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集賢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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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경복궁에 있는 수정전으로, 이 수정전이 있던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
1. 개요
2. 업적(조선시대)
3. 집현전의 관직
4. 기타 매체에서
5. 유사기구
5.1. 한국
5.1.1. 국립
5.1.2. 사립
5.2. 외국
6. 같이보기


1. 개요


고려조선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한국개발연구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KDI에서도 스스로를 집현전의 후예로 자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전한, 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현종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를 두어 경적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확대, 개편하였다.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훈민정음(한글)을 집현전 학사들이 만들었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거든 것이고 세종의 주도하에 문종과 다른 왕족들이 주로 참여한 것이 정설이다.[2] 아니라면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되어도 겸직인 윗 관직들을 제외한 최상위 보스인 부제학 최만리가 몰랐을 리가 없다. 다시말해 세종대왕이 저질러 놓으면 집현전 학사들이 뒷수습하는 모양새.
하지만 문자도 그렇고 어떠한 것이건 간에 언어는 남기면 뒷수습을 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몽골은 파스파 문자가 있었음에도 그 문자에 대한 뒷처리가 큰 성과를 못거두어서 현재 몽골조차도 이 문자를 쓰지 않는다.
더구나 집현전 배제론은 애시당초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집현전을 파하자 만들어낸 이론이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현전에 소속된 인물들의 이름을 보자면, 정인지,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최항… 당대의 천재들은 다 모였다. 그야말로 드림팀.
이후에 1456년(세조 1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비롯한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음력 6월 6일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시키면서, 집현전에 소장한 책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때와 달리 집현전의 실적은 저조했는데 심지어 소속된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1460년(세조 5년) 음력 5월 22일에는 이조에서 사관 선임 규정을 강화하고, 경연, 집현전, 보문각 등은 직함이 비고 직임이 없으니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이로써 집현전은 완전히 폐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종이 친정을 행한 이후인 성종 9년(1478년) 음력 3월 19일 집현전에 의거해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이후 연산군때에는 흥청의 집으로 사용되었다. 즉, '''기생의 집'''으로 쓰였다.
한편, 집현전을 'Jade Hall'이라고 영역(英譯)한 사례를 종종 접할 수 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 집현전이 재개편된 '홍문관'의 별칭이 '옥당(玉堂)'이었기 때문. 'Jade Hall'은 '옥당'을 직역한 표현이다. 참조 링크.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Hall of Worthies라고 되있다.

2. 업적(조선시대)


조선시대 세조에 의해 폐지당하기 전까지 집현전은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16명, 2등이 6명, 3등이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과거에서 5등 안에 합격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의 최고인재들이 모여있는 기관이였다. 때문에 조선의 집현전은 15세기 학술 연구의 큰 축이 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 고제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이 되는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며 여러 서적들을 참조, 당시의 현실에 맞는 사례들을 수집하고 정리
  •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 전개
  •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 수행.
  •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등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가 대표적. 그외에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도 편찬했다. 때문에 장기간 수행하는 과제를 부여되고 완수하는 양상이 많았으며 이에 일부에선 집현전을 조선의 학술/연구기관으로 꼽는다.
집현전과 같은 기관의 필요성은 이후 몇몇 뛰어난 임금들에게 인식되어 집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성종대의 홍문관이나 정조대의 규장각이 탄생하게 된다.

3. 집현전의 관직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1품
영전사
2명
겸직
종1품



정2품
대제학
2명
겸직
종2품
제학
2명
겸직
정3품
부제학(당상관)
1명

종3품
직제학
1명

정4품
직전
1명

종4품
응교
1명

정5품
교리
1명
부검토를 겸임
종5품
부교리
1명
부검토를 겸임
정6품
수찬
1명
부검토를 겸임
종6품
부수찬
1명
부검토를 겸임
정7품
박사
1명

종7품



정8품
저작
1명

종8품



정9품
정자
1명

종9품




4. 기타 매체에서


한국의 Decision에 나온다. 능력치는 존재 가치가 없는 수준. 문화력을 0.01씩 증가시켜주는 정책인데, 사용할 때 드는 50두캇이 3.142배는 더 아깝다. 왜냐하면 문화력이 정말로 남아돌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토가 작고 기술개발속도는 거북이라서 행정관이 나올 때마다 0.05문화력으로 갈아넣는데, 대체 0.01이 무슨 소용일까? 심지어 사용하는데 3행정관까지 소모되며, 영구적이지도 않다.
전작처럼 50두캇을 지불하나 효과는 매년 위신 +0.5에 게임종료까지 적용되게 바뀌었다.
한국의 문명 특성으로 나오는데, 모든 전문가와 위인 시설이 매 턴 과학력 2를 추가로 제공하며 수도에서 과학과 관련된 건물을 지을 때마다 과학력을 얻는 것. 이 덕분에 연구가 미칠듯이 빨라서, 남들이 석궁 쏠 때 혼자서 총 쏘고 다닐 수 있다. 이 밖에 플레이어에게 선전포고를 할 때 세종의 대사[3]에도 나오는데, 학문 연구 및 자문 기관이라 조언이나 자문 정도는 몰라도 선전포고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5. 유사기구



5.1. 한국



5.1.1. 국립



5.1.2. 사립



5.2. 외국



6. 같이보기


[1] 실제로도 북궐도형을 보면 이 건물 앞에 궐내각사가 쫙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2] 다만 중국의 음운학자인 황운을 요동의 귀양지까지 만나고 온 신숙주 같은 경우도 있다.[3] '네놈의 성가신 행패를 집현전은 더는 용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