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머 웰즈
1. 개요
과거 1980년대 MLB, NPB에서 뛴 前 프로야구 선수.
1980년대 한큐 브레이브스 등지에서 활약하며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무엇보다도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초 외국인 타격 삼관왕''' 수상자이기도 한 비범한 인물이다.
2. 선수 시절
2.1. 메이저리그 시절
원래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으며, 1975년 NFL 드래프트 16라운드 405위로[1] 뉴욕 제츠에 지명받았으나 데뷔까지 이르진 못한다.
그 후 야구선수로 전향하여 197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 이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198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1982년 미네소타 트윈스 선수로 메이저리그 문턱을 밟게 되나, 이렇다할 성적은 남기지 못한채 1983년 일본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그를 떠나게 되었다.[2]
...그리고 그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다.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47시합 출장. 127타수 29안타 0홈런 0도루 8타점 2희생플라이 6사사구 20삼진. 타율 .228/출루율 .259'''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일본 진출 첫 해였던 1983년엔 17홈런 62타점의 평범한 성적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 .304를 기록하며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괴물로 각성하는데..
1984년 시즌. 부머는 무려 '''482타수 171안타/37홈런/130타점/타율 .355'''라는 충공깽스런 성적을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초 외국인 삼관왕'''에 자리에 오름[3][4] 과 동시에, 그해 한큐 브레이브스가 6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겸 한큐 시대 최후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며 이해 '''퍼시픽리그 MVP'''까지 수상하게 된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서는 28타수 6안타 타율 .214, 0홈런 3타점으로 죽을 쑤는 바람에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도 부머는 1985/86년 2년 연속으로 173안타를 찍으며 2년 연속 최다안타를 기록.[5] 1987년 119타점으로 타점왕 수상. 그 외에도 1984~87년 4년 연속 3할/30홈런/100타점 등의 기록을 남기며 한큐 브레이브스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로 맹활약했다. 특히나 1988년 7월 13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대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선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상대로 무려 '''비거리 162M'''라는 초대형 홈런을 날리며 (낙하지점이 확인된 홈런으로써는) 일본 최고 비거리 홈런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한큐 구단이 오릭스에 매각되면서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이름이 바뀐 첫해인 1989년에도 그는 계속해서 맹활약하며 '''165안타'''/'''타율 .322'''/40홈런/'''124타점''' 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수위타자와 타점왕을 획득했고 최다안타 기록까지 찍게 된다. 그러나 이해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 기록인 '''34병살타'''까지 찍는 불명예스런 기록까지 찍은 흑역사가 있고(...) 아래 나올 "모종의 사건" 의 가해자(??)가 되어 이해 팀의 리그 우승 실패에 본의 아니게 일조하고 만다(...)
이후 팀이 고베로 연고이전해 오릭스 블루웨이브 이름을 바꾼 후에도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다가, 1992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해, 이적 첫해 97타점으로 타점왕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지만, 시즌 후반 극심한 부진에 빠진 것 등 때문에 결국 이해 시즌 종료 후 일본을 떠나면서 현역에서 은퇴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1148시합 출장. 4451타수 1413안타 277홈런 901타점 18도루 50희생플라이 414사사구 333삼진. 타율 .317/출루율 .372'''이며, 타율 .317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5위의 기록이다. 타이틀 수상은 '''수위타자 2회/홈런왕 1회/타점왕 4회/최다안타 기록 4회/베스트나인 1루수 부문 4회/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2회/MVP 1회'''가 있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엔 에이전트로써 일하며, 나이젤 윌슨[6] 등의 일본진출을 이끌었으며, 2012년 6월 2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즈 VS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7] 에서 과거 한큐 시절의 유니폼을 입고 시구식을 가지기도 했다.
4. 기타
- 현역 시절 무려 200cm(!!!)/100kg의 거구였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여러 있다. 그 중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사건이 있는데, 1989년 9월 25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3회 말 홈런을 친 카도타 히로미츠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하이파이브를 했다가, 거구 때문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는지 세게 치는 바람에 카도타의 오른팔이 탈구(!!)되어버리는 끔찍한(...) 사태로 이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카도타는 잔여 시합에서 결장. 중심타자가 빠지면서 공격력이 악화된 오릭스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이해 불과 승률 1리 차로 리그 우승에 실패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3년뒤 후쿠오카에서 카도타와 동반은퇴했다.
- 롯데 오리온즈 전에서 데드볼을 맞고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 장면이 파스 CM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본인도 이 CM에 출연했는데, 데드볼을 맞고 투수에게 돌진하는 장면이 약국으로 달려가는 장면으로 편집되는 것이 여러모로 압권.
바로 이게 그 CM이다.
- 같은 시기 센트럴리그 최강의 외국인 선수였던 랜디 바스가 자신의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에 강한 애착을 가진 것처럼, 그도 한큐 브레이브스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92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한 원인엔 오릭스가 한큐 시절의 색채를 지우려고 한 것에 매우 불만을 품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오릭스 블루웨이브 초대 감독 도이 쇼조[8] 와의 불화도 원인이었는데, 그는 도이에 대해서 "도이 감독과 잘 지낸 선수는 한명도 없었다.","도이 감독은 나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도이 감독이 오고 난 후부터 팀이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팀은 이기지 못하게 되었고, 팬들도 점차 떠나갔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 현재, 딸이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 관련 문서
[1] 수정 전 16위로 기재됐으나 16라운드 405위가 맞으며 이 해 드래프트는 이틀간 17라운드까지 진행됐고 442명이 지명됐다. 1라운드 4순위로 시카고 베어스에 지명된 월터 페이튼은 NFL 명예의 전당 멤버다.[2] 원래는 한신에서 영입할 생각이었으나, 한신은 좌타자를 뽑기 위해 다른 선수로 선회했다. 부머의 활약을 보면 류거이같은 사례로 보이지만 한신의 안목도 틀렸던 것이 아닌게 그 좌타자도 부머처럼 트리플 크라운을 땄으며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타율을 찍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터졌다.[3] 사실 정확히는 최다안타, 최다승리타점(결승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상으로, 현재는 폐지되었다)도 포함한 5관왕이었으나, 당시엔 최다안타는 수상항목이 아니었다. 1994년부터 수상. 최다승리타점은 현재 폐지된 것도 그렇고, 삼관왕 등에 끼워넣긴 좀 애매한지라..[4] 이듬해엔 랜디 바스가 센트럴리그 최초로 외국인 선수 삼관왕이 된다.[5] 특히 1986년엔 타율 .350을 기록하여 외견상 타격왕도 충분히 탈수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롯데 오리온즈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무려 '''타율 .360/50홈런/116타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2년 연속 삼관왕(...)'''을 수상하면서 부머는 군침만 다시며 물러나야 했다.[6] 97~98년 홈런왕[7] 이날 시합은 오릭스 팀이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의 유니폼을 입는 유니폼 데이였다.[8] 도이는 부머 외에도 스즈키 이치로, 타구치 소와도 불화를 일으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