게 적나리하게 드러난다. 집 두 채만한 가체 값을 구할 수 없으니 가체 구할 때까지 자살 소동을 동원해가며 부모님을 졸라대려던건 물론, 아예 결혼까지 3~4년 정도 미뤄두고 있던 상황(…)[4]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자 놀라 갑자기 일어나던 며느리가 목뼈가 부러져 죽는 사건도 있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시어머니에게 인사드리러 가던 어린 새색시가 목을 숙이다가 부러져 죽었다고도 한다.[5] 출처 - 이덕무, 청정관전서 30권[6] 다만 아무래도 실제 가체보다는 모양이 자연스럽지가 않다는듯[7] 다만 조선 전기인 임진왜란 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에선 저고리는 여전히 많이 짧아도 가체는 대체로 많이 나오는 편이다.[8] 사진속 배우는 채시라. 해당 장면은 2015년 6월 17일에 열린 해비타드 여성 집짓기 건축기금 마련 패션쇼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 청나라를 멸망시킨 위안스카이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중화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때 한족식 대례복을 입고 면류관을 썼는데, 이 때 대례복도 실제 한족 왕조 시절에 비하면 매우 어색했으며 면류관 또한 황제가 쓰지 않는 무류관이었다. 이 또한 청나라 치하에서 한족식 황실 의상을 만드는 기술이 실전된 탓이다.[10] 사진속 배우는 전인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캡쳐한 장면으로 보인다.[11] 드라마 여인천하의 한 장면으로,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차례로 창빈 안씨, 희빈 홍씨, 경빈 박씨를 연기한 최정원, 김민희, 도지원이다.[12] 주로 양반들과 왕족들을 상대했던 일패와 이패 기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