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민왕

 


'''위(魏)씨 가문 14대 종주
위(魏)나라 7대 국군
5대 왕
경민왕
景閔王
'''
''''''
희(姬)
''''''
위(魏)
''''''
증(增) / 오(午)
'''아버지'''
위안희왕(魏安釐王) 위어(魏圉)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2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242년 ~ 기원전 228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치세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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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위나라 제7대 군주. 제5대 왕. 이름은 증(增). 다른 이름은 오(午).

2. 생애



2.1. 즉위 이전


태자 시절에 진(秦)나라의 인질로 있다가, 위안희왕 30년(기원전 247년)에 신릉군이 하외에서 진나라를 격파하고 몽오를 쫓아버리자, 진장양왕이 증을 가두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태자 증을 위해서 왕에게 간언했다. 그가 말하길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해 증을 가두게 한 것은 공손희의 음모로, 오히려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제나라한나라로 하여금 위나라를 의심하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장양왕이 태자 증을 가두지 않았다.
위경민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위안희왕 34년(기원전 243년)에는 산조, 연읍, 허읍, 옹구, 산양 등 30여 개의 성을 빼앗겼다. 그 뒤 경민왕이 위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진나라에게 여러 차례 영토를 빼앗겼다.

2.2. 치세


위경민왕 원년(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조가(朝歌)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위(衛)나라가 도읍을 야왕(野王)으로 옮겼다.
위경민왕 2년(기원전 241년), 진나라에게 급읍(汲邑)을 빼앗겼다. 이때 어떤 사람이 친정에 대비해서 경계령을 내리고, 10일 이내에 출병 준비를 끝내지 못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선포를 하라고 했다. 그 사람이 초나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는데, 춘신군이 10일 이내에 수만 명의 군사를 위나라에 보내겠다고 하자 진나라에서 이 일을 알고, 초나라와 위나라가 연합할 것을 우려해 사자를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할 생각이 없으니 굳이 초나라의 군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위경민왕 3년(기원전 240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자, 어떤 사람이 진나라 내부가 노애(嫪毐)의 파벌과 여불위(呂不韋)의 파벌로 나눠져 있으니 땅을 진나라에 바쳐 이를 노애의 공으로 삼아, 그의 위치를 굳건히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조치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왕이 노애가 오래 못간다고 판단하여 그러지 않은 듯하니, 판을 읽는 능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경민왕 5년(기원전 238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원읍(垣邑), 포양(蒲陽), 연읍(衍邑) 땅을 차지했다.
위경민왕 12년(기원전 231년), 경민왕이 진나라에 땅을 바치니, 진나라는 거기에 여읍을 두었다.
위경민왕 15년(기원전 228년), 경민왕이 사망하고, 아들 위가(魏假)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왕 가다.


3. 대중매체에서



3.1. 킹덤


진군이 위나라의 땅인 산양을 노리고 쳐들어오자, 3년 동안 놀고 있던 염파를 보내 막게 한다. 명목상으로는 백귀서가 총대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염파가 혼자 치르다시피 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염파가 산양을 빼앗기자 그를 추방하고 만다.
처음 등장할 때는 진나라의 개들 운운하며 위엄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산양 공략전이 진행되며 다른 왕들에 비해 대가 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염파와 독대하던 중에 염파가 경민왕은 왕기를 모른다고 하자 움츠러들고, 윤호가 여전에 왕기의 방어를 뚫은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쥐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는 등, 반응하는 모습만 보면 왕족이 아니라 일반인에 가까운 소박한 면이 있다.
허나 한번 발탁한 사람은 전적으로 신뢰하며 최대한 지원하는, 이상적인 윗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을 지녔다. 겉모습만 보고 윤호를 못미더워 했지만, 윤호가 수백 명만 이끌고 진나라의 지휘관을 치러 갔다는 말을 듣자 자신에게 말만 했다면 수천 명도 기꺼이 내줬을 것이라며 염려하던 모습이 좋은 예.
패한 염파가 공적을 위해 위나라 병사들을 무리하게 희생시키는 대신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여 위나라에게 최선의 길을 택했음을 이해해 줬다. 조정에서 신하들이 염파는 그래도 패배했으니 이 책임을 물어 사형시키라는 의견을 내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염파를 추방하는 선에서 그치는 등, 왕다운 관대함은 확실히 지녔다.[1] 자존심 강하고 죽어도 전쟁터에서 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염파가 경민왕에게 엎드리다시피 사죄하며 경민왕의 명이라면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선언할 정도면, 적어도 인격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치우 유련을 처음 고용했다 감당이 안 돼서 쫓아냈다는 위왕이나 전 화룡칠사들을 오봉명의 부탁을 받고 풀어준 위왕도 경민왕으로 추정된다.

[1] 조나라의 재상이던 이목마저 합종군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한동안 전선에서 손에 흙을 묻히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도양왕이라면 속으로 이를 가는 이목마저도 참수당해도 할 말 없다고 인정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거에는 위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현재는 객장에 불과한 염파는 경민왕이 참수를 명해도 할 말 없는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파를 추방만 하면서도 사과까지 하는 경민왕은 관대한 것이 맞다. 사실,경민왕도 염파가 오히려 위나라를 위하여 잘해줬음을 알기에 용서하고 그대로 장군을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라고 조정에서 워낙에 염파를 참수하자는 주장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추방한 것. 경민왕의 태도나 얼굴만 봐도 마지못해 추방하면서 매우 아쉬워한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