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

 

흉배(胸背)
1. 개요
2. 한국 역사
2.1. 조선
3. 중국 역사
3.1. 명나라


1. 개요


동아시아 문화권의 고대, 중세, 근대 초반까지 문무백관들의 관복의 장식. 관복의 복부 부분에 장식을 새긴 이 흉배는 각 관리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2. 한국 역사



2.1. 조선


세종 대에 영의정 황희의 강한 반대로[1] 흉배를 사용하지 않다가 단종 2년에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따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常服)에도 흉배를 달게 되었는데, 대군기린, (왕자)군은 백택, 도통사는 사자, 대사헌은 해치,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 3품은 백한, 무관 1, 2품은 호표, 3품은 웅비를 달도록 규정했다. 명나라 사신과 관복이 똑같아져 구별이 힘드니 개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의 인물인 신숙주 초상화를 보면 흉배를 단령에 직접 수놓거나 무늬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연산군 대에 모든 품계의 관원들이 흉배를 달게 되었는데, 이때는 흉배를 별도로 만들어 옷에 다는 방식이 되었고 사용된 동물도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 명나라와 다른 자주성을 보이게 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무신의 흉배에 비금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를,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달도록 했다. 그러다 고종 대에 문관 당상관은 쌍학(학 두 마리), 당하관은 단학(학 한 마리)을 달고, 무관 당상관은 쌍호(호랑이 두 마리), 당하관은 단호(호랑이 한마리),하지만 흉배를 다는 것은 관복 중에서도 정복 개념인 상복에만 달았고, 일상 집무시에 입는 시복는 흉배를 달지 않았다.
임금의 곤룡포에는 용보를 달았는데 다른 흉배가 해당 동물 본연의 색으로 짠 것과는 달리 금실로 짰다. 임금과 왕후의 것은 흉배라고 하지 않고 용보라는 용어로 불렀다. 어진과 유물을 보면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용이 정면에서 보면 왼쪽을 바라보는 측면상이었다가, 명나라 멸망 후에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상으로 변화하였다.
참고자료

3. 중국 역사



3.1. 명나라


[image]
황제의 곤룡포에는 용보를 3개나 부착했다. 자세히 보면 용보 속의 용이 머리를 향하는 위치가 전부 다르다. 맨 위의 용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2]

[1]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 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니며, 존비등위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굳이 흉배를 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2] 평상시 입는 곤룡포가 아닌 국가 제례때 입을수 있게 만든 곤복형 곤룡포다 명나라 후기엔 기존 곤복 보단 곤복형식의 곤룡포로 제례용 복장이 바뀐것으로 추정된다. 평시에는 조선처런 용보가 4개 또는 민무늬 아니면 옷전체서 용무늬가 수놓인 다양한 곤룡포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