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페이턴
1. 개요
전직 미식축구 선수, 포지션은 러닝백.
'''NFL 역사상 최고의 러닝백 중 한명'''
오로지 시카고 베어스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원 클럽 플레이어로, 전성기 시절에는 혼자서 팀의 오펜스의 60%를 차지했을 만큼 매우 뛰어난 러닝백이었다.
2. 프로 전 경력
보이스카우트, 리틀리그 야구, 동네 교회에서 활동하고 고교 입학 후 학교 고적대에서 드럼을 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1학년(Junior)때 미식축구를 시작했다. 비록 178cm의 작은 체구지만 스피드와 체력이 월등하여 기량이 급성장했다. 그러나 SEC 학교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 못하고[1] 전통적인 흑인 학교였던 Jackson State Univ.에 입학해 신문방송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칼리지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3. NFL
1975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순위로 시카고 베어스에 지명됐다.[2]
수상 경력을 일일이 열거하기 많을 만큼 맹활약했고 1984년 9월 19일에 당시 통산 최다 러싱야드 기록(짐 브라운의 12,312야드)을 경신했다. 1987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1993년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당연히 그의 등번호인 34번은 영구결번됐다.
4. 은퇴 후
은퇴 이후 1995년 NFL에서 리그 확장을 할때 본인이 세인트루이스에 신생팀을 세우려 했지만 잭슨빌와 샬럿에 밀려 창단에 실패했으며[3] 그리고 4년 뒤 1999년 2월 원발 경화성 담관염의 증세로 담관암 투병을 시작했으며 1999년 4월 12일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커브스의 개막전에서 시구를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1999년 11월 1일 월터의 사망을 아들인 자렛 페이튼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1999년 11월 5일 일리노이 주 배링턴의 한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뤘으며 감독이었던 마이크 딧카와 존 매든(NFL 코치, 해설가) 등이 참석했다. 그 다음날 그가 항상 뛰어다녔던 솔저 필드에서 미망인 코니 페이튼, 딸 브리트니 페이튼 등 가족들과 2만명의 팬이 운집한 가운데 추모행사를 가졌다. 베어스 팬들을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의 동상을 솔저 필드 앞에 제막하여 지금도 그를 추모하고 있다.
5. 여담
하지만 경기에서의 압도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인성이 대단히 훌륭했던 선수이며, 그 덕분에 별명이 다름아닌 '''Sweetness'''였다.[4]
그래서 그의 매너를 따서 만든 상이 바로 '''월터 페이턴 상(Walter Payton Award)'''이다.[5]
삶의 좌우명은 "Never Die Easy"였으며 그의 자서전 제목도 동일하다.
[1] 아주 적은 수의 흑인 선수만 받아들이던 때였다.[2] 이 해 드래프트는 이틀에 걸쳐 17라운드까지 진행됐으며 부머 웰즈는 뉴욕 제츠에 16라운드에 지명됐으나 미식축구 커리어를 접고 야구 쪽으로 발길을 돌려 일본프로야구에서 강타자로 활약했다.[3] 만약 창단에 성공했으면 NFL 선수 최초의 NFL 구단주가 될 뻔했다. 그리고 그 해 램스가 세인트루이스로 연고지를 이동하면서 세인트루이스 램스가 된다.[4] 그의 인성에서 이 별명이 유래됐다고 잘 알려져 있으나 그의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냉소적으로 부르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5] 주요 수상자로 일라이 매닝, 래리 피츠제럴드, JJ 왓등이 있다.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는 비슷한 상으로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