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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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제31대 군주이자, 제5대 왕. 중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의 아버지. 휘는 이인(異人)이었다가[1] , 나중에 자초(子楚)로 개명한다. 재위기간은 BC 250년~ BC 247년으로 본명은 영이인(嬴異人)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영이인은 아버지 안국군 영주(安國君 嬴柱)와 어머니 하희(夏姬)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이인은 안국군 영주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 하희가 첩인 데다가 안국군의 관심도 받지 못했고, 이미 이복 형제들이 20명이 넘어서 영이인은 왕위 계승순위가 멀었다. 당시에 진나라는 법가 사상이 근본 사상이었는데, 한비자를 보면 알겠지만 성리학 못지 않은 정도로 적서 차별이 심한 사상이었다.
결국 영이인은 아버지가 진나라의 태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진나라에서는 방계 왕족 중의 먼 방계 왕족으로 취급받아서 다른 나라에 인질로 갔는데, 인질로 간 곳이 진나라와 툭하면 전쟁을 벌여서 목숨이 위험한 조(趙)나라였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도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영이인을 죽이려고 했다. 진나라도 태자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놓고 안심시킨 뒤에 전쟁을 벌이는 등 영이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이인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시기는 영이인의 당시 나이와 진시황이 태어난 시점(기원전 259년 음력 1월 15일)을 보면 적어도 장평대전(기원전 259년 음력 9월)이 일어나기 이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갔던 사실을 알 수 있고, 장평대전 이후로 영이인이 조나라에서 대우 받는 수준이 처참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거마를 타고 행차할 때도 충분치 못했고 거차하는 숙소는 곤궁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라고 묘사하여서 조나라에게 상당히 빈약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에 조나라 한단의 상인 여불위가 영이인을 보게 되었는데, 여불위는 영이인을 진기한 재화라 부르며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여불위가 영이인의 집을 찾아 온다. 이 자리에서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안국군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가라는 조언을 해주며, 오백금을 내면서 자금으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영이인은 "내가 왕이 되면 진나라를 나누어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다"라며 여불위의 조언을 따른다. 그 후에 여불위에게 받은 돈을 화양부인의 가족들에게 뿌려서 호감을 산다. 화양부인은 정실이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서 서자가 후계자가 되면 자신이 홀대받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는 영이인을 양자로 삼고는 안국군에게 영이인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던 중 영이인은 여불위 집에서 한 여성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마음에 든 영이인은 여불위에게 부탁하여 그 여자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 여자가 바로 조희로 영이인은 조희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 기원전 259년 음력 1월 15일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그리고 영이인은 아들을 낳아준 조희를 정실 부인으로 삼는다.
이를 두고서 사기 여불위 열전에서는 ‘사실은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 중이었고, 영정은 여불위의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사기의 내용 중에서도 사기 본기에는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고, 사기집해에 따르면 ‘영자초와 조희가 혼인한지 12개월 뒤에 영정을 낳았다’고 하고 있으니, 혼인 후에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면 생물학적으로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견해이나 여불위와 조희, 노애 세사람의 관계를 보면 이는 전혀 근거없는 기록이 아니다.
기원전 257년, 진 소양왕이 왕흘을 시켜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자, 인질로 있던 영이인은 조나라 효성왕에게서 살해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영이인은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6백근의 금을 병사들에게 뇌물로 뿌리며 조나라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영이인의 가족들이 조나라에 남겨졌는데, 조나라는 남아 있는 영이인의 가족들이라도 죽이려 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부자 집안이라서 조희와 영정 모자는 살 수 있었다.[2]
진나라로 돌아간 영이인은 화양부인과 만나는데, 이때에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초나라의 옷을 착용하고 화양부인을 만나라고 조언을 한다. 이유는 화양부인이 초나라 사람이였기 때문인데, 역시나 화양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영이인의 이름을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자초로 고치게 한다.[3]
2.2. 치세
진 효문왕 원년(기원전 250년), 아버지 효문왕이 죽어, 자초가 그 뒤를 이어서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다. 진왕으로 즉위하면서 죄인을 크게 사면하고, 소양왕 때의 공신들을 표창하면서 친족을 후대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진 장양왕 원년(기원전 249년), 장양왕은 여불위에게 군사를 주어서 동주(東周)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몽오(蒙驁)에게 명을 내려서 한나라를 공격하라고 하였고, 몽오는 한나라의 형양 땅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성고, 공 땅을 한나라가 바치자, 진 장양왕은 한나라에 받은 땅으로 삼천군을 설치하게 된다.
진 장양왕 2년(기원전 248년), 몽오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유차, 신성, 낭맹 등 37개의 성을 점령하고, 태원(太原)을 평정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였고, 위나라의 고도, 급 땅을 함락하였다.
진 장양왕 3년(기원전 247년), 위나라는 신릉군을 장수로 삼아서 반격하였고, 하외에서 진나라의 군사를 격파하고 몽오를 쫓아내었다. 이 일로 화가 난 장양왕은 인질로 와있던 위나라의 태자 증(太子 增)을 가두려다가, 진나라의 한 신하가 태자 증을 위해서 장양왕에게 간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왕이 증을 가두게 되는 것은 일찍이 공손희(公孫喜)의 음모이므로, 반대로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위나라가 제나라와 한나라 등에게 의심받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이에 그 말을 듣고서는 장양왕이 태자 증을 가두지 않았다.
같은 해에 장양왕이 사망하여 그의 아들인 정이 뒤를 이어 즉위한다.
3. 미디어에서
진시황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안 나올 수가 없다. 다만, 언제나 여불위보다 분량이 훨씬 뒤쳐진다.
- 실제 역사에서 장양왕은 꽤나 야심 있는 인물이었고, 화양부인에게 적극적으로 딜을 할 정도의 인물이었으나 1996년 CCTV에서 방영한 진시황이라는 드라마에서는 화양부인에게 거의 조종 당하고 말년에는 여불위에게 실권을 빼앗기는 유약한 왕으로 나온다.
- 고우영 십팔사략에선 약간 소심해보이는 외모와 성격의 소유자로 여불위의 후원을 받는 건 실제 사초에 기록된 것과 동일하지만, 여기선 야사의 '여불위 진시황 생부설'을 가져와, 자신의 아들이라 굳게 믿고 있는 영정이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을 혼자만 모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왕위에 오른 뒤에 여불위를 승상으로 임명해 은혜를 갚았다는 것 이외의 치세는 언급되지 않고, 즉위 후 3년 뒤 덜컥 죽어버렸다고만 나오는데, 사망원인도 왕후인 조희가 하도 밤낮으로 졸라대는 바람에 기력이 쇠해서(...) 죽은게 아닐까..하는 식으로 추측을 하면서 퇴장한다. 여러모로 4권의 주역인 진시황의 아버지치곤 빈약한 비중.